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음악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마법
신기하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맥주 생각이 나곤 한다. 술이 몸에 들어오면 음주가무 모드로 바뀌는 그런 자연의 섭리와는 다르다. 분명히 말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거실 소파에서 앉아 음악을 듣는다고 갑자기 생기는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혼자 있을 때 시나브로 일어나는 일이다. 항상 내 주위를 떠도는 맥주의 신이 점지해주는 것일까? 가끔씩 홀로 음악을 듣다 보면 그분이 찾아오신다.
맥주와 음식을 매칭 시키는 것을 푸드페어링(food pairing)이라고 한다. 맥주와 음식이 함께 있을 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마법이다. 이 마법이 맥주와 음악에도 일어날 수 있을까? 흔치 않지만 이런 마법을 쉽게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공감각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이들은 우리가 각각 따로 느끼는 5감을 교차해서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도’라는 음을 들으면 ‘노란색’이 보이고, ‘단맛’을 느끼면 ‘미’라는 음이 들리는 식이다.
물론 나는 이런 공감각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이런 평범함이 오롯이 맥주를 즐기고 평가할 수 있게 한다. 공감각은 분명 특별한 경험이긴 하지만 주관의 영역이라 예술에서 더 빛을 발할 수 있다. 감성보다 이성이 조금 더 발달한 내가 특정 음악을 들을 때, 맥주가 떠오르는 건 이 둘 간에 연결점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정말 맥주의 신이 내려왔을지도 모르고.
런던 프라이드, 이 맥주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흔히 ‘속았다’라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투명한 밝은 루비 컬러가 뭔가 특별한 향을 줄 것이라고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잉글리시 페일에일 스타일인 런던 프라이드는 밍밍하다. 화려한 미국 크래프트 맥주에 비하면 초라하게 보인다. 더욱이 20세기 초 라거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사실을 알면 측은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근하고 섬세한 에스테르와 견과류 그리고 뒤를 받치는 옅은 풀향은 왜 이 맥주가 산업혁명시대를 풍미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게다가 낮은 알코올, 목 끝을 툭 치고 가는 쓴맛 그리고 드라이한 바디감은 여전히 이 맥주를 내 추천 리스트에서 제외시키지 못하게 한다.
퀸의 ‘under pressure’를 들을 때마다 나는 런던 프라이드를 소환한다. 퀸과 데이빗 보위가 만나 순식간에 완성된 이 명곡은 힐링 그 자체다. 하지만 밝고 흥겨운 멜로디 위에 쓰인 가사는 억압과 공포를 이야기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 지금까지 이뤄온 것들이 갑자기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 기득권 자본주의가 만든 불합리한 구조 그리고 원치 않게 얽혀있는 인간관계가 주는 고통들, 프레디 머큐리와 데비빗 보위는 이런 억압이 주는 공포와 불안을 사랑과 연대로 극복하자고 노래한다. 그런데 난 왜 이 노래에서 런던 프라이드가 떠오른 걸까?
사실 런던 프라이드와 Under Pressure가 만나는 지점은 뮤직 비디오다. 이 뮤비는 출발도 하기 전에 폭발하는 우주선, 대공황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자유를 억압하는 기득권의 폭력과 같은 억압을 보여준다. 이런 공포로부터 도망가고 싶지만 숨는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이 뮤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며 억압에 기꺼이 맞서는 우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과 연대로 이 억압을 이겨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이런 프레디 머큐리의 외침에 격한 동의를 할 수 있는 맥주가 무엇일까? 역설적이지만 무던한 모습의 런던 프라이드가 어울린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라고 자신에게 작은 위로를 보내는 맥주는 화려한 향을 가진 IPA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임페리얼 스타우트도 아니다. 시원함으로 갈증을 달래주는 라거도 하루를 정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영국 펍 글래스에 런던 프라이드를 가득 담고 천천히 마시노라면 하루 동안 나를 억압했던 모든 것들이 하나씩 머릿속에서 삭제된다.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탄산도 뒷머리를 때리는 강한 아로마도 없지만 잉글리시 페일에일이 가진 묵묵함은 오히려 우리를 기품 있는 존재로 만든다. 하루 종일 나를 괴롭히던 불안을 떨치고 여유롭게 루비빛 맥주를 한 잔 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대견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맥주가 가지고 있는 많은 여러 매력이 음악과 연결될 수 있다. 향과 맛일 수도 있고 라벨이 될 수도 있다. 혹은 색이 될 수도 있고 맥주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가 될 수도 있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영역을 넘나드는 이런 초연결은 21세기적인 즐거움이다. 게다가 음악과 맥주에 답이 있을 리 없기에 내 페어링(pairing)에 누가 의의를 제기하더라도 떳떳할 수 있다. 공감을 받는다면 더 없는 기쁨이고.
또 다른 영국 출신이 아티스트 스팅은 음색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수많은 명곡 중 ‘Englishman in New York’은 여전히 나의 최애곡이다. 흥겨운 재지(Jazzy) 선율과 젊은 시절의 스팅의 음색을 듣다 보면 맥주보다 고급 재즈바의 와인이나 위스키가 떠오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Englishman in New York은 뉴욕에 살고 있는 영국인의 고고함을 노래한다. 예의와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인이 근본 없고 키치(Kitch)한 미국 자본주의 문화를 비꼬는 듯한 가사에서 멋스러움마저 폭발한다. 아무리 봐도 맥주보다 와인이 어울린다.
하지만 이 노래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이 곡은 고고한 영국인이 아닌, 오히려 영국의 보수성에 대항해 당당하게 자존감을 지킨 한 사람을 위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쿠엔틴 크리스프, 70년대 영국에서 유명한 배우였던 그는 게이임을 밝히고 성소수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러나 결국 보수적인 영국 사회의 동성애에 대한 혐오와 지탄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스팅이 미국에서 쿠엔틴 크리스프를 만나 헌정한 곡이 바로 Englishman in New York이다. 사회의 무시와 조소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말 것을, 누가 뭐라든 자신을 잃지 말 것을 쿠엔틴 크리스프를 통해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Englishman in New York은 자연스럽게 아메리칸 IPA와 페어링 된다. IPA는 인디아 페일에일(India Pale Ale)의 약자로 19세기 영국 식민시대 인도를 배경으로 탄생한 맥주다. 당시 인도에 있던 영국인들을 위해 런던에서 다양한 맥주가 배를 타고 건너갔다. 이 맥주들은 길고 혹독한 항해를 견뎌야 했다. 이를 위해 많은 양의 홉과 높은 알코올 도수가 필요했다. 홉의 항균성분과 높은 알코올은 외부 세균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맥주 중 옥토버 비어라는 맥주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멋진 홉향과 아름다운 밝은 색을 띠었는데 이를 인디아 페일에일(India Pale Ale)로 부르게 된다.
19세기 초부터 중반까지 인기를 누렸던 IPA는 새롭게 부상한 라거로 인해 역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1980년대 미국 크래프트 브루어들은 사라진 IPA를 찾아낸 후 이를 재해석해 세상으로 끄집어낸다. 다량의 홉과 높은 알코올을 가진 IPA의 성격은 유지하되, 영국 홉이 아닌 미국 홉을 넣어 자몽, 오렌지, 꽃향이 화려한 미국식 IPA를 탄생시킨 것이다. 영국에서 탄생했지만 미국에서 부활된 아메리칸 IPA, 특히 뉴욕 브루클린 East IPA는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결을 같이 한다.
깔끔한 자몽과 솔향이 절제된 모습으로 느껴지고 뚜렷한 쓴맛과 뭉근한 단맛이 적절하게 균형감을 이루고 있는 뉴욕 출신 IPA는 뮤비 속 흑백의 뉴욕에서 스카프를 두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쿠엔틴 크리스프를 떠오르게 한다. 미국에서 더 자유롭고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그처럼 IPA도 미국에서 자유롭고 영감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스팅의 Englishman in New York과 함께 아메리칸 IPA가 손에 들려있는 건 이 둘이 나에게 자유와 용기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맥주가 나에게 알려 준 진리 중 하나는 지식은 발견이라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발견하는 만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는 나에게 음악과 역사 그리고 맥주의 삼위일체를 경험하게 한 곡이다. 원래 이 곡은 프랑스 7월 혁명 후 샤를 10세를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웅장한 첼로로 시작하는 도입부 그리고 이어지는 현악, 북, 종소리가 만들어내는 멋진 조화는 중세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한때 세상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쫓겨난 왕이 소회 하는 권력의 무상함은 쓸쓸하고 허무하다. 보컬 크리스 마틴의 중저음 음색은 과거의 영화를 노래하는 몰락한 왕의 목소리 그 자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노래를 들으면 다른 시대적 상황과 인물이 연상된다. 한때 브루고뉴 왕국을 꿈꿨던 담대공 샤를과 그의 딸인 마리. 15세기 후반 브루고뉴의 전성기를 이끈 샤를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왕국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음흉한 프랑스의 왕 루이 11세가 이를 가만두지 않았고 담대공 샤를은 1477년 낭시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들에게 사망하고 만다. 그의 시신은 사지가 잘린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어 후에 노트르담 성당에 안치된다.
그에게는 마리라는 딸이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마리는 아버지가 남긴 땅과 유산을 받은 후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위협을 받는다. 그녀의 재산을 탐낸 루이 11세는 마리를 감금하고 7살밖에 안된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맺고자 했으나 지혜로운 마리는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곳을 탈출해 그와 곧바로 결혼한다. 하지만 아름답고 강인한 이 여인의 끝은 불운했다. 막시밀리언과 행복한 삶을 살던 그녀는 2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말에서 떨어져 생을 마감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아버지 옆에 함께 눕게 된다.
이런 브루고뉴의 마지막 공작, 마리의 모습이 담긴 맥주가 있다. 두체스 드 브루고뉴 브루고뉴의 공작이라는 이름을 가진 벨기에 맥주다. 이름뿐만 아니라 이 맥주의 라벨은 젊고 아리따운 마리를 담고 있다. 막시밀리언이 슬픔을 잊기 위해 남긴 그녀의 초상화를 라벨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두체스 드 브루고뉴는 플랜더스 레드 에일이라는 벨기에 맥주 스타일이다. 짙은 갈색과 농밀한 체리, 자두 뉘앙스, 비단과 같은 산미를 가지고 있는 이 맥주는 마치 신선한 검은색 과일을 마시는 것 같다. 기품 있는 바디감과 진하지만 향긋한 아로마 그리고 섬세한 밸런스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품격을 잃지 않은 마리의 모습과 콜드 플레이의 Viva la vida의 선율을 오버랩시킨다.
‘Viva la vida’, 인생이여 만세라는 노래 제목도 평생 장애로 고통받았던 멕시코 작가인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샤를 10세든, 대담공 샤를이든, 더 리치 마리든, 프리다 칼로든 그리고 나의 인생이든 결국 허망하겠지만, 그래도 만세다. 두체스 드 브루고뉴 한 잔으로 모두의 인생을 축복하는 걸로.
음악과 맥주가 서로 연결되는 공감각적 경험은 특별하다. 소리와 향미는 결국 나의 스토리 안에서 만난다. 음악이든 맥주든 한 꺼풀만 벗기면 그 속에 내 느낌과 감정이 녹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한 삶을 버티게 하는 연대의 힘, 불합리한 타인의 시선에도 자존감을 갖고 살아내는 힘, 비록 허망할 지라도 인생의 한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힘, 이런 긍정적인 에너지를 음악과 맥주의 공감각에서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행운이 어디 있을까?
오늘도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맥주의 신이 오시길 기다린다. 길거리에서, 지하철에서 그리고 서재에서 내가 듣는 음악이 그분의 맘에 드신다면 어김없이 맥주 한 잔을 점지해주실 것이다. 아직까지 맥주의 신께서는 그 정도의 아량은 있으신 거 같다. 다행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