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눕기에 도전하는 와식생활자
눕는 것을 좋아한다. 아주 많이. 어쩌면 제일! 퇴근하고 뭐하냐, 주말에 뭐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로 '그냥... 누워있어요.'였다. 그만큼 오랜 시간을 자칭 타칭 와식생활자로 살아왔다. 집에 돌아오면 옷 갈아입고 침대에 들어가기 바빴다. 운동을 시작하고 난 이번 주는 달랐다. 고작 3일이지만 귀가하자마자 눕는 대신 달리러 나가거나, 요가매트를 펼쳤다. 끝나고 나서도 바로 눕지 않고 글쓰기를 위해 책상에 앉는다. 요가 후 글쓰기까지가 하나의 리추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글을 발행하고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잠깐의 휴식을 온전히 즐기는 시간이 좋다. 몸에 적당한 피로감이 있어서 평소보다 일찍, 더 깊이 잠 속에 빠져들 수 있다.
그간 쉬어도 쉬는 느낌이 아니었다. 퇴근하면 뭉친 어깨, 뻑뻑해진 눈, 지끈거리는 머리, 전체적으로 무거운 몸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기절하듯 누웠다. 구부정하게 웅크린 자세로 핸드폰을 하다 보면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저녁 식사도 거르고 시간을 때우다 스르륵 선잠에 빠져들곤 했다. 시차 출퇴근을 하느라 출근시간이 이른 편인데 그 탓에 초저녁만 되면 잠이 쏟아졌다. (일어난 지 12시간이 넘어가면 에너지가 뚝 떨어지고 마는 것일까?) 그러다 늦은 밤에 깨어나기 일쑤였는데 딱히 개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찝찝했다. 집에 와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눈 뜨면 다시 회사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괜한 억울함이 밀려와 2시-3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저녁잠을 자버렸으니 정신은 말똥한데 몸은 여전히 피곤한 상태여서 딱히 생산적인 걸 할 수도 없는 채로 새벽을 낭비하고, 아침이면 좀비처럼 회사에 갔다가, 돌아와선 다시 해야 할 일들은 뒤로 미뤄둔 채로 뻗는 악순환의 연속. 운동 시작을 계기로 그 굴레를 끊어보고자 한다. 눈 뜨고 있는 시간엔 최대한 덜 누워보자!
오늘의 요가 수련은 가벼운 디톡스 요가 : 빈야사 영상으로 했다. 요가 3일 차 왕초보에겐 어려운 동작들이 많았다. '가벼운'이란 단어를 보고 클릭했는데 내 몸의 무거움을 깨달을 수 있었던 시간.... 몸 곳곳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떤 동작을 하면서는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렸다. 한 손과 한 발로 온몸을 지탱하는 동작들이 있는데 균형 잡기가 쉽지 않았다. 손목에 살짝 무리가 오는 것 같기도 해서 자세를 조금씩 바꿔가며 신경 써서 진행했다. 다음에 같은 동작을 시도할 땐 조금 더 자연스럽겠지, 그땐 오래 버텨봐야지, 하며 넘어갔다. 옆구리며 고관절이 시원하게 풀리는 느낌은 즐기는 편이다. 디톡스 요가를 하고도 좀 더 몸을 움직이고 싶어서 하체 요가 수련도 이어갔다.
요가를 시작한 요 며칠 수련(修鍊)이라는 단어를 곱씹고 있다. 닦을 수, 단련할 련. '닦을 수'는 내 이름에도 들어가는 한자다. 터럭 삼(彡) 부분을 특히 더 정성 들여 쓰게 되는 글자. 비슷한 획을 연이어 그어 나가야 글자가 완성되는 모양새가 어쩐지 글자 자체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좋다. 무엇이든 한 순간에 반짝 완성되는 건 없으며, 꾸준한 갈고닦음이 있을 뿐임을 담담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예상치 못한 데서 문득 다시 만난 한자가 도전하고 지속할 용기를 주었다.
저녁의 고요한 수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 하루이기도 했다. 약속이 있어서 평소보다 늦게 귀가했는데 몹시 피곤한 와중에도 얼른 집에 가서 요가해야지, 생각했던 것이다. 반면 달리기는 그 정도로 기다려지진 않는다. 그래서 나름대로 내일의 달리기를 기대하기 위한 장치를 생각해냈다. 저녁으로 맛있는 샐러드를 미리 사다 놓는 것이다! 퇴근길에 사 와서 집에 가져다 놓고, 달리기를 마친 후 개운하게 씻은 다음, 편안한 음악을 들으며 신선한 샐러드를 먹어야지. 생각만으로 약간 행복해졌다. 내일이 금요일이 아닌 것은 살짝 아쉽지만...
오늘은 책을 못 읽었다. 브런치에 글을 딱 두 개 썼는데, 두 개 다 인용으로 끝마쳤기 때문에 이번에도 뭔가 인용을 해야 할 것만 같다. 이름 얘기 꺼낸 김에 관련해서 써두었던 과거의 일기를 끌어와 본다.
-‘닦을 수’에 ‘어질 현’. 나는 내 이름이 마음에 든다. ‘수’가 들어가는 이들에게 무슨 한자냐고 물으면 보통은 ‘빼어날 수’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데 나는 ‘닦을 수’를 쓴다. 수양, 대학수학능력시험, 할 때 바로 그 ‘수’다. 겸손하고도 정갈한 이 글자가 나는 좋았다. 그래서 고등학교 내내 참고서에 이름을 쓸 때, 성은 빼고 이름만 한자로 두 글자 적어 다녔다. 修賢. 글자를 이루는 부수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으면서도 조화를 이룬다. 이름처럼 단단하고 꽉 찬 사람이고 싶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수능을 대차게 말아먹은 것을 시작으로, 나는 인생의 주요한 관문 앞에서 별다른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번번이 미끄러졌다. 어느 날 문득 아버지가 그랬다. 이름 자를 잘못 썼다고, 아무래도 닦을 수가 아니라 빼어날 수를 써야 했다고. 내가 늦되는 걸 이름 탓으로 돌렸다. 나는 발끈했다. 빼어난 건 원래부터 갖고 있는 성질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닦는 건 과정이지 않냐고. 나는 계속해서 배워나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게 좋다고. 빼어나게 빠르진 못해도, 하나씩 차근차근 닦아나가는 걸 나름대로의 삶의 태도로 삼고 있다고.
모처럼 이름의 뜻을 되새기려고 사전을 찾았다. 닦다의 뜻을 찾으면 ‘익히다. 배움’이 제일 먼저 나온다. 현에 해당하는 어질다의 뜻은 ‘너그럽고 덕행이 높다’이다. 이제 이 둘을 내 멋대로 합쳐본다.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워나간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조금쯤 너그러운 사람이고 싶다. 이제 이름이 불릴 때마다 너그러운 마음을 품어보아야지. 홀로 빼어난 사람은 어쩐지 외로운 느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2018년 8월 28일에 쓴 일기, <이름에 대한 고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