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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Apr 04. 2020

나이아가라에 못 올 뻔했다

2018. 10. 28. 일곱째 날

"No, You can't."

"What??????!?"


 어쩐지. 여행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상하리만치 평화롭고 모든 것이 순탄했다. 역시나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면서, 여행 준비를 위해 영혼을 갈아 넣은 덕분에 아빠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내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자만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상황이 다급해지니 생존 영어가 술술 나온다. 다음은 오전 9시에 체크아웃을 하며 호텔 수퍼바이저와 나눈 대화의 전문. (왠지 영어는 다 반말 같다) 


"하지만, 어젯밤에도 여기에 있던 직원에게 재차 확인했단 말이야. 나이아가라 폭포에 다녀오는 1박 2일 동안 20달러만 내면 짐을 맡아 줄 수 있다고 했잖아!"

"아니, 그건 어제 그 직원이 잘못 안 거야. 우리 호텔은 체크아웃하는 투숙객의 짐을 맡아주지 않아."

"나와 아빠는 2시간 뒤에 캐나다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해야만 해. 지금 당장 짐을 맡길만한 곳을 찾아 헤맬 시간이 없다고."

"Port Authority에 가면 짐을 맡길 수 있는 유료 캐비닛이 있을 거야.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야."

"그러니까 거길 지금 들렀다 갈 시간이 없다니까!? 어제 그 직원한테 물어봐. 진작 알았으면 어젯밤에 거기든 어디든 다녀왔겠지! 방법을 찾았을 거라고. 근데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 아! 저기 있네. 저 사람이야! 여기요! 어제 분명히 나한테 짐을 맡아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 걱정 말라고 했잖아요!"

"호텔 정책이야. 우리 직원이 뭐라고 했는지 나는 전해 들은 바가 없고, 설령 미리 들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어."

"제발, 한 번만 사정을 봐주면 안 될까? 아빠랑 나는 지금 당장 비행기를 타러 가야 한단 말이야. 안 그러면 나이아가라에 못가. 우리 아빠 70번째 생신 기념으로 1년간 계획한 여행이라고."

"미안, 안돼."

"가능하다면, 돈을 더 낼게. 추가 비용을 얼마든지 더 낼 수 있어. 제발 짐을 맡아줘."

"돈은 원래 내야 하는 거고. 하지만 넌 다음 체크인 예약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짐을 맡아줄 수 없어. 그게 정책이야. 이 호텔에서는 단 한 번도 체크아웃한 사람의 짐을 보관해 준 적이 없어."


 하늘이 노랗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호텔 직원의 태도에 울화통이 터져서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미 도착한 우버는 밖에서 대기 중이고, 아빠는 소파에 앉아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와 호텔 매니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호텔이라면서 서비스가 뭐 이래!? 말투도 표정도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분노 조절 장애 발작으로 이성의 끈이 끊어져서 욕이나 한 바가지 하고 나오려다가, 문득 한국에서 호텔 측과 짐 보관에 대한 이메일을 주고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만. 나는 분명히 호텔을 예약하기 전에 이메일로 짐 보관에 대해 문의를 했었고, 퇴실 이후에도 짐을 보관해 줄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어. 만일, 짐 보관이 불가능했더라면 난 애초에 이 호텔을 예약하지도 않았을 거야."

"말도 안 돼. 호텔 정책과 다른 내용을 답변했을 리가 없지."

"메일로 주고받은 대화 보여줘? 지금 보여줄 수 있어."

"그래. 보여줘."


 참나, 내가 뭐 거짓말하는 줄 아나 보네. 어디 보자. 이쯤에 있을 텐데..


"자! 여기 있네! 여기 정확히 쓰여 있네! '짐 보관은 가능하지만 보관소가 좁아서 100% 장담할 수 없으니, 출발 전날 짐 보관 가능 여부를 확인해 보십시오.' 난 알려준 대로 어제 저 사람에게 문의를 했고, 저 사람이 된다고 했어. 내가 지금 뭘 잘못했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호텔에서 하라는 대로 했어. 정책을 모두 지켰다 이 말이지. 그런데 갑자기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하는 건 전혀 이해가 안 되고 말도 안 돼."

"어디 봐. 흠... 아니, 오피스는 현장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대체 이런 메일은 왜 쓴 거야?"


 내가 알 바야 쓰레빠야. 너네 회사가 소통이 안돼서 잘 안 돌아가는걸 뭐 어쩌라고. 직원에게 호텔 정책을 똑바로 숙지시키는 건 매니저인 네 몫이고!


"정확히 1박 2일만 맡기는 거지? 짐은 몇 개야? 많으면 안 돼. 짐 가지러 오는 날은 시쯤 올 수 있니? 너무 늦으면 곤란해. 오후 8시까진 와야 돼."

"내일 뉴왁 공항 도착 예정 시간이 오후 7시라서 8시까지 오려면 좀 빡빡하긴 한데, 최대한 서둘러서 짐들을 가져갈게. 딱 1박 2일만 맡아주면 돼. 가방은 총 세 개고."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짐을 보관해 줄게. 이런 일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야. 우리 호텔은 원래 체크아웃한 투숙객의 짐을 절대 보관하지 않아."

"알겠어. 다음부터는 명심할게. 고마워."


 어휴, 짜증 나. 아침부터 괜히 진 뺐네. 내가 왜 고마워해야 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일단 아쉬운 사람이 숙여야 하는 법이니 가까스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감사 인사를 남기고선 이 모든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벨보이를 따라갔다. 호텔과 주고받은 이메일을 들이밀지 못했더라면 캐나다에 못 갈 뻔했다. 모든 건 글로 남겨야 한다며 메일 보내기를 종용했던 깐깐쟁이 남편에게 유난 떨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건만, 결국에는 그가 옳았구먼. 여러분, 증거가 중요합니다. 특히 말 안 통하는 타지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같아요.


 우여곡절 끝에 우버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데, 아빠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셨나 보다.


"무슨 문제가 있었냐?"

"아니! 제가 분명히 한국에서 이메일로 답변도 받았고 어젯밤에 호텔 데스크 직원한테도 재차 확인했었거든요? 퇴실한 다음날 캐나다에 다녀와야 하니 우리 짐좀 1박 2일 동안 맡아달라고요! 분명히 된다고 했는데 글쎄 갑자기 아침에 안된다는 거 있죠? 나 원참, 어이가 없어서. 이메일 보여주니까 그제야 무슨 선심 쓰듯이 짐을 맡아주겠다고 해서 간신히 맡겼어요. 어휴, 자칫 잘못했다간 나이아가라 못 갈 뻔했어요. 게다가 아까 그 직원 태도 보셨죠? 뭐가 그렇게 고고해!? 짜증 나!"

"아니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냐? 호텔이 뭐 그래? 일 참 못하네. 나는 네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줄 알았다. 그 직원이 하도 고자세로 굴길래. 야, 내가 다 화가 난다. 뭐 그런 게 다 있어!? 짜증 나네 진짜. 너 엄청 열 받았겠다. 그래도 현명하게 처신 잘했다. 큰일 날 뻔했구나."

"아빠가 이제 와서 화를 내시니까 재밌네. 감사해요. 아빠가 같이 욕해주니까 제 마음이 좀 풀리네요. 좋구먼. 역시 아빤 공감을 잘해줘서 좋아."

"근데 너 영어 잘하더라."

"저도 모르게 술술 나오더라고요. 위기가 닥치니까 온 몸의 피가 전부 다 뇌로 쏠려서 머리가 핑핑 돌아가는 그런 느낌이랄까?"

"음,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미국에서 공부한 보람이 있네. 네가 거기서 제대로 말까지 못 했어봐라. 진짜 억울하게 짐 다 들고 쫓겨났을 수도 있었던 일 아니냐?"

"그러게요. 처음으로 느꼈네요. 영어 조금 하는 게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하네."


 드디어 뉴왁 공항 도착. 캐나다도 처음이고, 미국에서 국내선을 타는 것도 오랜만이라 긴장됐다. (그렇다. 나는 걱정 인형이다) 다행히 친절한 우버 기사님이 아메리칸 에어라인 터미널 코 앞에 내려줘서 탑승권 발권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러고 보면 미국같이 넓은 나라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KTX를 타고 부산에 가는 정도의 일일 테니, 괜히 쫄았던 것 같다.


 한 시간 반쯤 걸려서 도착한 캐나다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을씨년스럽다'. 뉴욕보다도 더 춥고 흐린 날씨 탓인지 괜스레 사람들도 불친절해 보였다. 같은 영어권이고 거리도 멀지 않아서 그저 미국이랑 비슷할 줄 알았던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던 것이다. 국내선을 무사히 탑승하는 일에 이어 걱정인형의 두 번째 걱정은 바로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방법은 총 4가지. 시내버스, 공항 셔틀버스, 내 사랑 우버, 택시 중 하나를 타면 된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버스는 너무 오래 걸리고, 셔틀버스는 정기 운행 셔틀이 아니면 택시와 가격이 13달러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 호텔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고, 우버는 국경을 넘지 못하므로 두 번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해서 연로하신 아빠를 핑계 삼아 85달러쯤 하는 택시를 타기로 했다.


 입국 심사는 택시 안에서 이루어진다. 꼬장꼬장해 보이는 입국 심사관이 나와 아빠의 관계를 생각보다 집요하게 물어봤다. 정말로 부녀 지간이 맞는지, 왜 왔는지, 성이 같은지 꼼꼼히 확인하는 것으로 보아 그 사람에게도 부녀가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꽤나 보기 힘든 광경이었나 보다.


 마침내 도착한 Niagara Falls Marriott Fallsvies Hotel and Spa. 좋은 뷰를 위해 큰 맘먹고 비싼 축에 드는 방을 예약했다. 결과는..!


창문에서 찍은 바깥 풍경이 이 정도
효도 성공
살아 움직이는 액자가 여기 있습니다
TV에서만 보던 풍경이 굉음과 함께 코 앞에서 라이브쇼로 펼쳐지는 놀라움


역시!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군!


"아빠! 어때요!"

"음, 이 호텔은 좀 호텔 같다. 사실 맨해튼 호텔은 뭐 그게 호텔이냐? 하꼬방같았어. 그만큼 땅값이 비싸다는 뜻이겠지. 여긴 참 좋다. 침대도 2개나 있네. 내가 중국 갔을 때 호텔에 묵었는데 거긴 엄청 컸어. 거기가 1박에 얼마였는지 아냐? 단돈 5만 원."

"하꼬방..? 갑자기 웬 중국 호텔하고 비교를..? 아빠의 세계관을 따라잡기가 쉽진 않지만 어쨌든 좋다는 거죠? 나이아가라 입성에 성공했으니 이제 버팔로 윙을 먹으러 시내로 나가보자고요."


 그저 조금 큰 폭포일 뿐이겠거니, 별 기대 안 했는데 막상 오니 또 다른 느낌이다. 비가 와서 아쉽지만 아빠와 함께 하는 캐나다는 또 어떨지 기대된다.


 간신히, 나이아가라에 왔다.


나이를 짐작케 하는 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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