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5. 넷째 날 오후
Brooklyn에서 자취하던 시절, 지금 생각하면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여유와 허세인지 모르겠다. 살이 찌는 건 싫은데 동네를 뛰는 건 무서워서 근처 헬스장을 꾸역꾸역 끊어 몇 달 다닌 적이 있다. 그 헬스장으로 가는 길에 바로 피터 루거 레스토랑이 있었다. 따뜻한 조명과 함께 버무려진 그사세(그들이 사는 세상)를 창문 밖에서 물끄러미 지켜보던 나는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나비넥타이와 드레스를 걸치고 활짝 웃으면서 스테이크를 써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미치겠더라.
그때는 그곳이 그렇게 유명한 식당인지 몰랐는데,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거기가 엄청난 스테이크 하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기필코 성공해서(!?) 그곳의 고기를 먹어보겠노라 마음먹었더랬다. 지금이 바로 꿈을 이룰 절호의 찬스. 무엇보다도 아빠는 고기를 사랑하시니까! 스테끼 러버! 눈물 나는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를 가니쉬 삼아 광란의 육즙 파티를 벌이기 위해 여행 3개월 전부터 새벽 4시에 일어나 전화를 걸었고 일곱 번 만에 간신히 예약할 수 있었던, 여러모로 안달 나게 하는 피터 루거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예약한 시간보다 15분이나 늦어서 5시에 도착했다. 10분만 지나도 예약을 취소한다길래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서버에게 연결해 주니 감사할 따름. 동양인들은 화장실 쪽에 앉힌다는 후기도 간혹 있던데, 다행히 창가 쪽의 좋은 자리를 주었고 서버 할아버지도 친절해 보였다.
웬 할아버지냐고? 테이블 사이를 우아하게 오가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노인이다. 아빠는 여기 직원들은 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인데 특이하다고 하셨다. 듣고 보니 또 그러네. 한국에서 자영업자를 제외한 고령의 아르바이트생을 본 적이 있었던가?
구글에서 열심히 찾아본 대로 생 토마토와 생 양파, 베이컨과 Steak for 2를 시켰다. 한국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생토마토와 양파를 추천했는데, 현명한 선택이었다. 전혀 다른 음식인데도 김치를 대신한다. 외국 나올 때마다 느낀다. 한국 사람들의 위대한 대동단결. 한민족의 위엄. 우리는 한가족.
식전 빵은 촉촉하고 베이컨도 끝내준다. 베이컨이 원래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구나. 이걸 이렇게 통으로 먹어야 되는데 대패삼겹살처럼 얇게 썰어놓은 게 문제였네. 연신 감탄하며 애피타이저를 먹어치우고 나니 오늘의 주인공 스테이크님께서 보글보글 끓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등장했다. 이 부위는 어떻고 저 부위는 어떻고 먹는 방법은 어떻고.. 친절한 고기 설명이 끝나고 난 뒤 가장 큰 살점을 포크로 찍어서 혀 위에 올려놓았다.
오호라..!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짙고 풍부한 고기 맛의 향연이다! 어마어마한 풍미!!!!!! 느낌표를 몇 개를 써야 이 맛이 전달이 될까!! 드라이 에이징 스테이크라고 하는데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럽고, 고소한 버터 물과 육즙을 끼얹어 한 조각 입에 넣으면 그 향이 콧구멍까지 가득 퍼지는 뉴욕식 스테이크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아빠 여기 대박이다. 진짜 맛있다. 아빠는 어때요? 맛있죠? 와, 나 태어나서 이렇게 맛있는 고기 처음 먹어봐."
"그래, 이건 그나마 좀 먹을 만 하구나.’
예?? 그나마 좀? 먹을 만 하구나!? 저기요? 선생님? 이 스테이크 한 덩어리가 자그마치 186.55불이라고요! 어떻게 그런 말을..!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도 나름 괜찮은 것들이었는데!? 저는 블루베리 베이글에 크림치즈만 먹으면서 살았다고요. 그에 비하면 요즘 매일이 호강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아하. 아빠는 1인당 10만 원쯤 하는 음식 정도는 드셔야 입맛에 간신히 맞으시는구나. 미식가인 줄은 알았지만 역시 고급이셔. 평생 우려먹을 명언이다. '그나마 좀 먹을만한 피터 루거 스테이크'.
큰 잔에 담긴 와인이 몸에 슬슬 들어가니 기분 좋게 술기운이 오른다. 그리고 이 기운을 빌어, 지금껏 살면서 서운했던 순간의 기억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중 하나는 이거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생신 선물을 준비해서 드렸는데, 아빠는 별 반응 없이 시큰둥하시더니 다음부터는 이런 거 줄 필요 없다고 하셨다. 어린 마음에 서운하기도 하고, 조금 화가 나기도 해서 어디서 주워들은 말인지 ‘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라고 해 버렸고 아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말버릇이 그게 뭐냐면서 큰 소리로 야단을 치셨는데, 평소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아빠가 너무 무섭게 느껴졌다. 그리고 예의 없이 말하긴 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심하게 혼날 일인가 싶어서 억울한 마음에 며칠 동안 아빠를 피해 도망 다녔다. 그 이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아빠한테 뭘 잘 못 드렸다고 하니, 매년 생일 선물을 사는 일이 너에게 피해가 될까 봐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게 혼낸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다신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나는 너한테 피해 주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거라.'라는 말을 해 오셨다. 부모가 자식 앞길을 닦아주진 못할 망정, 훼방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빠의 강한 신념이다. 남들은 흙수저를 물려받았다 어쩐다 하는데 아빠는 수저 자체가 없어서 진흙부터 만드느라 힘들었다는 얘기도 2503495번쯤 들었다. 간신히 티스푼쯤 빚어놓으면, 할아버지가 와서 그것마저 빼앗아 갔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게 살아오셨을지 대략 그려진다.
"근데요, 가족이라면 사랑과 물질을 계산 없이 주고받는 것이 당연한 거고, 설령 남남끼리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사는데, 부녀지간에 '내가 너에게 피해는 안 주겠다.'는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은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생신 때나 명절에도 힘든데 뭘 오냐고 그냥 집에 있으라고 하시는데, 아빠 말대로라면 평생 만날 일 없이 돈만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이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도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 아니에요? 그게 뭐예요. 남남보다 더 냉랭한 관계잖아요. 그런 생각 이제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늘 가슴속에 담고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들이다. 중간에 울컥 눈물이 날 뻔도 했지만, 왠 주책인가 싶어서 눈물샘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아빠, 혹시 지금 저랑 같이 다니면서 '내가 피해를 주는 게 아닐까' 하신다면,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저는 평생에 걸쳐서 뉴욕 여행 모시고 온 거 엄청 생색낼 거거든요."
"평생은 좀 길지 않냐? 한 1년만 하는 게 어떠냐?"
"평생도 모자라요. 여행기 작성해서 후대까지 물려줄 거라니까요."
"거 참 무시무시한 계획이구나."
"아빠가 먼저 저 뉴욕 보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시고 그냥 즐기세요. 내가 딸을 참 잘 뒀구나, 하고 그냥 기분 좋아라만 하세요. 그게 가족이잖아요. 남들한테 그랬다간 욕먹지만 우리끼린 괜찮아요.”
그밖에도 아빠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수영의 목소리가 좋다고 해서 용돈을 모아 이수영 1집 앨범을 사 드렸는데 왜 안 들으셨냐, 아빠 그림의 틀을 좀 깼으면 좋겠다, 즐겁게 좀 그리시라, 지지자는 불여호지자요 호지자는 불여락지자라고 하지 않느냐, 이번 여행에서 좋은 작품들 많이 보시고 좋은 그림 그리시면 좋겠다, 했던 이야기 계속 안 하셨으면 좋겠다! 뉴욕 여행을 통해 얻은 소재로 새로운 이야기보따리를 만드셨으면 좋겠다 등.. 다양한 주제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살면서 이렇게 아빠와 오랜 시간 동안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것이 처음인 것 같다. 일상적인 대화는 짧게 그치거나 서로에게 날을 세우며 안 좋게 끝난 적도 많았다. 특히 결혼한 후에는 아빠랑 단둘이 제대로 얘기할 시간도 없었다.
여행 와서 처음으로 아빠와 뉴욕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돈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맛있는 음식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다. 비싼 스테이크가 부리는 마법일까? 좋은 곳에서 값진 음식을 먹으니 몸도 마음도 말랑해진다. 아빠와 부쩍 가까워진 것도 같고,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주시는 것 같아서 참 좋다.
평소에 말은 많이 하고 살지만 대부분이 정보 교류를 위한 소리 전달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정보 교류면 다행이게. 보이지 않는 눈치 싸움과 탐색전을 벌이다 보면 그 누구 하고도 말을 섞고 싶지 않게 된다. 이해와 공감을 바탕으로 부녀 사이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순간을 경험하고 싶다면 피터 루거로 오십시오.
이제야 말인데, 어제까지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아니면 잠시 다녀 오든지, 일단 집에 갔다가 나중에 남편을 데리고 다시 오든지 하고 싶었다. 안 가길 잘했네.
마지막 행선지는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Marcy Ave.의 작은 아파트. 뉴욕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며 눈물과 열정을 고스란히 쏟은 추억의 자취방이다. 10년 같았던 1년을 살고 나왔다. 미소가 따뜻했던 집주인과, 늘 'Ciao!'를 외치며 힘차게 손을 흔들던 건물 관리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에메랄드색의 문이 사랑스러운 아담한 3층 주택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낮에 왔더라면 건물 관리인이 살던 집의 벨이라도 눌러봤을 텐데. 애정해 마지않던 집 앞의 멕시칸 레스토랑은 일본 음식점으로 바뀌어 있었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Fried icecream을 먹곤 했지. 마지막에 럼을 부으면서 해주는 불쇼가 멋졌는데, 아쉽다.
그러고 보니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이 좀 달라졌다. 예전에는 내가 거의 유일한 20대 여성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젊은 여성들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집값도 많이 올랐겠지. 그때 집을 샀어야 하는데(..?) 추억이 깃든 장소에 다시 오니 갖가지 생각과 함께 그 시절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마치 홀로그램처럼 거리 위로 몽실몽실 떠올라서 한참을 맴돌았다.
이젠 역 안에 최신식 전광판도 생긴 Marcy Ave. 역에서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예전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외로워서 지하철 안에서 혼자 엉엉 울곤 했다. 언제였을까, 반대편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던 커플의 얼굴이 생각난다.
그때는 혼자 지내는 것이 왜 그리도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글쎄, 그냥 힘드니까 울었겠지. 온전히 혼자가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니까. 옆에서 입을 벌리고 주무시는 아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아빠만을 위한 효도 관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나를 위한 힐링 관광이다. 아빠랑 뉴욕을 함께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뉴욕이 좋아졌다. 역시, 오길 잘했어.
오늘은 일찍 자야지. 이제 새벽에 자는 짓은 그만해야겠다. 내일은 또 내일의 야심 찬 일정이 계획되어 있다. (내가 짰지만 진짜 빡세긴 하다) 바로 예술 부녀이기에 가능한 뉴욕 스케치 트립! 에어비앤비에서 현지인과 함께 하는 트립 서비스도 제공하길래 이거다 싶어서 냉큼 예약했다. 아빠가 또 한 드로잉 하시지.
바로 내일, 아빠의 그림 실력이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이번 여행의 메인 디쉬이자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슬립 노 모어> 뮤지컬을 관람한 후 핼러윈 클럽 파티를 즐길 것이다. 다름 아닌 아빠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