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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틈 Oct 18. 2024

거인과의 입맞춤

파타고니아가 가져온 아침.

운동회 날 아침엔 항상 배탈이 난다. 중요한 승급심사나 겨루기가 있는 날도 꼭 쥐가 난다.  

중요한 날은 꼭 마이너스 20퍼센트 컨디션이 안 좋다. 단 한 번도 어긋난 적 없는 나의 불운, 불행. 


‘그걸 극복하는 게 실력이야... 할 수 있어’라는 사범님의 응원이나... 실력 좋은데 늘 상황이 운이 안 좋았어...라고 믿던 내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냥 그게 실력이지 뭐 내 실력이 여기까지 인 걸로...라고 단념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할 때

순위는 이미 출발선에서 정해진다. 

1등을 하는 친구의 눈빛과 자신감은

벌써 결승선을 지나고 있고

거기서 밀린 친구들은 스타트가 빠르고 앞으로 치고 나가도

결국엔 1등을 놓치고 말지...


태권도를 그만둔다고 할 때도 엄마 아빠는... 그냥 좋게 보면 인정이고, 나쁘게 말하면... 포기 같은 느낌으로...‘뭐... 네가 알아서 하렴... 태권도는 취미로라도 하면 되지’라고 나를 또 툭 밀어놨지 믿어주는 건지... 그냥 포기하는 건지 애매한 느낌. 


그 뒤로 뭘 하려고 할 때마다 일종의  속도제한에 걸린 것처럼

한도초과에 막힌 것처럼. 아무리 100을 다 쏟아부어도 결코 80을 넘지 못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된다. 

모든 연습 겨루기를 이겨도, 예선 전승으로 올라가도 

결국 동메달이나 4위에서 끝나는... 나의 한계, 풀 액셀을 밟아도 걸리는 속도제한, 내 의지와 무관한...


그런데 오랫동안 나를 둘러싼 그 새장이 시원하게 부서져버린 느낌.

그 오르막길을 전력질주 해서 선우에게 달려갔을 때 속도제한도 한도초과도 사라져 버린 아니 뚫고 올라가 버린... 뜨거운 경험을 했다. 못할 것 같아... 라든가, 그래 되는데 까지만 해보지 뭐...라는 생각이 아니라 무조건 된다. 구할 수 있다. 해야 한다로 전력질주 했던 경험. 


그건 오로지 선우 때문이었다.

결승선에 서 있는 선우를 향해 나도 모르게 쌓여가던 내 마음 때문이었다.


그녀를 지켜주며 나란히 걷는 동안엔 새로운 피를 온몸에 넣어준 느낌 다치고 부서져도 다시 재생될 것 같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배가 아파도 다리에 쥐가 나도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할 것 같은 느낌.



위협의 정체


“엄마...? “


”아이고! 선우야!!! 어디 있었어...? 너 괜찮니..? 다 엄마 탓이야... 엄마가 잘 못했다... “


”무슨...? “


”엄마랑 일하는 아저씨들이 너 보호하려고 편의점에 갔는데... 안 왔다고... 엄마는 너 잡혀간 줄 알고... 흑흑... “


“학생... 괜찮아요?... 어머니가 많이 놀라셨네. 학생 위협하던 오토바이는 우리가 수배했어요.”


“3745요?”


“이분은 누구...”


“아... 제 사설 경호원입니다.”


“선우야... 저분이 니 경호원이라고...?”


“응 엄마... 나중에 설명할게 그런데 날 보호하러 간 아저씨들? 그건 또 뭐야? “


“너 어릴 때부터 봤던 삼촌들인데... 자세히 인사한 적은 없어서 얼굴은 모를 거야...

 여하튼 최근에 악성 대출 하나 때문에 좀 매섭게 몰아붙였더니... 그 돈 빌려간 놈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러곤 문자로 너 편의점 근무하는 사진을 보내고... 난 미친놈이겠거니 그랬지... 너 아팠던 날...

 번뜩...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일단 삼촌들한테 좀 가보고 그 채무자도 찾아가 보라고... 했어. 

 아무튼 경찰에 와서 다 그놈 저지른 짓, 협박 다 신고했어... 감옥 보내야 해!! “


“ 엄마 선우일 수. 그 이름 좀 바꿔 정말... 근데 편의점이랑은 어떻게 알고... “


“선우 씨. 일단 경찰에서 그 오토바이 수배했으니 금방 잡힐 거예요. 당분간은 편의점 좀 쉬는 게...”


“그 일 마저 없으면... 그냥 하루 종일 방에 갇혀 있는 건데...”


 “당분간만요. 일단은 제가 가능한 시간에선 선우 씨 동선 위주로 계속 살펴보고 경호할게요. 

 제가 그놈이랑 벌써 두세 번 마주쳤고...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도 막을 수 있는 힘도 있어요... “


그래 이제 마이너스 20% 같은, 바보 같은 악조건은 없다. 


 “그런데... 경호원 양반. 우리 선우...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 네 어머니. 그렇게 오래되진 않았고요. 때 마침 경호일을 하다 보니...

  주변에 위험한 상황들이 보이고 해서... 조금 도움을 드렸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돈은 걱정 마세요! “


 “내가 돈걱정... 했나요? 아무튼... 다시 저랑 이야기해요.”


경찰이 몇 가지 주의사항과 사설경호에서 과잉대응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동안에도 

선우 씨 어머니는 공항검색대 금속탐지기가 된 것처럼 나를 아래위로 계속 훑어보고 있다. 

식은땀이 관자놀이에서 턱으로 흘러내리는데 닦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 된다. 그 땀의 이유가 어머니일까?


 “네. 어머니 알겠습니다. ”


 “엄마... 찬유 씨. 하루 종일 뛰어다녔어... 나 때문에... 나중에 이야기해...”


“경호원이면 뛰어다니는 거지 뭐. 시간도 이제 늦었는데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야지”


선우 씨 어머니의 차로 집까지 가는 오르막길에 어머니는 가이드처럼 물어보지도 않은 동네 곳곳의 이야기를

자랑과 덧붙여 들려준다. 모든 어머니들이 특징. 


“저기... 모퉁이 저것도 우리 집, 그래 저 아래 작은 빌라.. 저것도...

뭐랄까... 아무것도 없이 저 어린 선우랑이 동네 작은 전세방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오느라... “


“엄마... 쫌!”


“아이고. 주책이네... 암튼 그렇게 살면서도 절대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는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


“어머니 잘못 아닙니다. 하시는 일이 채권추심이다 보면  좀 그렇죠... 그렇다고 가족을 스토킹 하거나 미행하는 건 전혀 다른 진짜 범죄고요... 꼭 위험한 일 안 생기게 막겠습니다. "


“그래요. 이렇게 도와주고 그러니... 내가 고맙네... 그런데 주로 누굴 경호해요? “


“네. 연예인들 경호하고.. 있습니다.”


“오~! 그럼 찬또 아니 이찬원도 경호했겠네? 장윤정은?”


“아... 네... 전 주로 주로 아이돌만...”


“아이들? 아이들을 왜 경호해?”


“아뇨... 아이돌...”


“미안한데.. 엄마, 찬유 씨.. 둘 다 좀 조용해줄래요?”


언덕 위에 말끔한 2층집. 다른 집들이 겨우 겨우 서로의 어깨를 피해서

위태롭게 서 있는 것과 달리. 축대가 집의 수평을 받쳐주고 대문에서 마당과 현관으로 나 있는 돌계단 옆으로

담까지 작은 나무들이 둘러쳐져 있다.  언뜻 집으로 보였던 부분도 사실 1층 축대였고 이 동네와는 어울리지 않는 근사한 집이었다. 마치 선우처럼.


“집이.. 예쁘네요... 크고...”


“3년 전에 새로 지었어요... 원래는 2층까지 셋집이었고.  3층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내가 낮에 집 밖 출입을 안 하게 된 이후로  엄마가... 다시 좀... 크게 지었어요. “


엄마는 멀리서 '이제 벌 만큼 벌었으니 이 정도는 차려놓고 살아야지! 선우 걱정도 되고...'라는 말을 꼭 들렸으면 하는 목소리 크기로 전한다. 그리곤 '경호원은 어디 살아?' 하고 들리지도 않으면서 또 묻는다. 엄마는 그렇다. 자기 이야기만 전해지면 된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고. 그 정점은 남편이자 나의 아빠... 때문이겠지. 그래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할 말부터 쏟아낸다. 그리곤 자기가 그렇게 속상해했던 것처럼 상대의 이야긴 안 듣는다. 


 “네! 여기 산새마을 들어오기 전 빌라 단지에 있어요. 510동.”


“...”


 “원래 그래요. 물어놓고 딴일 해요. 미안... 경호일은... 재밌어요?"


 “뭐... 저도 사실 아르바이트 수준이에요. 태권도 전공이어서 잘 뽑히는데... 다른 일보다 맘이 편하더라고요. 누군가를 지킬 힘이 있다고 생각되니... 배도 안 아프고."


 “배요?”


 “아. 그게... 그냥 뭐랄까 긴장이 잘 안 된다. 이런....”


 마치 처음 여자친구 집에 초대받은 것처럼 어색한 상황이 되었다.

 선우는 이전까지 못 보던 표정으로 무표정 속에 아주 희미하게 재미와 웃음이 스며들어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면 입술을 깨물어 가린다. 


“과민성대장 이신가 보네...”


“네! 네? 아... 아닙니다... 선우 씨 방은 어디예요? 

 아... 그게 다른 뜻은 아니고 알아두면 경호에 도움이 될까 해서요...”


“네... 2층이에요... 가보실래요? 2층에선 이 동네가 다 보여요.”


1층만큼 크고 넓은데 뭔가 어둡고 가려진 느낌... 또 다른 전실을 열고 들어서니 넓은 공간이 나온다.


“2층 거실도 넓네요... 방은 어딨 어요?"


"이게... 제 방이에요... 좀 많이 넓죠? 저기 창문 옆에 책장하고 파티션 뒤가 침실인 셈이고..."


창문 옆의 새시는 보안이 튼튼해 보인다. 테라스로 나가자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그리고 서울의 야경 산새마을 전체와 우리 단지도 한눈에 보인다. 분주하게 반짝이는 마을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멋지네요.. 경치가...”


“저는 원래는 졸업하고 일도 하고 멀리 여행도 갈 계획이었는데... 3년 전부터 이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어요. 

 낮에 깨거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고... “


“괜찮아요...”


 “네?...”


 “아...! 그 그럴 수도 있단 뜻입니다. 뭐 저도 일하다 보면 밤낮 바뀔 때 많아요...”


 “아... 네.. 그런데 태권도는... 전공이니까... 계속해야겠네요?”


“네. 졸업은 해야죠. 복학하고선 아직 한 학기 남았는데... 운동을 전공으로 하는 과에선 이렇게 길게 휴학하는 경우는 다쳤을 때 말고는 잘 없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튼 졸업하고 나면 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요. 경호일도 재밌긴 한데.... 힘들거나 위험할 때도 많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가서 태권도 가르치시면 되겠네요...”


“네? 부에노스 아이레스.. 요?”


“네 거긴 여기랑 지구 정 반대 있는 곳인데... 맑은 공기, 선한 공기라는 뜻의 도시래요. 탱고를 좋아하는 도시라는데.... 태권도랑 왠지 어울릴 것도 같고... “


“아... 너무 먼... 곳인데.... 하하...”


“저는 꼭 가봐야지 했는데... 지금은 서울도, 이 산새마을도 못 벗어나고 있네요.”


“꼭 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산새마을도 서울도 훌쩍 벗어날 수 있어요.  선우 씨 불안하게 하는 놈들은 꼭 잡힐 거니까... 걱정 말아요.”


“잘 모르겠는데... 그렇게 말하니까. 차유씩 가 말한 데로 꼭 그렇게 될 것 같네요. "


  어머니는 번갈아가며 나와 선우 씨의 얼굴을 신기한 듯 보시며 차를 내려놓는다. 

반가움과 신기함이 함께 젖은 얼굴엔 딸을 향한 미안함과 서운함과 걱정과 사랑이 다 한꺼번에 녹아있다. 어떤 표정인지 알기 힘들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표정은... 웃는 표정이거나, 슬픈 표정이 아니라. 저 모든 감정이 모두 다 한 얼굴에 그려진 조금은... 이상한 표정이 맞나... 그런 생각이 든다. 


<파타고니아, 거인과 키스하다.>


기후도. 교통도. 접근성도 나쁜 거인의 땅 파타고니아

거기엔 아직도 거인 파타곤이 살고 있을까 순수한 자연만큼 순수해서 그 거대한 힘과 몸을 가지고도

절벽에서 뛰어내리면 날개가 생긴다는 인간들의 말을 믿고는 목숨을 뺏겨버린 피부가 하얀 거인들.

그 와중에 살아남는 거인들은 이미 난폭한 인간의 눈을 피해 어딘가에 바위로, 나무로, 동물로 변해서 숨어있을지도 몰라. 너무도 변해서 서로가 서로를 못 알아보고 사랑도 못하고 아이도 낳지 않고 그렇게 멸종되어 가면서도 인간을 원망하지 않는데... 자신과 닮은, 자신을 보기만 하면 죽이려는 작고 여린 인간이 안쓰러워서... 슬프기만 한 슬픈 거인들. 


파타고니아를 여행하는 인간이 위험에 빠지면 바위나 곰 나무로 변한 파타곤들이 몰래 구해주고는 사라진데.

사랑해서. 사랑만 해서 슬프고 불쌍한 거인. 파타고니아는 슬픈 땅.


“멋진 사진이네요...”


“슬픈 사진이기도 하고요...”


“음... 사진은 잘... 모르지만... 저 산봉우리의 하얀 눈이 좀 그런 것도 같고... “


”하얀 눈이... 슬퍼요? “


”네. 물은 원래 투명한데... 얼면 하얗게 변하잖아요. 뭔가 아무겠고 그려지지 않은. 써지지 않은 흰 종이처럼... “


예찬이 같은 섬세함이 있네... 특이한 사람이다.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흰... 종이가 왜 슬퍼요? “


”오래... 오래 기다려서... 끝내... 아무것도... 채워 넣지 못한... 그래서 괴롭고... 불안하고 슬픈... 뭐랄까...

 끝내 하얗게 빈 종이로 내버린 중간고사 시험지...? “


”풉!.. 카하하... 아! 미안해요!! 하.. 합... 하하하하! “


웃음을 참으려고 해도 그럴수록 더 웃음이 튀어나온다. 이 사람 정말 전력질주 하듯 내게 답하고 내 마음을 읽으려고 한다... 예찬이랑 비슷하지만 꺼벙함이 아주 아주 풍부하다... 그래도 순수해. 직진남 같지만... 예민함이 있고. 좀... 무식해 보이지만. 굳은 중심이 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왜 이 남자를 평가하고 있지...?


“죽은... 친구가 보내줬어요.”


“아... 미안해요... 그런 사진인 줄 모르고...”


“여길 꼭 가보래요. 제가 꼭 가봐야 한다고...”


“왜... 여길 파타고니아를 가보라고 할까요?”


“끝이니까... 무언가 시작하려면 다시 끝이어야 하잖아요. 겨울이 와야 봄이 오듯이..."


“끝... 파타고니아... 갑자기 저도 가보고 싶네요."


아래층이 소란스럽다.  엄마 목소리가 좀 커지고 모르는 남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고...

찬유 씨가 예민한 듯 고개를 돌려 귀를 쫑긋 세우고 있다. 


“내려가보죠...”


“네!”


엄마와 경찰관들. 그리고 조폭스러운 남자들...


“아니. 수배자라니... 그럼 내가 수배자 놈한테 돈을 꿔준 거야? 게다가... 살인? 아이고... 세상 무서워라...

 아니 경찰은 그런 놈들이 우리 딸 주변을  활보하고 다니는 동안 뭐 하는 거예요!!!  내가 꼬박꼬박 세금도 내고 이 동네 발전위원회도 하는데!!! 우리 딸 무서워서 어떻게 해!!! “


“아 거 누님~ 쪼까 진정 좀 해보쇼 잉! 거 자꾸 앞서 가요 잉.

 미리 소설 쓰지 말고  이분들 아니 경찰관님들 말은 이제 광수대 형사들도 온다 허니

 걱정 놓으란 소리 아니요~! 어따! 우짜자고 난리 허벌이요... “


 “동생! 그런 섭섭한 말이 어딨어? 광순지 광수 댄 지 오면 뭐 바로 잡히고 해결되냐고!! “


 “아따.. 누남... 그 성질 허고는... 우리도 가까이서 좀 지켜본다잖소...”


 “저기... 어머님. 일단 저희 경찰을 좀 믿어주시고요. 광수대 강력계에서 오랫동안 쫓던 놈이라고 하니까.

  정보가 많을 겁니다. 산새마을에 사는 놈은 아니라고 하니까. CCTV에 번호판 인식되어 있고. 걱정 안 하셔도   되고요. 또 스토킹방지 법률 적용돼서 신고하면 즉시 우선 출동하도록 스마트워치 드릴 겁니다. 염려 마시죠.... “


“내가 선우 저거 하나 바라보고 온갖 일 겪고 여기까지 왔는데!! 살인범이라니. 나 때문에 우리 선우가 위험해졌잖아. 우리 딸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 엄마 때문에 이 못난 엄마 때문에... 그런 놈한테 돈을 빌려줘서는... “


엄마는 나보다 더 무서워하고 있다. 동네에서 유명한 극성이다 보니 경찰도 엄마가 가끔 추심하러 갈 때 도와주는 저 삼촌들도 엄마를 어쩔 줄 몰라한다.  정말 지겨워. 저런 극성, 자기가 잘못해 놓고 자기가 더 소리치고 힘들어하는 거... 못 봐주겠어. 


“저기, 어머님. 일단 제가 회사에 이야기해서 사설경호를 당분간 할게요. 물론!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경찰에 연락하고 보호조치 후 가해자 접근 제지 외에는 하지 않겠습니다. “


“아따~! 체격이 실허네... 젊은이가 쓸만허네.. 키도 크고... 어째... 내 밑에서 일 좀 배워볼 생각 없는가?...“


“네?”


“아 동생! 이상한 소리 말고 고만 가!! 여긴 선우 경호원 하는 사람이라는데... 무슨...”


경찰관들이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한다. 


“자 그럼 일단 위치파악은 저희가 계속하도록 지급해 드린 워치는 꼭 차고 계시고요. 긴급연락하시면 바로 출동합니다... 그리고 저.. 사설 경호원 분... 꼭 경찰에 바로 신고 후 보호조치 하세요. 아무리 범죄자라도... 쌍방 간에 폭행사건으로 될 수 있어요. 그놈들... 하도 들락거려서 변호사 수준으로 법 잘 아는 놈들입니다... “


“네. 걱정 마세요.”


“그려~ 우덜도 누님 집 주변이랑 한 번씩 오가며 잘 보고... 또 어디 PC방이나 음지에 그놈이 오는지 잘 살폈다가.. 경찰에 넘기려니까 걱정 마소“


“아유.. 내 팔자야.. 내가네가... 내가 우리 선우를..”


“어머니. 어머니 탓 아닙니다 모두 함께 나서고 있으니까... 염려 마시고요..."


저 모습. 예찬이가 파타고니아에서 돌아와서 해주는 말투 같다. 엄마 편 들어주면서 

사실은 내가 덜 불편하게 해주려는 저 깊은 배려. 


“저기요 찬유 씨. 뭘 안다고... 암튼 이거 회사에 이야긴 된 거에 요? 엄마! 이 사람 경호 시키려면 돈 내야 해... “


“어 그래그래! 거기 사장님 좀 나랑 연결해 줘...”


선우 씨는 생각보다 강한 사람 맞다.  내 판단이 옳았다.

하얀 청개구리의 목처럼 여리고 약할 거라는 생각은 그냥 눈으로 본 내 선입견일 뿐. 

어쩌면 저 여린 부분. 마음이 온통 거친 것들, 거친 엄마 거친 성장과정, 거친 일들을 마치 톱니바퀴들 사이의 윤활유처럼 버티게 해주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나를 멈춰 세웠던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무릎 꿇렸던 내 마음도 어쩌면 저런 연약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윤활유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중요한 순간엔 불꽃이 튀며 멈춰버리는  강하기만 하려는 욕심이나 강해하만 한다는 두려움이었는지도 모른다. 


학교는 복학기로 했다. 어차피 졸업 무렵이라. 학위와 최종 수련만 통과하면 되고. 경호업체는 다시 계약직에서 파트타임으로 전환했지만 오로지 선우만 경호하면 되는 일 집중하면 되니 좋다.  


어쩌면 운명처럼 어쩌면 이 모든 우연이 가리키는 지점이 지금이라는 필연처럼 나는 그녀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다. 그리고 멈췄던 나를 일으켜 세우고 결국은 나를 지켜내고 있다. 파타고니아의 거인이 되어서 절벽 아래로 추락해서 늑대들에게 위협받는 선우를 구하고 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선우의 활동에 함께 한다. 그녀 곁에서 조금씩 웃어주고 무거운 가방도 들어주고

때론 햇볕이 강하면 그늘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녀는 조금씩 밤의 시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시간을 벗어나서 여기 복잡한 서울의 시간을 살고 있다. 


“오늘은 밝고 옷도 멋지네요... 선우 씨 이런 예쁜 원피스 입은 것 잘 어울려요! 멋집니다. “


“멋지다가 아니라 예쁘다 아니에요?”


“아... 네! 하하... 그냥 멋진 걸로...”


“예쁘다고 하면... 속 마음 들킬까 봐 그래요?”


“네? 무슨 경호할 때 경호원은 경호만 신경 씁니다. 제 본명이 찬유가 아니라 경호예요..”


“네 경호 씨... 늘 검은 정장에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데... 나는 반바지에 티셔츠에 좀 후줄근한 것 같아서 암튼 분위기 좀 맞춰봤어요.”


“네 잘했어요. 이렇게 연한 민트색 원피스를 입으니까. 음...  파타고니아 사진에서 본 하늘 빛깔 같아요. 아르헨티나 국기 같아 보이기도 하고.. “


“그러게요... 찬유 씨는 그 하늘 아래 검은 산 같네요...”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 누가 보면 연인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시간 그 시간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금빛처럼 비추고 있었다. 


“하늘색 하늘 같은 고객님의 안전은 검은색 든든한 산 같은 제가 책임집니다. 걱정 마세요 선우 씨. “


“참. 제 나이랑.. 모르죠.  저는 자퇴했어요. 입학하고 1년 있다가.  지금.... 다시 재입학할까도 고민이고... “


 “잘했어요. 아니... 잘 생각했네요!!  전공이... 뭐예요? “


 “아... 저.. 디자인 전공이에요. 시각 디자인...”


 “와. 멋있네요... 어쩐지 옷 입는 컬러도 센스가...”


 “뭐래.. ㅋㅋ 오늘은 좀 걷고 쇼핑도 하고 싶네요.”


 “ㅎㅎ 저랑 더 있고 싶은가 봐요?”


“아... 네! 더 있고 싶어요. 더 오래 안전하게

 선우 씨 옆에서 그간 안 해본 것 좀 하고 싶어요... “


가슴에 전류가 들어와서 모든 전구가 환하게 켜진 것 같다. 거울이 있다면 내 눈코입귀로 빛이 뻗어나가고 있지 않을까 착각이 들 정도.  그때 선우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배달 오토바이에 깜짝 놀란 선우를 당겨서 감싸 안는다. 갑자기 심장소리가 온몸으로 다 뻗어나갈 것 같은 착각 속에 귀에서 북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선우는 찬유의 단단하고 긴 팔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한 참을 그대로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아닌 애꿎은 배달 오토바이만 그 골목에서 사라질 때까지 어쩌면 좀 천천히 사라지길 바라면서... 함께 나란히 같은 곳을 바라보듯... 껴안은 채 있었다. 


“헛... 흠흠... 많이 놀랬죠. 아 정말 저 배달 오토바이들 위험하게...”


“오토바이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것 같아요...”


“참  우리... 쇼핑하러 가요. 저 살 거 있어요.”


“네 그래요.”


다시 큰길로 접어드는 곳 고가도로 아래에서 백화점 방향으로 걷는다. 

선우는 찬유의 팔을 여전히 껴안듯 잡고 있고 찬유는 다른 쪽 팔을 뒤로 돌려 열중쉬어 자세처럼 걷고 있었다. 천천히 탱고를 추듯 선우의 발걸음의 속도를 생각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를 생각하고 그냥 오늘이. 이 밤이 길고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화점 앞은 늘 사람으로 분주하고 젊은 청춘들은 여기저기서 서로를 뽐내고 예뻐하고 사랑한다. 


“산새마을 꼭대기 우리 집에선 그냥 반짝이는 빛으로만,  보석처럼만 보였는데...

 이렇게들 웃고, 바쁘고... 재밌게 보내고 시끌벅적 예쁘네요. “


“여기에서 지금... 선우 씨가 제일 예뻐요... 객관적 진심입니다. ”


“객.. 관적 진심이요? 그게.. 뭐예요.. 하하하. 키키...”


“웃겼나요? 근데 키키 웃음소리... 특이하네요. 좀 귀여워요...”


“어... 제가 그렇게 웃었어요?”


선우는 머리 하나는 더 키가 큰 찬유의 팔을 살며시 놓고서는 찬유 앞에 바로 선다. 키키라는 웃음소리, 그 소리를 유난히 좋아하던 사람 아니 이제 좋아하는 새로운 사람. 갑자기 차가운 남극 근처의 바람이 눈 위를 스치는 것 같다. 


“잠깐만... 내 눈에 뭐가 들어갔나 좀 봐줄래요?”


“네? 괜찮아요? 어디...”


선우의 입술이 파타곤 거인의 입에 살며시 포개지고 바위 같은 파타곤 거인은 바람처럼 곰의 털처럼 단단히 얼어붙다가... 부드럽게 선우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감싸 안는다...


“저 이젠... 아침을 싫어하지 않을 것 같아요. 아침 햇빛을 볼 용기가 생겼어요.”


“다행이에요.”


“오늘 아침에 커튼을 더 단단히 닫으려고... 밖을 보다가...

 찬유 씨가 운동복 차림으로 그 앞에서 운동하는 거 봤어요... “


“아...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겸사겸사 어차피 복학해서 체력도 키워야 해서

 운동 겸... “


“아뇨... 그 모습 덕분에 아침의 공포감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지금 많이 용기가 생겨났어요... 고마워요 찬유 씨. “


“저도.. 고마워요. 선우 씨 덕분에  용기 내서 복학도 한 거예요.  저 지도자 자격증도 딸 거고요.  다시 달리고 힘내서 경기장에 올라설 용기가 생겼어요. 심판이 되려고요!  꼭 금메달리스트가 아니어도 저를 사랑하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우 씨 지켜줄 수 있을 때부터 그렇게 된 거예요... 그리고... “


이번엔 찬유의 선우의 작고 하얀 목을 끌어안아 머리를 감싸 안고 입술을 포개본다. 

찬유의 긴 팔이 그녀의 작은 어깨와 허리를 큰 나무의 가지처럼 휘감아 안아준다.


"그리고... 저 선우 씨 많이 좋아해요, 사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파타고니아의 하늘과 

파타고니아의 산과

파타고니아의 거인과

파타고니아의 인간과

파타고니아의 슬픔과 사랑이


그날 밤 그 거리에서 한 장의 새로운 사진으로 남겨지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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