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ST PROJECT
어느 날의 전화.
"고객님 안녕하세요. 저는 고객님의 N사 담당 OOO PM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고객님께서는 저희 N은행을 오랫동안 이용해 주고 계셨는데요, 저희 임직원들에게만 제공되는 혜택을 소개드렸어야 했는데, 전산의 실수가 있었는지 누락이 되어서 연락을 못드렸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이번달에 마지막으로 안내를 드리려고 합니다. 월 00,000원으로 암 보장이 되는 상품인데요, 이 상품은 시중에서는 0만원대이고, 보장범위가 넓은 탓에 일반 고객님들께는 제공되지 않는 혜택이세요. 암 진단시 1억이 보장되고요, 이 상품은 또 특별하게도.."
무례하게 말을 끊고 싶지 않았기에 문장 구조를 고려하여 쉼표가 있을 법한 멘트를 기다렸는데, 상대방은 이 틈을 절대 주지 않겠다는 듯 또렷하고 끊김없이 몰아친다. 나는 결국 말을 끊을 수 밖에 없었다.
"환급이 되는 상품인가요?"
"아닙니다, 고객님. 고객님, 그런데 환급형 보험은 00년도부터는 나오지 않고 있고요, 저희 N사에도 환급형 상품은 있지만 그걸로 가입할 경우에 만기에 받으시는 비용은 0000만원 규모인데, 매월 납입 금액이 0만원대라서 지금 소개드리는 상품에 비해 그다지 추천드릴 만한 상품이 아니거든요. 그정도 비용이면 차라리 적금을 넣는게 이율적인 측면에서는 더 낫다고 보이고, 게다가 오늘 추천해 드리는 상품은 OO암과 OO암까지도.."
이번에도 말을 끊을 틈이 없다. 아마 메뉴얼에 '결코 대사 중간에 질문할 틈을 주지 말 것'이라는 내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적금을 넣으면 되겠네요?"
처음으로 수화기 너머로 멈칫하는 모양새가 보인다.
"아, 그, 저, 그렇지만 고객님, 보험이라는건 결국 암 진단을 받았을때의 보장 범위와 금액이 중요하다보니 그런 부분을 따져봤을때.."
"그럼 정리해보면 이 상품을 저렴하게 가입을 하고,"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전 암에 걸리길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면, 저에게 이익이 된다는 이야기시죠?"
이번에는 정적과 멈칫이 조화된 후 비로소 상대방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 그건 아..니지만요,"
"그럼 괜찮습니다."
"..네, 고객님. 감사합니다. N은행 OOO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서 나의 '감사합니다'는 감사를 담고 있지 않고, 상대방의 권유는 건강에 대한 우려와 걱정을 담고 있지 않다. 우리는 5분 정도의 통화에서 누구도 진심이 없고, 어떤 의미도 남지 않았다. 그저 소중한 5분은 휘발됐다.
'당신이 암 걸리면 우리가 O억을 줄게요!'라고 설명하려면, 적어도 말투라도 조심스러워야지 않겠나. 암이 복권인것 마냥, 높은 텐션의 목소리로, 'OO암에 걸리면-'으로 시작하는 가정법 문구로 설명하는게, 예의의 문제인지 지능의 문제인지 나는 혼란스럽다.
이런 전화들은 코멘트가 유독 길고 쉼없이 이어지기에, 중간에 말을 자르는 무례함을 범하지 않고는 애당초 끼어들 틈도 없다. 당신들의 무례함을 나의 무례함으로 밖에 제지할 방법이 없다.
물론 미안하게도 나는 나의 무례함에 대해 당신들에게 미안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