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놓는 행위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말을 놓는 결정은 미묘하게 어렵다. 내가 놓건, 남에게 놓으라고 하건, '말을 놓는다'라는 행위는 민망하게도 크다. 대체 존대는 무엇인지, 불편하지 않은 이와도 마지막 불편함의 한계로 남는 보루다. 편한 이를 편하게만은 대할 수 없도록 솟아있는 마지막 문턱이다.

나는 말을 잘 놓지 못하는 편이다. 심리적으로 가깝고 편하게 느껴도 웬만한 사이가 되지 않으면 말 놓기가 너무 힘들다. 지금 왕성하게 교류하고 있는 많은 이들과도 나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말을 못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절대 말을 편하게 하지 못한다. 물론 말을 꼭 놔야된다는 강박이 있진 않다. 오히려 나이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존대하는 편이 내겐 더 편안하다. 다만 가슴 한켠에 소심한 걱정이 남는 것.

'내가 말을 놓지 않아서 저 분은 내가 당신을 불편하게 생각한다고 여기는건 아닐까.' 같은.

여기서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말을 잘 놓지 못하다보니, 누군가에게 말을 놓으라는 제안도 잘 못한다는 것이다. "말 놔도 돼."라는 말은 정말 민망하다. 사람 사이에 나이가 대체 무엇이기에,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상대에게 말을 놓으라마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말을 놓으라는 제안이 어쩌면 '말 놓기의 결정권'이 나한테 있다는 의미가 되는 건 아닐까? 상대가 어리더라도 편한 사이라면 편하게 말을 놓아도 결코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먼저 말을 놓지 못할만큼 나를 불편하게 여기고 있는데, 내가 맘대로 '말을 놔라'고 하여 도리어 더욱 큰 불편함을 야기하는건 아닐까 하는 무거운 걱정.


그러니깐 정리하면 이렇다. 내가 존대하는 이에게 "이제 편해졌으니 말을 좀 놓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상대가 나를 정말 가깝게 생각하지 않는 한, 승낙해도 불편하고 거절해도 불편해진다. 승낙하면 나는 편하겠지만, 상대는 내가 편하지 않기 때문에 불편할 것이며, 거절하면 거절 자체로 서로 민망해지기 때문에 불편해진다.

한편으로 나에게 존대하는 이에게 "말을 놓아도 돼요."라고 했을 때,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진작부터 말을 놓을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 한, 동의해도 거절해도 서로 불편해지는건 마찬가지.

결국 말을 놓는 문제는 어떻게든 불편함을 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말을 놓겠다고 편하게 다가가기도, 누군가에 말 좀 놓으라고 편하게 얘기하기도 모두 어려운 일이다.

쉬운 얘기를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쓸 수 밖에 없는 것도 어쩌면 말의 구조적 특징일 것.


여튼 나는 꽤 오래 전부터 말을 편하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막상 내가 말을 놓으면 상대방 입장에서 내가 버릇없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혹은 이 사람에게는 내가 그 정도로는 가깝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항상 일정하거나 공평하진 않아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생각하는 감정이 일치할 수 없다. 이런 현상에 불만은 없는데, 다만 우리의 언어 구조상 존댓말과 반말이 명확하게 구분되기에 상호 편함의 농도가 언어에 묻어날 수 밖에 없고, 편함의 정도에 비례하여 농도도 자연스럽게 달라진다. 그러니깐 관계가 길게 유지되면 유지될수록 상호 편함의 정도에 따라 존댓말과 반말 중 어느 쪽으로 약간이나마 움직여야만 '나에게 당신은 가까운 사람입니다'를 증명할 수 있게 되는 이 아찔한 우리 말 말이다.


얼마 전에 한 동생이 호칭정리를 하자고 정말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라. 나는 이 친구를 항상 가까운 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친구가 말을 꺼낸 탓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를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애당초 별로 의식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 친구가 항상 직급이나 장난같은 호칭으로 나를 부를 때, 그게 오히려 '나를 편하게 생각해서 그렇게 부르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그를 가깝게 여겼다. 반대로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바로 저 편함의 농도에 대해 서로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어렵고 어렵게 여러 호칭으로 돌리고 또 돌리며 그 나름대로의 가까움을 표시하며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 친구가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말을 꺼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하면, 이 친구에게 나는 '형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가깝게 생각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형이라고 부르겠다는 말을 꺼내는데 수 년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사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언어는 묘한 긴장감을 항상 담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딱 애매한만큼만 공개되는, 그런 언어들로 우리를 감싸놓고 살아간다.

영어는 존댓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호칭이나 어미로 서로의 편함을 한국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확인하기 어렵다. 슬랭(slang)의 사용이나 서로의 애칭으로 가까움을 표시할 순 있지만 한국의 존댓말-반말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위에 길게 늘어놓은 이야기처럼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반말을 쓰기 위해 의사를 물어야 하고, 반말을 쓰게 하기 위해 제안해야 한다. 참 어렵다 어려워. 그냥 나는 모두에게 편한 사람이고 싶고, 모두를 편하게 대하고 싶은데, 이런 생각조차 언어 안에 갖혀서 여러모로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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