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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Oct 01. 2021

수제 맥주와 4캔 만원의 이상한 만남

그들은 과연 수제 맥주일까?

수제 맥주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쉽게 마실 수 없던 수제 맥주가 집 앞 편의점 냉장고를 채우고 있다. 그것도 4캔 만원이라는 가격에. 얼굴과 옷차림도 사뭇 어색하다. 작은 양조장에서 태어나 후줄근한 매력이 있던 녀석이 매끈한 옷에 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출세를 위해 순애보를 버린 매정한 남자 같기도 하다.


‘수제’라는 요상한 이름이 붙은 이 카테고리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다. 1965년 앵커 브루어리를 인수한 프리츠 메이텍은 사라진 영국 맥주 스타일에 미국 자생종 홉을 넣는 시도를 했다. 미국 홉을 넣은 이 맥주는 감귤, 베리, 열대 과일 같은 향이 풍부해 대기업 라거와 달랐다. 하지만 이 새로운 맥주 스타일은 당시에는 큰 반향을 부르지 못했다. 작은 지역 양조장의 특이한 맛을 내는 맥주일 뿐이었다.  


양조장은 적자였지만 부유했던 프리츠 메이텍은 앵커를 유지했다. 그리고 15년 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한 남자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캔 그로스맨이었다. 1979년 앵커를 방문한 그는 프리츠 메이텍의 맥주에 충격을 받는다. 그 뒤, 1년 정도 앵커에서 경험을 쌓으며 소규모 맥주 사업에 대한 통찰력을 얻은 다음, 이듬해 샌프란시스코 치코에 시에라 네바다라는 작은 양조장을 설립했다.


그는 프리츠 메이텍과 같이 영국식 에일에 미국 홉인 케스케이드를 넣어 풍성한 자몽과 솔향이 매력적인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을 선보였다. 신화와 오해, 논쟁의 주인공인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의 시작이었다.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 @윤한샘

캔 그로스맨은 대기업 맥주와의 차별점을 부각시키며 새로운 맥주 시대를 주창했지만 대중들에게 이 맥주는 생소했고 가격도 비쌌다. 매출 상승과 시장 확대는 요원한 일이었다. 사업의 지속도 불분명했다. 당장 내일 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시에라 네바다는 기어코 생존에 성공한다. 무엇이 이들을 버티게 했던 것일까?


이때 주목해야 할 공간이 바로 샌프란시스코다. 보수적인 동부와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60~70년대 히피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유롭고 진보적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꿈꾸는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 같은 세대가 모여들었고 80년대 신보수주의에 저항하는 문화들이 서브 컬처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은 미국 신흥 계층의 등장을 도왔다. 금융으로 부를 축적한 신보수주의 부르주아가 미 동부에서 형성됐던 반면 서부에는 지속 가능한 삶을 추구하고 서브 컬처를 즐기는 진보적 부르주아인 보보스(Bohemian Bourgeois)가 탄생했다. 이들은 버드와이져와 밀러 같은 대기업 맥주 대신 지역성과 다양성, 개방성을 표방하는 작은 양조장 맥주를 선호했다.


대중 맥주에 비해 가격도 높았고 한정적인 채널을 통해서만 구입할 수 있었지만 자신들의 철학과 맞는 맥주를 위해 기꺼이 불편을 감내했다. 대기업 맥주의 대척점에 있었던 시에라 네바다 페일 에일은 이들에게 혁명과 같았다. 메인 스트림에서 비껴있던 이 작은 맥주는 아이러니하게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점차 이런 맥주를 크래프트(craft) 맥주라고 불렀다.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대량 생산(manufactured)되는 맥주와 가치 차별을 하기 위한 개념이었다. 달리 말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의 가치를 공유하기 시작한 맥주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대기업 맥주에 비해 품질도 일정치 않고 다소 어설픈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작은 양조장 맥주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성과 진보성에 공감하는 소비자들은 열광했다. 맥주가 서브 컬처 상품이 된 것이다.


소규모 맥주 양조장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은 시에라 네바다의 성공을 보며 자신감과 인사이트를 얻었다. 8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 소규모 브루어리 수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생산 규모도 스타일도 각자 달랐지만 대기업 맥주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시도했다.  


대기업 맥주를 보수주의 문화로 정의하고 전선을 그은 후, 반문화, 서브 컬처 그리고 진보적인 가치를 자신들의 맥주에 담아냈다. 그리고 이런 철학을 이해하고 함께 하는 미국 소비자를 만나 생존했다. 즉, 크래프트 맥주는 미국의 서브 컬처를 내재하고 표현하며 성장한 맥주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크래프트(craft)는 사회 문화에 따라 유연하게 해석될 수 있다. 미국 크래프트 맥주가 미국 문화에서 미국적으로 성장했다면 한국 크래프트는 한국의 역사 문화 속에서 탄생하고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크래프트란 국가와 사회적 배경에 따라 시대적 가치를 반영하는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다양하고 유연한 문화를 갖고 있는 크래프트 맥주에도 중심을 관통하는 보편적 가치들이 존재한다. 이 가치들이 크래프트 맥주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느슨한 철학적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


우선 지역성(Locality)이다. 지역성은 지역 특산물 같은 재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역 문화와 역사, 공동체 스토리 같은 무형의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크래프트 맥주는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에서 정체성을 찾고 맥주 속에 표현하려고 한다. 지역이 반영된 재료, 맥주 이름, 라벨 디자인, 양조자의 출신 등은 크래프트 맥주에서 중요시되는 요소다.


둘째는 다양성(Diversity)이다. 이는 스타일적 다양성뿐만 아니라 가치적 다양성을 의미한다. 인종차별, 여성 문제와 같은 인권 이슈나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 문제를 맥주에 담아낼 수도 있다. 다른 크래프트 양조장과의 콜라보레이션이나 음악, 미술 등과 같은 이종 간 콜라보레이션도 크래프트 맥주 다양성의 좋은 예이다.


 번째로 진정성(Authenticity)이다. 맥주가 태어난 곳의 문화적 토양을 머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강원도에 있는 브루어리가 광화문이나 제주도 돌하르방 맥주를 만든다면 소비자는 분명 이질감과 어색함을 느낄 것이다. 진정성은 크래프트 맥주와 대기업 맥주뿐만 아니라 크래프트 맥주 간의 정체성을 구분해주는 가치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크래프트 브루어리는 과도한 수익을 통한 급격한 성장 대신 지역 경제와의 상생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추구한다. 미국 소규모 브루어리 협회인 BA는 규모와 지분에 한계를 두어 자본에 의해 자신들의 철학이 오염될 것을 경계하고 있다. 자본 수익만을 도모할 경우, 맥주가 담아낼 수 있는 철학과 가치가 흔들릴 뿐만 아니라 사회에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역성, 다양성, 진정성 그리고 지속가능성은 크래프트 맥주의 내재 가치다. 크래프트 맥주 양조자들이 자신들의 맥주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도 대기업 맥주와 달리 지역공동체와 함께 숨 쉬며 선한 영향력을 주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떠할까? 한국 수제 맥주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탄생과 결이 다르다. 한국 소규모 양조장은 2002년 주세법 개정과 함께 형성되었다. 당시는 맥주 스타일이나 양조장의 철학보다 규모에 더 방점이 찍혀있어 ‘소규모 양조장’ 또는 ‘마이크로 브루어리’로 불렸다.


안타깝게도 당시 한국의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은 뭔가 해볼 여지도 없이 금세 사라졌다. 대부분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은 생산단가에 세금을 붙이는 종가세와 외부 유통 금지법 같은 제도 때문에 생존조차 힘겨워했다. 이런 환경에서 소비자와 공유할 가치를 고민한다는 건 사치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간신히 살아남은 소규모 맥주 양조장들은 20여 년 동안 종량세를 요구했다. 생산단가와 세금이 분리되면 다양하고 좋은 재료를 더 많이 사용할 수 있어 독점적이고 고리타분한 한국 맥주 시장에 우수한 품질의 맥주를 선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량세는 작은 맥주 양조장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날개로 여겨졌다.


크래프트 맥주의 어설픈 번역이지만 수제 맥주라는 ‘한국식’ 타이틀도 생겼다. 2010년 이후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영향을 받아 미국 홉을 사용한 다양한 스타일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수제’는 대기업 맥주에 지루해하는 소비자들에게 마치 ‘맥주를 손으로 만들 것 같은’ 신비감을 주는 괜찮은 단어였다.


2020년, 소규모 맥주 업체들이 그토록 바라던 종량세가 개정된다. 하지만 현재 수제 맥주에 붙는 타이틀은 기대와 달리 많이 어색하다. ‘손으로 만든’ ‘다품종 소량의’ ‘정성 들인’ ‘신토불이’ 같은 신비감을 갖던 ‘수제’는 대중 상표와의 무분별한 콜라보레이션, 대량 생산, 획일적인 스타일, 4캔 만원으로 희석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수제 맥주 키워드는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비판해왔던 대중 맥주의 가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대중 맥주 회사인 오비마저도 자회사를 만들어 수제 맥주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이는 일본 맥주 퇴출로 생긴 공백을 신규 상품으로 메우려는 편의점 채널과 단기간에 빠른 수익을 얻고자 하는 일부 수제 맥주 업체들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다. 레트로 대중 브랜드를 입은 수제 맥주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후, 편의점 채널에 대량 공급이 가능한 수제 맥주 회사들은 비슷한 컨셉의 맥주를 쏟아내고 있다. 대중 유통 채널인 편의점은 ‘4캔 만원 수제 맥주’라는 포지셔닝을 요구했고 단기간 수익이 필요한 수제 맥주 회사들은 이에 부응한 것이다.


물론 ‘4캔 만원 맥주’나 ‘대기업 맥주'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맥주에 선악은 없다. 대기업 맥주는 대중 맥주로서 자신들만의 영역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동안 지켜왔던 수제 맥주의 포지션이 소비자들에게 굴절된 모습으로 전달되고 인식된다는 점이다. 고급 와인이 특별한 가치로 프리미엄을 유지하듯이, 수제 맥주는 4캔 만원 대중 맥주와 구분되는 가치로 성장해왔다.


수제 맥주의 포지셔닝이 단기간에 변하거나 하락한다면 대다수 작은 양조장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지금껏 수제 맥주가 품고 있던 작은 규모, 개성, 독립, 프리미엄과 같은 가치가 ‘4캔 만원의 재미있는 맥주’라는 가치로 희석되면 기존의 대다수 수제 맥주 양조장들은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에서 ‘구분’은 ‘생존’과 직결된다. 대중 시장에서 변질된 수제 맥주 개념이 오히려 소규모 맥주 씬(scene)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하는 칼이 될 수 있다.

정동 독립맥주공장 '정동 다반사' @윤한샘

크래프트 맥주는 모든 소비자들을 위한 맥주가 아니다. 자신들만의 가치를 응원하고 공유하며 소비해줄 지지자를 위한 맥주가 바로 크래프트 맥주다. 틈새시장에서 한국 크래프트 맥주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치를 만들고 구분해야 한다.


지금 한국의 편의점 수제 맥주는 ‘크래프트’의 보편적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가? 대기업 자회사가 생산한 맥주에 ‘크래프트’를 붙일 수 있는가? 대기업이 주도하는 OEM 캔 생산이 크래프트 정신을 반영하는가? 주식이 시장에 공개된 회사가 크래프티(crafty)한 맥주에 목숨을 걸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이 명징하다면 '수제'라는 단어를 과감히 버리든지, 아니면 퇴색한 ‘수제 맥주’의 가치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든지, 결정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저항’은 크래프트 맥주의 본질과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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