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재 Mar 15. 2020

역시, 아빠는 천재시군요!

2018. 10. 26. 다섯째 날 오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이런 표현을 감히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침부터 아빠는 나의 언성을 높이게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속이 너무 상해서 마음이 쓰라린데, 식탐 정선생님께서 어제 피터 루거 레스토랑에서 남겨 갖고 온 스테이크를 홀라당 다 드셨기 때문.


 아침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나서 잠이 덜 깬 눈으로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아빠가 스테이크 봉투를 주섬주섬 뜯고 계시길래 절대로! 고기를 다 드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무엇을 얼마나 드시든지 상관없지만 나를 위해서 꼭 한입은 남기시라고! 제발!


 아빠는 예의 그 다정한 말투로, “아, 당연하지! 내가 설마 딸 먹을 것까지 다 뺏어먹겠냐~?”라고 호언장담 하시며 ‘한 두어 개’의 작은 고기를 집어먹고 말겠다고 하셨다.


 이때 내가 봉투를 잡아챘어야 했는데! 작은 고기 두어 개..? 싸온 게 고기 두세 점인데..? 그 말은 곧 전부 다 드시겠다는 건데..? 느낌이 싸하지만 설마 다 드시겠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잠을 이길 수가 없어서 조금 더 꿈속을 헤매고 말았건만. 시간이 흐르고 잠에서 깨어 설레는 마음으로 어제의 그 육즙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자 스테이크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는데..? 역시. 고기는 없고 앙상한 티본 뼈만 남아있다.


“아빠!!!!!!!!!! 다 먹었잖아!!!! 이것 봐!!! 내가 다 먹지 말라고 했지!!! 하여튼 그 식탐 어떡하실 거예요!! 내 고기!!!!!! 나도 먹고 싶었는데!!!!!”

“이상하다? 큰 건 남겼어! 난 작은 것만 먹었다고!”

“이건 뼈잖아!!!!! 큰 티본 뼈!! 아빠는 작고 알찬 고기만 드시고 저한테 앙상하고 큰 뼈만 남겨주셨다고요!!!”

“아이고. 야, 미안해서 어쩌냐. 나는 이게 고기인 줄 알았어~ 그래서 너 좋은 거 주려고 찌끄러기만 먹었지!”

“찌끄러기..? 아빠는 알맹이만 홀라당 드셨어요!!! 아~ 내 고기!! 내 고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으로 이거 먹을 생각에 행복했는데! 내 고기!!!!! 내 스테이크!!!”


내 맘을 텅 비게 한 텅텅 빈 스테이크 봉지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잡솨버린 고기를 토하실 수도 없는 일. 서운함과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아빠를 노려보며 남은 것들을 열심히 뜯어먹었다. 아~ 맛있다. 차갑게 식었지만, 뼈에 붙은 조그마한 살점 부스러기 들일뿐이지만 정말 맛있다.


“이거라도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한국 가서 스테이크 사주마. 설마 하나밖에 없는 딸한테 뼛조각만 남겼겠냐? 꼭 한국 가서 똑같은 걸로 사줄게. 내가 너한테 빚졌다.”


  빚까지야.. 하여튼 오버셔. 하지만 아빠도 나처럼 빚지고는  사시는 분이니, 한국에서 파는 엄청 비싼 뉴욕식 스테이크를 얻어먹을  있을  같은 예감이 든다.


Grand Central Terminal


 날씨가 쌀쌀해서 손이 조금 시렸음에도 불구하고, 뉴욕 스케치 트립 'SKETCH AND THE CITY'는 성공적이었다. 오전 11시 30분,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서 오늘 함께 그림을 그리게 될 사람들과 함께 Ben Ponte 선생님을 만났다. 짙은 회색의 빵모자가 잘 어울리는 밝은 미소의 선생님은 호주에서 온 아티스트였다. 지금은 Green Visa로 체류 중이지만 언젠가는 아티스트로 인정받아서 미국 시민권을 받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펜실베이니아에서 뉴욕으로 여행 온 모녀는, 오늘이 첫날이라며 씩씩하게도 큰 캐리어를 한 개씩 끌고 왔다. 딸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소녀 아티스트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년 Sullivan과 함께 온 짧은 머리의 Bridgit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사람이었다. 카키색 비니를 깊게 눌러쓴 아들과 달리 가장 좋은 옷을 예쁘게 입고 싶었다면서 머리끝부터 발 끝까지 흰색으로 두르고 온 모습이 마치 유럽 귀족 같았다. 살짝 비껴 쓴 흰색 중절모가 킬링 포인트.


 마지막으로 타이완 사람이지만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수다쟁이 Chep이 오늘의 스케치 메이트였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Sullivan이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 중이라는 것이다. 나에게 그동안 익힌 한국어로 말해 보라면서 엄마가 등을 떠밀자 수줍게 몇 마디 했는데.. 미안한 얘기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정확한 한국어가 아니었던 듯하다. 뭐랄까, '가구니소하마' 와도 같은 음절들의 나열이었다. 한국어는 어떻게 배우는 중이냐고 물으니, 모바일 APP으로 독학 중이란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지만, 선생님의 수업을 따라가야 해서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Ben이 뉴욕을 그리게 된 이유와 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처음 이 도시에 와서 적응하고 일상을 이어나가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고 외로운 일이었지만, 괴로워하며 이방인으로 사는 것을 택하기보다는 뉴욕이라는 도시의 재미있는 풍경과 사람들을 노트에 옮기면서 이 도시와 하나가 되는 길을 택했다고 한다.


 좋은 방법인 것 같다. 문득, 학창 시절에 알고 지내던 독일 친구 Felix가 생각난다. 일러스트레이션 석사 과정이었던 그는, 손에서 노트와 펜을 한시도 놓지 않고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다. 한때는 나도 그에게 감화되어 글로만 쓰는 일기 대신 그림을 몇 개 그려 넣었는데, 얼마 전 다시 꺼내보니 더 열심히 많이 그릴걸 그랬다. 그림은 (매우 불안했던) 나의 심리 상태를 잘 드러내고 있었고, 그래도 그 순간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살짝궁 위로받았던 것 같다. 그래. 이게 바로 예술이 지닌 치유의 힘이지.


 마치 국제 정상회담에서 맹활약하는 통역사와도 같은 비장함으로 아빠에게 선생님의 말을 열심히 퍼다 날랐다. 친절한 Ben 선생님과 오늘의 스케치 메이트들은, 쏼라쏼라 영어로 말을 마치고 난 후 내가 한국어로 다시 전달을 완료할 때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기다려 주었다. 가끔 아빠의 반응도 체크해 가면서, 아빠가 뒤늦게 반응하거나 웃으면 함께 웃어주기도 하면서. 아빠의 행동 또한 사뭇 놀라웠다. 생각보다 여유 있게 “I am an artist, too!”식의 짧은 영어 문장을 구사하며 무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었다. 역시 남다르시군.


 선생님, 학생들, 커리큘럼 등 오늘 함께할 모든 것에 대한 소개를 짧게 마친 뒤, 그랜드 센트럴 역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순간이다! 한국에서부터 꿈꿔왔던 모습이다. '아빠가 화가 포스를 뿜뿜하며 전문가의 품격이 묻어나는 마성의 스케치를 구사한다 - 학생들 그림을 봐주던 선생님이 우연히 아빠의 그림을 본다 - 아빠의 실력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 엄청난 리액션과 함께 칭찬을 퍼붓는다 - 학생들 모두가 와서 아빠의 스케치를 구경하며 감탄한다 - 아빠의 어깨가 하늘로 솟는다 - 그걸 지켜보는 내 광대도 솟는다’ 뭐 이런 식의 스토리 보드였다.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낄낄. 학생들은 물론이고 선생님조차도 아빠가 연필 선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관찰하며 감탄사를 연신 내뱉었다. 그래, 이거지. 그림 실력은 국경을 초월한다니까. 그런데 재미있게도, 생각보다는 별로 아빠의 어깨가 하늘로 치솟지 않았다. 아빠는 당연했던 것이다!


“아빠, 신나죠? 사람들이 아빠 보고 다 잘 그린다고 하잖아요. 선생님도 놀란 눈치던데.”

아니, 나는 화간데 이 정도는 해야지! 근데, 눈이 잘 안 보인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원래 이 쪽에서 투시가 들어가면 이 시계가 좀 더 커져야 되는데, 이게 정확지가 않네. 눈이 침침해서 전처럼 잘 안된다. 원래는 이것보다 훨씬 더 잘 그리는데.. 이게 이쪽이 좀.. 지우개 있냐?”


 역시. 내가 졌다. 나의 어설픈 완벽주의는 모두 아빠한테서 온 거야. 유전자는 위대하니까.


 

 영화 속 감초 캐릭터처럼 조잘거리며 TMI를 제공하는 Chep덕분에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고, 소리를 전달하는 귀퉁이(Whispering Gallery)도 체험해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실로 오랜만에 하는 스케치였는데,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을 일깨워 준 선생님께 감사하다. 커리큘럼도 잘 짜여 있었다. 처음에는 10초 안에 그리기, 그다음은 30초, 1분 그리기. 한 대상을 골라서 그리기, 10M 떨어져서 그리기, 계단 위에 올라 전체 풍경 그리기 등. 아빠도 수업에 열중했다. 눈이 침침해서 그림이 잘 안 된다며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내가 보기에는 선생님보다도 더 잘 그리는 것 같았다. 화가 인생 +30년만큼의 포스가 더 느껴졌다고나 할까? (Ben 선생님, 죄송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도 있잖습니까?) 화가가 꿈이라던 여자아이는 진짜 소질이 있어 보였고 아빠가 연신 Very good을 보내니 무척 기뻐했다. 고수가 인정한 재야의 실력자가 된 기분이었겠군!


 그림이야말로, 특히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그리는 것이야말로 누구든지 척 보면 척이니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은 전 세계 어딜 가든 인정받을 수 있는 좋은 무기를 갖고 다니는 것과도 같다. 그런 면에서 아빠의 잘난 척 게이지를 채워드리기 위해 이 에어비앤비 트립을 신청했지. (참고로 아빠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는 바로 '기승 전잘'이다. 기승전 '잘난 척'의 줄임말)



 역 밖에서도 스케치는 계속되었다. Sullivan이 너무 추운 나머지 비니를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소중한 손난로를 그에게 선물했다. 열심히 흔들고 나서 주머니에 넣어야 따뜻해진다고 했더니 진짜 열과 성을 다해서 흔드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의 엄마인 Bridgit이 다가와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 Sullivan이 한국을 무척이나 가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아까도 궁금했지만 왜 Sullivan이 한국에 관심이 많은지 그 이유를 물으니, 와우. BTS를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란다. 한국어도 BTS 팬이라서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요 근래 BTS의 위엄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그 현장을 목격하니 참으로 신기했다. 어른이 되면 보내주겠다는 엄마의 말에, '16살에 가고 싶어요.'라고 답하니 엄마는 단호하게 18세까지는 안된다고 했다. 'Come on~'이라며 몸을 배배 꼬는 것이 참 귀엽다.


 글쎄, 내가 뉴욕에 있었던 때까지만 해도 한국인 남자는 가장 인기 없는 인종(?)이었는데. 아니, 아예 한국이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일본 옆에 있니? 중국 옆에 있니? 난 일본 좋아하는데. 일본 가보고 싶어. (어쩌라고?) 국적을 물어보고 나서는 북한에서 왔니, 남한에서 왔니, 하는 질문을 받기가 일쑤였다. 당연히 남한에서 왔지. 난 북한에 가본 적도 없고 갈 수도 없어. 그래? 김정일이 그렇게 만들었구나! 김정일은 참 나쁜 사람이야. 그렇지?로 끝나는 국적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끝.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객관적으로 나의 조국을 바라볼 수 있게 함과 동시에 대한민국이 세계적으로 어떤 나라로 여겨지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순간들이라 자못 씁쓸하기도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며칠 안됐지만 지금까지 느낀 바에 의하면 그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것 같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첫 단추를 끼웠고, BTS가 확실히 지금 대세는 대세인가 보다. 트렌드에 가장 민감한 초등학생의 마음을 사로잡다니.


추위를 피하는 신박한 방법.


 정작 뉴욕에서 살 때는 와보지도 못했던 뉴욕 공립 도서관 앞에서 저 먼 골목 끝을 바라보며 소실점에 따라 스케치를 한바탕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나니 오늘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한국 여행을 계획하는 Sullivan을 위해, 한국어 공부에 도움이 될만한 APP을 골라서 엄마 폰에 설치해 주었다. 너무 이상한 APP으로 공부를 하고 있길래!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앱을 재빨리 하나 골랐는데 4달러나 하길래 괜찮냐고 했더니, "It’s just 4 dollars!"라고 하던 쿨맘께 감사.


Sketch and the City with Ben Ponte


 이왕 온 김에 뉴욕 공립 도서관 안쪽을 둘러보기로 했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미국의 건축물들은 의외로 유럽스럽다. 전 세계에서 좋아 보이는 건 다 갖다 놓고, 유능한 사람들도 전부 끌어모아서 건물도 실컷 짓고는 얄미우리만치 보전도 곧잘 하는 느낌이다. 마치 옆집에서 냄비 받침으로 쓰던 고서를 사들인 뒤 잘 닦아서 전시해 놓고 돈까지 받으면서 보여주는 것처럼, 예쁜 도자기를 빚기로 유명한 도공을 모셔와서 자기 집 식기를 만들게 하는 부호처럼.


 대한민국 역사가 자그마치 5천 년이라고 했던가? 미국에 비해 기나긴 그 역사가 도시 곳곳에서 생생하게 느껴지고 있는지, 훌륭한 문화재들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외국에 나오면 애국자가 된다더니,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되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가로수에 핀 꽃송이에 감탄할 여유도 없으면서.


"확실히 뉴욕에 와 보니 미국의 저력이 느껴진다. 이게 도서관이냐? 예술 작품이지."

"그러네요? 저도 처음 와보는데 진짜 멋있다."


 도서관 안쪽까지 들어와 보니 기가 질리도록 화려한 인테리어와 아름다운 조명, 명화들로 도서관을 장식했다는 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훌륭한 곳을 무료로 개방하는 것도. 그래서 틈만 나면 노트북을 들고 와서 앉아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구나. 난 아이맥을 썼기에, 그 큰 컴퓨터를 들고 여기까지 올 수 없었지. 아니, 여기에 와서 과제를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빠서. 가끔은 이런 곳에서 책도 보고, 에세이도 쓰면서 뉴요커의 기분을 만끽해 볼걸. 여행을 하면 할수록 후회스러운 것들 투성이다. 한국에서의 일상도 나중에 돌이켜 보면 아쉬우려나.



 드로잉 트립 중 초코바로 간신히 요기를 하긴 했지만, 점심을 제대로 못 먹은 지라 맥도널드를 가 보기로 했다. 주문을 안 한 사람은 아예 2층으로 올라갈 수 없도록 경비원이 지키고 선 모습이 뉴욕스럽다.


“아빠, 여기는 맥도널드가 24시간이야. 내가 학생 때도 그랬어요. 지금은 한국에도 24시간 운영하는 매장이 많은데, 10년 전만 해도 별로 없었거든. 처음에 우리나라도 24시간 여는 매장을 만든다고 했을 때 좀 놀랐어. 미국에서만 가능한 일인 줄 알았으니까. 그리고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와. 싸잖아요. 우리나라도 패스트푸드점은 학생들이 많이 가잖아. 그래서 이렇게 어수선하고 정신이 없어. 밤에는 위험하기도 해. 노숙자들이랑 불량학생들이 여기서 밤을 많이 새 거든. 근데 또 가끔 화장실 가고 싶을 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지. 나도 가끔 화장실 급할 때 오곤 했었는데, 아빠 화장실 가고 싶으시죠? 어디 보자. 역시 비밀번호를 걸어놨네.”

"그래, 주문부터 해라."


 카운터 앞에 늘어진 긴 줄 뒤에 서니 또 예전 추억들이 문득 어제 있었던 일처럼 떠오른다. (이 여행은 효도관광과 추억여행의 결합판이군) 가난한 유학생이던 나는 저비용 고칼로리의 프렌치프라이 또는 살이 안 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켜서 안도감을 주는 스낵랩을 자주 사 먹었다. 조금 사치를 부리고 싶은 날에는 스낵랩에 프렌치프라이+콜라까지 나오는 스낵랩 세트를 시켰다. 짭조름하게 소금기를 머금은 눅눅하고 긴 감자 스틱이 그 당시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 중 하나였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검소하게도(=궁상맞게도) 살았다. 지금도 가끔 감자튀김을 먹을 때면 그때가 생각이 난다. 혹시나 못 알아들을까 봐 쭈뼛거리며 또박또박 번호로 주문을 하던 내 모습이.


 아빠랑 마주 앉아서 시그니처 버거를 먹고 있자니 또다시 감상에 젖게 된다. 당시에는 엄두도 못 내던 고급 수제 버거 세트를 살 수 있는 나의 재력에 감동받고, 아빠랑 단둘이 패스트푸드점에 마주 앉아서 우걱우걱 햄버거를 먹고 있는 이 순간이 참 소중하고. 아빠는 미국 햄버거는 고기를 바싹 익히는 것 같다면서, 간이 좀 짜다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역시 미식가는 다르시군요. 그래도 군말 없이 내가 하자는 대로 묵묵히 다 따라주시는 아빠가 참 고맙다.


"아빠, 아까 그린 그림들 좀 보여줘요."

"그래. 네 것도 좀 보자."

"제 건 너무 못 그려서 못 보여드리겠어요. 창피해."

"뭐가 창피해."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들여다보니, 음.. 역시 대단하시군. 미대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아빠만큼 그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더라고. 일단 나부터가 아빠만치 못 그린다. 위대한 아빠를 둔 덕분에 내심 주눅이 들었던 것도 사실인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얼마 전 만나 뵌 아빠의 친구분도 그랬다.


"내가 중학교 때 네 아빠랑 같이 미술반을 했는데,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내가 질려버렸지 뭐냐? 아니, 내가 옆자리에 앉은 얘보다도 그림을 못 그리는데 화가를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야. 덕분에 나는 디자인이라는 것을 알게 돼서 그쪽으로 가게 됐지. 결과적으로는 잘 된 일이야. 난 디자인이 적성에 맞거든."


 아빠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으니, 바로 "역시, 천재시군요!"라는 말이다. 어렸을 때는 아빠가 남들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인 줄도, 동서양 철학과 고전 문학을 이미 학창 시절에 마스터한 지식인인 줄도 몰랐다. 그저 어른들은 원래 다 그런 줄 알았다.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살아갈수록 절실히 깨닫는 중이다. 나이만 먹는다고 어른이 아니구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모두가 아빠처럼 훌륭한 어른은 아니더라. 나도 마찬가지고. 서른 중반을 향해 가지만 아빠가 남긴 족적에 비견할 정도로 위대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역시, 아빠는 천재다. 아빠만 인정 못하는 천재.


이전 07화 살살 녹는 스테끼와 함께 우리 마음도 녹았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