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엔 확실히 지금보단 소심했다. 관심이 생기거나 친해지고 싶은 여자가 생겨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말을 걸지 않고 점잔을 빼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던 탓도 있다. 나이를 먹고 보니, 그때 주저하고 망설였던 내 젊은 시절이 좀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젊은 친구들에게 조언하기도 한다.
“그까짓 거, 한번 부딪혀봐. 실패하면 어때. 그 나이엔 까이고 넘어져도 흉이 안 돼.”
아저씨가 돼서 얻은 “그까짓 거.”라는 인식이 조언을 넘어, 자기 행동의 동력이 되기 시작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 파릇한 청춘일 땐 소심하기 그지없던 남자가 갑자기 대담해지고 용기를 내기 시작한다. 또는 청춘일 때 거침없이 돌진하던 그 습관을 나잇살 먹고도 시전 한다. 비극의 시작이다. SNS에서 종종 여성들의 고발을 듣곤 한다. 웬 나이 든 남자가 DM을 날려 집적거린다거나, 쓴 글의 문맥을 파악하지 못하고 맨스 플레인 작렬해서 괴로웠다거나, 관심병 걸려 질척대길래 곧바로 차단했다는 글들. 젊을 때나 유용한 삶의 교훈을 나이가 들어 뒤늦게 적용했을 때의 결과는 이렇게 참담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막무가내 정신은 개저씨로 가는 지름길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아직 아저씨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몸을 단련하고 피부를 가꾸고 스타일링을 하는데 공을 들인 만큼, 아저씨의 시기로 진입하는 걸 최대한 늦추었다고 여긴다. 그런 아저씨에게 감히 조언하자면, 아저씨임을 빨리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괜찮은 아저씨가 될 수 있을지를 고심하는 게 낫다. 괜찮은 아저씨가 되기 위해선, 거리두기의 미덕을 생활화할 필요가 있다. 20대 시절에 여성에게 내지 못한 용기를 지금에 와서 내려고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젊고 만만해 보이는 여성 앞에선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세심하게 자신을 살펴야 한다.
어느 도서관에서 일어난 일을 들은 적 있다. 취업을 준비하던 한 여성의 자리에 누군가 자양강장제를 올려놓곤 했다. 어느 날 누가 이런 걸 올려두는지 궁금해진 여성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리가 반쯤 벗어진 노인이 그녀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짓더란다. 여성은 뜨악하여 그 길로 도서관에서 나왔다고. 타인이 나를 볼 때, 이십 대의 나와 지금의 나를 보는 시각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얼마 전에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내 모습에 관한 우스꽝스러운 그림이 돌아다닌 적 있다. 두 관점엔 큰 골이 존재했다. 내가 보는 것처럼 타인도 똑같이 볼 거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저씨도 여전히 타인과의 친밀한 관계를 갈구한다.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힘들 땐 위로를 전하고, 즐거운 일엔 서로의 팔을 치며 박장대소를 하고 싶다. 누구나가 그런 관계를 갈망할 것이다. 그렇지만 저마다 관계를 맺는 방식과 속도가 다르다. 젊은 시절엔 관계 맺는 방식이 유연했다. 주먹다짐을 통해서도 친구가 될 수 있었고, 내가 싫어하는 모임에 가서도 실실거리며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누군가와는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나누고, 또 다른 누군가와는 진중하고 무거운 말을 나누며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저씨가 된 지금,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어느 정도 고착되었다. 하기 싫은 건 대가를 받지 않으면 안 하려고 하고, 가기 싫은 곳엔 안 가려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비교적 확고해졌다. 이렇게 많은 부분의 패턴화가 이루어진 아저씨들은,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패턴화 된 내 스타일대로, 내 속도대로 나아가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생각에 대한 생각, 즉 메타인지가 필요하다. 내가 이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대하려는 이유는 뭘까, 난 이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 걸까, 난 이 사람에게 어떤 편견을 작동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처럼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생각이 필요하다. 영문도 모른 채 차단되지 않으려면.
어떤 이는 이렇게 항변할 것이다. 왜 아저씨에게 유독 이렇게 엄격한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냐고. 왜 나만 갖고 그래! 그건, 아저씨쯤 되면 이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갖기 때문이고, 경력자랍시고 누굴 가르치거나 훈계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며, 경험으로 얻은 지혜와 관성이 뒤죽박죽 되어 둘 중 뭐가 나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회에선 일정한 책임감을 요구하는데, 책임지는 위치면 뭐든-아랫사람에게 무례한 짓도- 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빌런이 나타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해 영향력이 생기는데, 세심하게 자신을 살피지 못하면 그만큼 타인에게 상처를 줄 가능성도 크다. 난 스스로 아저씨임을 인정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는데도, 어떤 말과 행동을 해놓고 아차, 싶을 때가 있다. 패턴화 된 행동이 무의식 중에 나와 버릴 땐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정말 난감하다. 굳어 가는 내 마음을 계속 저어주지 않으면 바닥에 눌어붙은 카레처럼 영 못 봐줄 인간이 되기 십상이다.
아저씨라는 바구니 속엔 수없이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아저씨는 개저씨와 동의어가 아니다. 영화판은 여전히 송강호, 정우성, 이정재가 건재하고, TV 속 유재석과 강호동은 판을 주도하고 있으며, 아저씨 작가들의 글은 노련하게 내 마음을 흔든다. 그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아저씨들이 고군분투하며 자기 자리에서 세계를 좀 더 멋진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간 쌓아온 지식과 지혜를 쏟아붓고 있다. 사회 곳곳엔 그들의 힘을 남을 위해 쓸 줄 아는 키다리 아저씨들이 있고 그들의 선량함과 따뜻함을 보고 많은 청춘들이 그런 사람으로 자라 가고 있다. 나도 그런 아저씨들을 보고 자랐고, 배웠고, 존경했다. 분명한 건, 그런 아저씨는 거저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춘기의 여드름처럼 꼰대나 개저씨가 되는 길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마음이 눌어붙지 않도록 계속 젓는 노력이 없다면 젊은 시절 그토록 성토하던 인간이 어느새 거울 속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꽤 오랫동안 소심함을 잘 지켜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