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1월 1일 아침, 영국 특허청 사무실로 한 남자가 황급히 들어왔다. 그가 내민 서류 속에는 ‘빨강색 삼각형’과 바스(Bass)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는 이 단순한 도형을 등록하기 위해 특허청 사무실 앞에서 새해 첫 날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바스와 빨강색 삼각형, 이 둘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 숨어있는 걸까?
1875년 영국에서 상표 등록법(Trademark Registration Act 1875)이 통과된 후, 이 ‘빨강색 삼각형’은 특허청에 첫 번째로 등록된 디자인 상표(Trademark)가 된다. 이 상표의 주인은 바스(Bass), 페일에일(pale ale)로 세계를 평정한 영국의 맥주 회사였다. 바스는 맥주 라벨에 복잡한 설명 없이 ‘빨강색 삼각형‘을 넣어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냈고 다양한 광고에 사용했다. 19세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 빨강색 삼각형은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바(Bar at Forlie-Bergere)‘의 여인 옆에서, 침몰한 타이타닉의 저장고 안에서, 심지어 신미양요 당시 조선의 하급관리 김진성씨 품 안에서도 볼 수 있다.
바스가 이 단순한 도형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후, 맥주 산업에서 로고는 중요한 마케팅 전략이 되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맥주 회사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색과 로고를 라벨에 넣고 본격적인 마케팅을 전개했다. 하이네켄은 1884년부터 초록색과 별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사용했고 뮌헨 라거의 선구자인 슈파텐도 1884년 빨강색과 삽을 모티브로 로고를 만들었다.
이런 전통적인 맥주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로고를 통해 소비자에게 브랜드를 인지시키려 노력했다. 트렌드에 따라 디자인은 조금씩 수정됐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에 막 발을 딛는 맥주들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이미 선반에 자리 잡은 터주 대감들에 비해 인지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선명함과 과감함을 선택했다. 때로는 충격과 공포 전략을 불사하기도 하는데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라 불리는 개척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1980년 미국에서 탄생된 크래프트 맥주는 1960~70년대 진행된 반문화(anti-culture)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존 질서와 전통을 거부하며 진보적인 목소리를 낸 미국 젊은 엘리트들은 80년대 들어 전통적인 산업과 다른 길을 선택했는데 히피(Hippie) 문화가 강했던 샌프란시스코는 이들 선구자(Entrepreneur)에게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당시 IT에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맥주에는 켄 그로스맨(Ken Grossman)이 있었다.
홈브루어였던 그에게 버드와이져나 밀러같은 라거(lager)는 보수적이고 재미없는 맥주였다. 새로운 맥주를 꿈꿨던 켄 그로스맨은 소규모 브루어리 운영을 배우기 위해 들어갔던 앵커(Anchor)에서 영감을 얻은 후, 버려진 콜라 공장 부품으로 장비를 만드는 고생 끝에 1980년 시에라 네바다(Sierra Nevada)를 설립했다.
그의 첫 작품은 ‘시에라 네바다 페일에일’이었다. 아메리칸 페일에일(American Pale ale)의 효시인 이 맥주는 영국 페일에일을 바탕으로 미국산 캐스케이드 홉(Cascade hop)을 잔뜩 넣어 높은 쓴맛과 자몽과 같은 풍성한 시트러스 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산 자생 홉은 유럽산 홉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트러스, 트로피컬, 베리와 같은 향을 가지고 있었고 시에라 네바다는 이런 미국 홉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시장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대중 라거나 오랫동안 선반을 차지하던 유럽 전통 맥주와는 다른 신박한 스타일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시에라 네바다 페일에일은 품질도 일정하지 않고 세련되지도 않았지만 뚜렷한 개성과 함께 도전과 개척이라는 미국적 가치를 품고 있었다. 라거에 싫증을 느낀 몇몇 소비자들은 켄 그로스맨의 맥주를 발견한 후, 이런 가치를 공유하고 소비하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 시에라 네바다에 영향을 받은 맥주들이 등장하고 성장하자 이런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라 불렀다. ‘크래프트’라는 의미는 공장식 대량 생산(Manufactured)과 구분되는 의미로 출발했지만 점차 범위가 확장되며 다양성(diversity), 지역성(locality), 진정성(authenticity) 그리고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같은 가치를 포괄하게 된다.
한 종류가 아닌 다품종 소량 생산을 하는 크래프트 맥주는 디자인적으로도 전통적인 맥주와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 크래프트 맥주 라벨에는 회사의 로고보다 개별 맥주를 직관적으로 인지시킬 수 있는 디자인과 그래픽이 사용된다. 그 범위는 크래프트 맥주가 다양한 가치와 스토리를 담고 있는 만큼 지역의 문화, 만든 사람의 취미, 사회적 메시지, 상상의 이야기 등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미국 네바다 주에 있는 리비전(Revision)은 개별 맥주가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라벨에 담고 있으며 샌디에고에 위치한 밸라스트 포인트(Ballast point)는 사장의 취미인 낚시와 관련된 물고기 이미지를 라벨에 그리고 있다. 경찰에 의해 무고한 죽음을 당한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시작된 ‘블랙 이스 뷰티풀’(Black is beautiful) 프로젝트 같은 케이스도 있다. 전 세계 수백 개의 브루어리가 참여한 이 프로젝트에는 ‘Black is beautiful’을 넣은 동일한 라벨을 가진 스타우트를 만들어 인종 차별 반대와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이처럼 맥주와 디자인은 함께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전통과 자유, 보존과 파괴를 통해 진보하는 디자인과 같이 맥주도 같은 궤를 그리고 있다. 최근 맥주와 디자인은 로고나 라벨 그래픽 같은 단순한 관계를 넘어 ‘초연결’되고 있다. 맥주 산업과 연관된 모든 아트워크(artwork)를 비롯해 환경을 위한 지속가능한 브루어리 설계 그리고 효율을 높인 포장용기 개발 등 본질적인 가치를 공유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 밀월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지 않을까? 그렇기에 반드시 맥주와 디자인은 인간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노력하고 협력해야 한다. 이 둘의 ‘초연결’이 만들어내는 가치도 이 속에서 의미가 있다. 누가 또 아는가, 맥주와 디자인의 초연결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이 글은 2022년 7월호 월간 디자인에 기고한 글입니다.
링크 : http://mdesign.designhouse.co.kr/article/article_view/108/83426?per_page=1&sch_t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