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행군과의 조우 1

소설 연재

by 서인석

캠프를 차린 후 의자에 앉아 도로 건너편의 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캠프 설치는 능숙해졌다. 이렇게 앉아서 여유까지 갖게 될 정도. 저녁먹기는 조금 이른 시간이고, 낮잠을 자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다. 이번 캠프는 도로와 조금 가까운 편이다. 차가 별로 다니지 않는 도로인 듯 해서 호기롭게 캠프를 쳤는데, 캠프를 치면서도 몇 대나 큰 트럭들이 지나갔다. 대신, 도로와 가까운만큼 읍내를 다녀오고 하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캠프를 치느라 난 땀 때문에 탄산이 당겼다. 아이스박스안에는 콜라 두캔이 남아있다. 한캔을 까고 의자에 앉았다. 나무 그늘 밑에서 산을 바라보니 휴가를 온 기분이었다. 음악을 틀어볼까 하고 슬쩍 일어나서 기지개를 켰다. 그 때 멀리 산 아래쪽에 희미하게 먼지가 이는게 보였다.


내가 위치한 곳은 산 중턱 즈음이었고 이 길은 살짝 경사가 있는 언덕인데, 먼 아래 쪽에서 모래바람 같은 것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봐도 모래 먼지에 가려 먼 곳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엉덩이를 털며 조수석의 쌍안경을 꺼냈다. 렌즈 안으로 보니 가장 선두에 군용 차량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경광봉과 형광띠를 두른 군인들이 쌍안경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형광띠 뒤로는 이미 영혼이나간 것처럼 보이는 병사들이 총을 메고 완전군장을 한 채 따라 걷고 있었다.

행군인 모양이다.



행군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이런 이름도 모르고 길도 모르는 산 길을 앞 사람 엉덩이만 따라서 여덟시간을 걸었드랬지.

행군 중에 부식으로 더위사냥이 나온 적이 있다.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 너무 맛있었던 탓에 아껴먹으려고 살살살 녹여 먹었다. 시계를 힐끔힐끔 봐가며 허락된 휴식시간을 꽉 채워서 먹으리라 계산하며 먹었다. 욕심이 과하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반쪽 더위사냥을 다 먹고 천천히 녹여먹던 다른 반쪽 얼음덩어리가 훌러덩 땅으로 떨어져 버렸다. 다른 병사들이 허겁지겁 굳기가 단단할 때 해치워 버리는 동안, 나는 천천히 맛있게 먹겠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얼음덩어리는 미끄러워졌고 중력을 따라간 것이다. 힘든 행군 중에, 그것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조차 없는 이등병 나부랭이 때였으므로, 고작 더위사냥 반쪽이었지만 그때의 억울함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길이 없다. 아마 이 뒤 처음 나온 휴가 때, 나는 더위사냥을 꽤 많이 사먹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역한지 십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상실감은 생생하다. 쌍안경 렌즈 안으로 행군 행렬이 보이자 더위사냥 생각이 먼저 날 정도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이 언덕은 길이 하나이므로 청춘들은 이 앞을 지나갈 것이다. 먼지가 많이 날리겠군. 뭐 괜찮다. 캠프는 수풀 좀 더 안쪽에 잘 차려 놨으니 먼지에 해가 될 것이 없다. 관측 장비들은 아직 설치하지 않았기에 그것 또한 걱정할 것 없다. 콜라는 비었다. 빈 봉투에 넣어서 치워놔야겠군. 행군 행렬 지나가는걸 구경하고 먼지가 좀 가라앉으면 그때부터 저녁을 먹고 관측을 준비하면 될 것 같다.



드디어 시야에 행군 행렬이 들어왔다. 나의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이동하는 행렬은 길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민간인이 신기한 듯 모두 한번씩 쳐다보고 지나간다. 이마와 가슴팍의 계급장을 보지 않아도, 표정만으로 계급은 어느정도 짐작이 된다.


늠름하고 당당해 보이는 표정은 병장 아니면 상병이다. 당장이라도 쓰러질것 같다는 표정으로 수통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친구는 이등병일 것이다. 더위사냥을 떨어트리고 좌절한 십여년전 나의 표정이 저랬을까. 간부들의 표정은 대부분 동일하다. 다만 주름의 갯수로 나이나 계급을 짐작할 뿐이다. 자꾸 소리를 치면서 독려하는 젊은 친구들은 소위 중위 혹은 하사 중사일 것이다. 군장을 메지 않은 채, 경광봉과 형광띠를 두르고 길 안쪽에서 통제하는 이들은 상사 이상인 것 같다. 어쨌든 좀 더 걱정스럽고 심각한 표정은 대부분 간부로 보인다. 내가 저 행군 행렬에 있을 때, 소대장 중대장들은 모두 어마어마하게 높고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이렇게 제 3자가 되어 바라보니 하나같이 젊고 예쁘다. 방탄모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데도, 턱끈과 방탄모 사이를 뚫고 보이는 피부와 눈빛이 하나같이 청춘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을동 살동 지나가는 청춘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별을 보겠답시고 어떤 호신도구도 없이 차안에 몇가지의 생계도구만을 끌고 나와서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지금도 시시각각 지구 어딘가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저들은 모두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일 것이다. 혹은 누군가의 형이고 누나이거나, 동생일 것이다. 누군가의 아버지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있다. 모든 가족들과의 사적인 삶을 뒤로 하고 자의든 타의든 갑갑한 옷과 무거운 짐들을 걸친 채 공적인 영역에서 헌신하고 있다.


사실 이렇게 있을때면 오만가지 잡생각이 든다. 이 잡생각들도 그동안 흔하게 볼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기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들이다.


"정지!"

여기까지 생각할 때쯤 갑자기 행렬이 정지했다. 형광띠를 두르고 도로 안쪽에서 지나가는 차들을 통제하는 간부들이 경광봉을 높이 들어올렸다.

"여기서 10분간 휴식한다!"

"10분간 휴식!"

"10분간 휴식!"

행렬은 길게 늘어진 상태에서 주황선 바깥쪽으로 나가서더니 그 자리에 다들 앉았다. 앉으면서 수백명의 한숨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앉아있는 쪽은 도로 바깥쪽으로 공간이 조금 있어서 군인들이 더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나는 수풀 깊은 곳에 숨어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예 내 주위로 몇명의 군인들이 앉게 됐다. 갑작스레 군인들의 휴식 행렬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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