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달려도 좋다는 감각

누군가의 고유성을 말할 때

by 송광용

하루키는 어느 마라톤 대회에서 마라톤 42.195km 거리를 완주하고, 자원봉사 여성이 달아주는 메달을 목에 걸때, '아, 이제 더 이상 달리지 않아도 되는구나' 라는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달리는 일은 자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고, 마라톤 역시 몇 달을 준비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일인데도, 자신의 것을 모두 쏟아낸 뒤에는 이제 그만해서 좋다는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얼마 안가 또 달리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떤 책을 읽고나서, '아, 이제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다. 책을 완독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꾸역꾸역 읽다가 결승점에 다다라서 뭔지 모를 해방감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좋아서 선택한 책이고, 중간에 얼마든지 집어던지고 다른 책을 펼 수 있는데도, 어떤 책은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또 어떤 책은 지금 그만둔다면 읽지 않은 나머지 부분에서 내 마음을 울리는 필생의 구절을 놓칠 것만 같아서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역설적으로, 끝까지 대단한 구절은 없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많은 일이 그렇게 흘러간다. 처음엔 훌륭한 뭔가를 찾으려고 시작했다가, 나중엔 대단한 게 없다는 걸 확인하려고, 그래서 중간에 포기한 걸 후회하지 않으려고 끝까지 하는 일들. 쉽사리 포기하는 일이 잦으면 변덕스럽다는 평가를 얻겠지만,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것도 미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언제나 그 중간 어디쯤에서 포기와 지속의 지점을 찾아낼 줄 아는 것이 삶의 지혜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모든 일에 일관적인 인간은 아니다. 어떤 일은 변덕스러울 정도로 일찍 포기하고, 또 어떤 일은 미련할 정도로 붙들고 늘어진다. 그 포기와 지속의 양상이 결국은, 그 사람의 고유성을 말하는 게 아닐까. 어떤 일에 쉽게 포기하는지, 어떤 일엔 또 그러지 못하는지에 대한 양상 말이다.


'중도를 찾아내는 지혜', 라는 것은 많은 부분 그 사람의 개성을 희석시키는 방향으로 향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것이라면 이제 좀 그만하라는 조언, 그건 끝까지 해야지 하는 조언은 함부로 할 게 아니다. 네가 좋은 만큼, 네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만큼 하라고 말하는 것이 최선일지 모르겠다. 그 사람이 평균적인 인간, 균질한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남들이 좋다는 것 중에 어떤 일을 마다하는지, 반대로 남들이 무관심한 어떤 일을 지속하는지에 대해 꼴똘히 생각해보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글쓰기가 생활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매일 그 일을 하고 있다. 긴 글이든, 짧은 글이든, 글쓰기의 빈번한 소재는, 자신의 호불호에 관한 것이다. 글이 하나씩 쌓여갈 때마다 자신을 정의할 만한 근거가 쌓여가는 셈이다. 뭐, 그 중엔 그저 글자뿐인 가짜 근거도 있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작은 핸드폰 화면에 매달려,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렇다고 가족들이 그닥 좋아하지도 않는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 (때때로 아내는 쓰는데 정신이 팔린 내게 호통을 치고, 아이들도 내 핸드폰을 빼앗으며 갖가지 요구사항을 말하곤 한다.) 지탄을 받으면서도 내 안의 무언가를 끄집어내서 문장이라는 형태로 풀어내는 일에 희열을 느낀다. 내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가 이해할 만한 것으로 환원하는 일은, 내겐 연금술에 버금가는 신비다.


'아, 이제 더이상 쓰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며 안도하는 순간을 맞고 싶다. 하지만 그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라톤을 마친 하루키처럼 쓰는 일에 모든 걸 쏟아붓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그저 내가 좋은 만큼, 내가 가진 에너지만큼 쓰다가 끝날 것이다. 뭐 그것도 나로서는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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