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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Mar 17. 2020

아빠랑 뉴욕 클럽에서 밤새워 놀아본 사람?

2018. 10. 26. 다섯째 날 오후

 호텔로 돌아와 잠시 쉬며 체력을 비축하다가, 대망의 오프 브로드웨이 뮤지컬 <Sleep no more>를 보기 위해 우버를 잡아 타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오늘이 가장 중요해! 이 순간을 위해 아빠는 <맥베스>를 열심히 읽으셨다고! (정작 난 안 읽음. 죄송) 자그마치 이날의 공연은 핼러윈 데이 특집이라서, 막이 내린 후에 After party까지 이어지는 ‘매우 비싼’ 공연이었다. 1인당 거의 35만 원씩 했고 둘이 합쳐 70만 원에 육박했으니 출혈이 매우 컸지. 얼마 즐기지도 못하고 금방 나오게 될 거라며 간혹 말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나의 선택을 의심한 적은 없다. 우리는 보통 부녀가 아니니까.


 드레스 코드가 블랙이라고 적혀 있길래 꼭 검은색 옷을 가져오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데, 이 또한 부모님께는 큰 숙제였다. 영화 속에 나오는 진짜 미국식 칵테일파티인 줄 알고 맞춤 정장에 넥타이까지 준비하려고 하셨단다. 하긴 부모님만 대혼란이었던 것은 아니지. 나도 열심히 구글링을 했는데 이게 대체 무슨 형태의 공연과 파티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무난하다 못해 정숙한, 경력직 2차 면접에서나 입을법한 긴팔 원피스를 가져왔다. 아빠 앞에서 등짝 스매싱을 부르는 노출이 심한 드레스나 넥라인에 큐빅이 줄줄이 박힌 홀터넥을 입을 수는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옷은 실패. 너무 무거웠고 얌전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일정 짜느라 잠시 정신이 나갔던 듯)


 여유 있게 나온다고 나왔는데, 뉴욕의 교통체증을 잠시 잊고 있었다. 모든 도로가 일방통행이라니, 너무하잖아? 엄청 돌아가야 할 뿐만 아니라 막히면 정말 말 그대로 답이 없다. 게다가 지금은 퇴근시간..! 우버 드라이버에게 공연에 늦어서 그러니 빨리 좀 가주면 참으로 고맙겠다고 읍소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고맙게도 그는 공연 시간을 묻더니, 클락션을 크게 울리며 수많은 차들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서 달려주었다.


"Well, I think you will be fine."



 휴, 한시름 놓았다. 으슥한 곳으로 차가 향할수록 사진에서만 보던 골목길과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드디어 도착! 힙해! 와 힙해! 열심히 달려준 기사님께 감사한 마음을 담아 팁을 넉넉히 챙겨드리고, 사람들 뒤로 가서 아빠와 함께 줄을 서니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살면서 아빠랑 클럽 파티 줄 같이 서 본 적 있는 사람? 아마 찾기 어려울걸? 자부심을 느끼며 이젠 하도 말해서 입이 아플 지경으로 '힙한' 그라피티 월 앞에서 셀카를 촥촥촥 찍다 보니 드디어 우리가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흥분되는 가슴을 안고 소중히 챙겨 온 티켓 2장을 경호원에게 보여준 뒤, 어두컴컴한 성 안으로 드디어 입성했다.



나만 신난 듯


 여기서 이 신박한 공연 얘기를 잠시 해 보자. (스포 주의!) 이 공연은 맥키트릭 호텔(The McKittrick Hotel)이라는 6층짜리 낡은 건물에서 벌어지는데, 무대도 대사도 관객도 없는 실험적인 연극이다.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이 장소를 '1939년 경제 대공황이 끝나갈 무렵 뉴욕 첼시 지역의 초호화 호텔로 지어졌지만, 개장을 불과 6일 앞두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지금까지 문을 열지 못한 비운의 호텔'이라고 소개하고 있어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결론은 구라다. 그냥 클럽으로 쓰던 낡은 건물에 스토리를 부여하여 신비감을 더하고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했던 거란다. 천잰데?


 건물 전체, 100개가 넘는 방에서 최대 3시간 동안 동시에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은 가면을 쓰고 극의 일부가 되어 적극적으로 배우를 따라다녀야 한다. 한 번의 관람에 모든 장면을 볼 수 없으므로,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재관람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공연은 감사하게도(?) 무언극이다. 말 대신 배우의 강렬한 눈빛과 생생한 몸짓을 코 앞에서 볼 수 있어 커브드 스크린 뺨치는 뛰어난 몰입감을 자랑한다. 그리고 역시나. 영국 공연 그룹 펀치 드렁크에서 하고 있다고 하니, 예부터 문화의 발상지는 유럽이요, 그 꽃은 자본주의의 끝판왕 미국에서 핀다.

 

 이게 얼마만이냐! 매캐한 이산화탄소 연기 냄새. 21살 때 공짜 맥주 마시면서 '춤만 추기 위해' 나이트 좀 기웃거렸을 때 이후로 거의 10년 만에 맡는 향기다. 조금 다른 점은 금발에 스모키를 짙게 한 미국인 언니가 내 짐을 맡아준다는 것.


"Are you gonna enjoy the party after the show?"

"Yes! With my father!"

"Awesome! Here are your tickets, and you can find your bags whenever you want."

"Without any extra charge?"

"No extra charge!"


 좋아 좋아. 아빠 손을 꼭 잡고 드디어 컴컴한 복도로 들어섰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입구에서 Coat Check을 할 때는 분명히 파티까지 참석하는 티켓으로 끊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나서 밖으로 나왔을 때는 모든 장소가 파티룸으로 변해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서 누가 파티 티켓까지 끊었는지 공연 티켓만 끊었는지 구분할 길이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했다가 나가라고 했다고 하기엔 다들 그 유명한 가면을 똑같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을 텐데. 나 사기당한 거 아냐!? 에이 설마. 모르겠다. 즐겼으면 됐지. (누누이 말하지만 지불한 만큼의 가치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트럼프 카드같이 생긴 티켓을 한 장씩 받아 들고 안쪽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갔다. 복도는 매우 어두웠고 그로테스크한 소품과 붉은 조명들이 기괴한 분위기를 열심히 내뿜고 있었다. 함께 입장한 관객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간간이 분위기를 풀어주었기에 망정이지, 귀신의 집에 온 것처럼 조금 무서울 뻔했다. 혹여나 넘어지지 않게 아빠의 어깨를 꽉 부여 쥐고선 어둠을 헤치고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붉은 조명 때문에 그저 '빨간 방'으로 기억될만한 Manderly Bar가 나왔고 먼저 입장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음. 돈 많은 사람들이군. 조금 이르게 입장해서 테이블에 앉아 멋들어지게 술을 마시며 기다릴 수 있는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이다. 나도 살까 살짝 망설였지만 후반전 때 달리려면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그리고 돈을 아끼기 위해) 전반전은 가볍게 패스했다.


 

공연 직후에 찍은 붉은 방, Manderly Bar 입구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며 아빠에게 이 공연이 얼마나 혁신적이며 특이한지,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공연한 적 없는 최신의 연극이며 이걸 보는 아빠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이게 다 훌륭한 딸을 둔 덕분이며, 힘드시겠지만 적극적으로 배우를 따라다니지 않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느니 하는 정보와 자화자찬이 뒤섞인 말들을 열심히 지껄이던 중, 멋지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신사가 나와서 근엄한 목소리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옳거니. 인터넷에서 본 바로 그 순간이로군. 아까 받은 카드에 적힌 순서대로 조를 짜서 엘리베이터에 10명 정도씩 탑승시킨 뒤, 무작위로 내리게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변수 없이 그룹 그대로 층마다 이동시켰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나는 아빠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지만 열심히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빠, 이제부터는 우리가 헤어지게 될 수도 있어. 이건 원래 각자 보는 연극이거든. 연극을 다 보고 난 다음에 각자 본 장면들을 서로 얘기하면서 퍼즐을 맞추는 재미도 있대요. 나랑 헤어진다고 하더라도 무서워하지 마시고. 어차피 끝나면 신기하게 한 군데서 다시 만난 대요. 어두운데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고.”

“그래. 알았다. 내가 왕년에 불빛 하나 없는 월남에서도 잘 다녔다. 걱정하지 마라.”


 역시 월남전 용사는 달라. 다행히도 우리는 같은 층에 내렸지만, 난 예고했던 대로 혼자 후다닥 달려서 왠지 모르게 주인공 같은 남자를 쫓아갔다. 아빠, 미안. 나도 좀 즐길게.


 건물에 있는 100여 개의 방을 빼놓지 않고 구경하고 싶은 욕심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단막극들을 구경하다가 가장 많은 관객을 몰고 다니는 듯한 턱수염의 곱슬머리 남자 배우를 쫓아갔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바로 주인공인 맥베스였던 것 같다. 아직도 그 배우의 향수 냄새가 코 끝에 맴도는 것만 같다. 스모키 하면서도 전형적인 남자의 스킨 냄새, 거기에 더해진 땀냄새와 영롱하게 글썽이던 땀방울까지. 키는 160cm 정도로 작아 보였지만 짙고 긴 속눈썹 아래에 가려진 진갈색의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공연장을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는 바로 전 타임 연극의 마지막 장면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 멋진 남자와! 어마 무시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연기하다가 갑자기 관객을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아무도 다가서지 않자 허공으로 손을 휘휘 저었고, 그 모습이 마치 ‘잡아! 좀 잡아라 이놈들아! 극 전개를 위해 좀 잡으라고!’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내가 누구야. 행동이 생각보다 먼저 나가는 사람 아니던가. 망설일 틈도 없이 물에 빠진 사람 구하는 심정으로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그랬더니 와우! 날 갑자기 자신의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더니, 내 귓구멍에 그의 입술을 밀착시켜서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 귀 씹어 먹히는 줄 알았다. 내 귀를 만두처럼 접어서 먹으려고 했다고. 하지만 죄송합니다.. 뭐라는지 못 알아들었어요.. 너무 시끄럽고 말이 빨랐어.. 지금도 궁금해 죽겠어.. 뭐라고 했는지.. 어찌 됐든, 가면 넘어 부러움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다른 관객들의 눈들이란! 부럽지!? 역시 인생은 실전이야! 행동하는 자를 생각만 하는 자는 이기지 못한다고! 괜히 친근한 느낌이 들어서 그 배우를 한참 따라다니다가, 옷 갈아입고 세수하고 다른 배우랑 교대하길래 또다시 미아가 되어 이 방 저 방 열심히 뛰어다녔다. 나중에 보니 이날 밤에만 3만 보 넘게 걸었더라.


앗, 아빠다.


“아빠! 잘 보고 계세요? 왜 여기 혼자 앉아 계세요? 아무도 없는데!”

“이게 다 뭐하는 지랄인지 모르겠다.”


 와 나 진짜 빵 터졌다. 역시 아빠다운 감상. 지랄이라니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작품인데! 남들은 보고 싶어도 못 본다고! 근데 왜 지랄이라고 하시는지는 알겠다. 원래 예술이 다 지랄이지 뭐.


“아 뭐야~! 재미없어요!?”

“재미라기보단 좀 특이하다. 사람들 따라다녔더니 힘들어서 잠깐 쉬는 중이다. 그래도 몇 개 보긴 했다.”


 아빠 나이를 너무 간과했나? 0.5초쯤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왕 온 거 어쩔 수 없지. 각자도생으로 일만 퍼센트 즐기자고요. 이 성에서 안 가본 곳이 없도록 말이에요. 재충전해서 꼭 다시 뛰어다니시라는 당부와 함께 오도카니 아빠를 남겨둔 채 난 또다시 극 속으로 빠져들었다. 매우 조급한 마음으로. 1초에 1만 원씩 나간다는 마음으로.

 

 공연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불과 3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배우의 관절 꺾이는 소리, 눈 깜빡이는 소리까지 느껴지던 군무도 멋있었고, 머리가 짧은 여배우와 하녀의 연기도, 갑자기 훌러덩 옷을 벗어던져서 살짝 당황할 뻔했지만 가면 속에 숨은덕에 실컷 구경할 수 있었던 19금 장면들도 전혀 야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예술적이었다. 그 유명한 거시기 춤도 보았다. 번쩍거리는 플래시 조명 아래에서 약에 취한 맥베스가 다 벗고 춤을 추는 것도 나는 봤지. 이 방은 진짜 운 좋은 사람들만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와우 난 봤다! 다 봤다! 거 참 거시기하네! 그리고 살짝 죄송하게도, 이 공연과 건물을 온전히 즐기기 위한 욕심에 이번만큼은 아빠는 조금 뒷전이었다. 뭐 어때. 이 공연 원래 그런 거라는데. 그리고 아빠는 월남전 용사니까 괜찮았겠지 뭐. 무엇보다 진짜는 이 연극 뒤에 펼쳐질 핼러윈 파티니까!

 

 끝날 때가 되자 곳곳에 서 있는 안내자들에 의해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한 방에 모였고 다 함께 충격과 공포의 엔딩을 감상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 '정 부녀 in 뉴욕' 관광의 하이라이트! <Sleep no more> 크루와 함께 하는 핼러윈 파티가 시작되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아까 그 붉은 방의 무대 위에서 배트걸 가면을 쓰고 그루브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언니 두 명이 보인다. 인심 박한 뉴욕답지 않게 공짜 드링크도 준다.


파티의 시작을 알린 그루비한 언니들


“아빠, 여기 진토닉 드세요. 공짜니까 부담 갖지 마시고. 근데 여기 너무 힙하지 않아요?! 힙해! 진짜 힙해! 아빠 지금 여기 진짜 힙한 거야! 나 예전에 뉴욕 살 때도 이런 곳은 못 왔는데! 너무 좋다~ 아빠! 너무 좋지!? 아빠 원래 나이트클럽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좋다. 언니들이 노래도 불러주네~ 저기 앉자.”

"힘드세요? 아무래도 다리가 좀 아프실라나?"

“다리는 별로 안 아픈데, 난 여기 앉아서 사람들 구경하는 게 재밌다. 너는 놀다 와라. 나는 여기 있으마.”

“진짜? 그래도 돼? 나 그럼 잠깐 둘러보고 올게요! 무슨 일 있으면 즉시 연락하시고.”


 뉴욕에서 힘들게 살았다고 징징거렸지만 돌이켜보니 할 건 다 했다. 학기가 끝나면 친구들과 클럽에 놀러 가서 춤추고 놀기도 했고 몇 잔 정도지만 가끔은 술도 마셨다. 그 당시엔 한인 클럽 '써클'이랑 'K-town 포차'가 잘 나갔더랬지. 'MARU'는 아직도 있더라. 그래도! 이렇게 본격 서양인 클럽에 거금을 주고 온 것은 나도 머리 털나고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스케일이 다르네. 덕중에 덕은 양덕이라더니. 벽을 가득 채운 집채만 한 거미줄에 붙어 다니는 거미인간, 커튼 뒤에서 그림자 공연을 하다가 갑자기 무대 밖으로 튀어나와서 아름답게 춤추는 여자 무희, 천장에 붙어있는 차량 모형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팬티에 망사스타킹만 입고 섹시하게 춤만 추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걸레질을 열심히 하며 무대를 정리하던 성실한 남자 댄서, 알전구로 치장한 금관 악기를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신명 나게 연주하는 악사들.. 100개가 넘는 방이 아까는 각각 다른 연기를 보여주던 개별 공연장이었다면, 이제는 각각의 공간이 하나하나 다른 콘셉트로 운영되는 거대한 아파트형 클럽으로 변모해 있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괜히 열 받지만 미국 장난 아니네. 특히 맛깔난 입담을 자랑하는 Drag Queen 사회자가 아주 재미있어서 그 무대 앞에서만 20분쯤 서 있었던 것 같다. 세계인과 떼창으로 하나 되던 순간, Frank synatra의 New York, New York을 진짜 뉴욕에서 목놓아 부르던 것도 좋았고. 그리고 여기서 나를 또다시 충격에 빠트린 사건 하나.


 드랙 퀸 언니는 댄스 경연 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자발적으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다가 가끔 참여율이 저조할 때면 국가별로 사람들을 모집했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인종이 모여드는 국제 도시 뉴욕이라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I need a French bitch. Where is a French bitch?"

 "No Asian? Korean, Chinese, Japanese, Vietnamese.. Anyone from Asia."


 이런 식이었고, Asian을 찾는 그녀의 말에 패기 있는 한국인 여성 둘이 지원했다. 화장법과 차림새로 보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잠시 여행 온 대학생들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춤을 추기 전에 어떤 분장을 한 건지,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등의 간단한 인터뷰를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영어가 유창하지 않았기에 원활하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무대도 마찬가지. 자신감 넘치는 무브를 선보이진 못했다. 속으로 열심히 응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인상적인 무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직전에 수박만 한 가슴을 열정적으로 흔들어대던, 솜털까지 스웩 장착하고 태어나신 레게머리 언니를 어떻게 이길 거야. 하지만 관객의 박수 소리로 점수를 매기는 토너먼트 시스템에서 예상을 뒤엎고 여차 저차 하여 16강과 8강을 거쳐 결승전까지 진출한 것도 의아했는데, 지금부터가 진짜 문화 충격 지점이다.

 

입담의 진수를 보여주마


"한국에서 온,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하지만 BTS와 같은 국적을 가진 케이팝 댄서가 좋으면 박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음? 아니면 자 여기, 귀여운 옷을 입고 있지만 자기들이 지금 뭐하는지 잘 모르는 유러피안이 좋으면 박수!"

 

마지못해 치는 듯한 아주 작은 박수 소리.


"내가 지금 잘못 들었니? 이 영어 못하는 케이팝 스타가 좋다고? 얘들은 단지 BTS랑 국적만 같을 뿐이야!"


와!!!!!!!!!!!!!!! 아까보다 더 커진 함성과 갈채.


(그녀들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얘들아, 뭐라도 말 좀 해봐."

 

"..."


침묵과 함께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부끄럽게 미소 짓는 입을 가리는 그녀들.


"여봐들. 이래도??"


우와아!!!!!!!!!!!!!!!!!!!!!!!!!! 


이건 그냥 1등 주라는 소리다.


 그리하여 한국팀이 1등을 해서 선물을 가져갔다. 이거 뭐야. 웬일이야. BTS의 위상이 이 정도라니? 아까 드로잉 트립 때 살짝 느끼긴 했지만, 진짜 이 정도란 말이야? 한국인 아이돌은 고사하고, '너는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 김정은 본 적 있어? 한국에서 사는 건 위험하지 않니?' 등의 황당한 질문을 늘어놓던 뉴요커들 아니었던가! 이렇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던 그들을 싸이가 말춤으로 계몽시키더니, BTS는 국위선양을 실현시켰다. 무대 위에서 부끄러워하던 한국인 여학생 둘에게 보내던 박수갈채에선 조롱과 무시가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더니. 동양 문화라고는 코리안 BBQ, 야끼도리 타이쇼나 차이나타운의 북경오리밖에 몰랐던 뉴요커들이 진심으로 BTS를 사랑하고 있는 듯했다.


 혼자 하는 구경은 이쯤 해 두고, 다시 효녀 딸로 빙의하여 아빠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지. 사실 중간중간 아빠가 앉아 계신 곳으로 가서 피곤하시면 들어가자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는 '30분만 더 있자'며 퇴장을 거부했다. 역시. 나랑 잘 맞아.


"좀 쉬셨어요? 컨디션은 회복되셨나?"

"그래. 사람들이 분장들을 하고 와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근데 어떤 남자애들이 나한테 오더니, 뭐 쏼라쏼라 하면서 엄지를 치켜들더라고. 내가 걔들 눈에도 멋있어 보였나 봐. 이 나이 먹고 여기서 이러고 있으니 그래 보이 기도 했겠다. 껄껄."


오호? 왠지 뿌듯한데? 역시 국적을 불문하고 인류 보편적으로 느끼는 감정은 같다니까.


"아빠! 춤은 좀 추셨어요? 여기 클럽이니까 춤춰야지."

"내가 한 춤 추긴 하지. 그럼 스텝 좀 밟아볼까?"


 아빠가 움직인다. 한 손에 마티니를 들고, 왕년에 배운 스포츠댄스 스텝을 우아하게 밟으며 천천히 팔을 위아래로 흔드신다. 아! 보기 좋다. 진짜 오길 잘했다. 아빠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어. 나이 일흔한 살에, 딸이랑 둘이 뉴욕으로 여행 간 것만으로도 엄청난데 새벽 1시에 어마어마한 핼로윈 파티 즐기면서 춤추고 놀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왕년에 스텝 좀 밟아보신 분


 10분만 더, 20분만 더를 외치던 정 부녀는 건물 여기저기를 쏘다니면서 실컷 놀다가 새벽 두 시 반이 되어서야 맥키트릭 호텔을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중에는 내가 먼저 나가자고 했지만 아빠가 계속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했다. 지루한 건 못 참지만 재밌는 건 끝장을 보는 성격이 아빠로부터 온 줄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이렇게 죽이 잘 맞는 걸 보니 피는 확실히 물보다 진하다.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지. 블러드 이즈는 티커 댄 워터라고. 이것은 아빠식 한국어+영어.


 밖으로 나오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추운 건 둘째치고 비 오는 주말 밤에 택시 잡기 힘든 건 전 세계 공통인가 보다. 처음에는 우버를 불렀는데, 한참만에 잡힌 우버 기사의 위치를 당최 찾을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방위에 약한데, 가로등도 많이 없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한적한 첼시 안 어느 골목에 내가 부른 차가 있는지 알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결국 우버 기사는 도착한 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대체 어디 있는 거냐며 전화기 너머로 짜증을 팍 내더니 사라져 버렸고, 나는 No show 처리되어 허무하게 10달러가 결제되었다. (너무 억울해서 '짜증 나'라고 가계부에 적어놨는데 나중에 이메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클레임 메일을 보냈더니 다행히도 10달러를 크레디트로 넣어주었다) 이거 길바닥에서 밤새는 거 아닌가 하는 공포심이 느껴지던 바로 그 순간, 다행히도 친절한 기사님이 운전하는 Yellow cab을 가까스로 잡아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새벽 세시 반이다. 말 그대로 하얗게 불태웠다. 총 18박의 일정에서 5박밖에 안 지났는데! 여기서 체력 고갈되면 큰일인데. 아빠 몸살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아냐. 내일 당장 둘 다 들것에 실려 한국으로 강제 입국당해도 괜찮을 정도로 오늘 밤은 완벽했다. 아빠랑 내가 최고의 클럽 메이트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앞으로 펼쳐질 '정 부녀' 인생에 한 획을 긋게 될 역사적인 날이다.



Photos from The McKittrick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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