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체와 유전자 사이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자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풀어보도록 하겠다. 리처드 도킨스에 의하면, 유전자의 최종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다. 유전자는 섞이고 교차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유전자의 특질이 좀 바뀔 순 있어도 유전자는 영속한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고 생명체를 옮겨 다니며 존재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가 잠시 타고 가는 자동차와 같다. 유전자는 생명체 속에서 머물다가 자동차가 고장 나기 전에 다른 차로 갈아타기 위해 성호르몬을 분비하도록 명령한다. 이렇게 유전자는 생명체를 바꿔 타면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내 안에는 ‘김동률’이라는 이기적인 유전자가 존재한다.
김동률은 나의 연애를 타고 영속하려는 유전자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연애사 속에서 김동률은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곤 했다. 늘 우월적 지위로 내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다. 내 연애가 끝났을 때, 김동률은 다음 연애에 옮겨가 보란 듯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상상 속에서만 연애를 했다. 고교 졸업과 함께 첫 데이트 상대가 나타났다. 그녀가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은 ‘전람회 1집’ 음반을 복사한 테이프였다. 1990년대 중후반, 음반의 불법 복제는 더블데크를 통해 각 가정에서 버젓이 자행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음반의 복제 테이프를 내게 주면서 그녀에게 ‘전람회’가 어떤 의미인지 역설했다.
그 그룹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던 나는,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해도 공감하겠다는 자세로 그 얘기를 들었다. 내가 드디어 전람회의 음반을 들었을 때, ‘김동률’이라는 강력한 유전자는 내 귀를 타고 들어와 내 안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그 연애는 비록 썸만 타다가 끝장났지만, 내 안에 한 번 들어온 그 유전자는 내 몸에서 적응을 끝내고 다음 연애로 옮겨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 맘대로 평가를 내리자면,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의 하나인 ‘전람회 2집’을 접했을 때 난 내 목소리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김동률’로 변화시키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노래를 할 때마다 지금도 따라붙는 ‘비음’은 그때 생긴 것이다. 모임과 만남 코스에 꼭 들어 있던 노래방에 가면 주야장천 김동률을 소환했다. 내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김동률은 내 안에서 나를 조종했다. 연애 상대와 함께 노래방에 가서 <기억의 습작>을 부를 때, 그때는 그게 죄인 줄 몰랐다. 회개의 기회는 그로부터 한참 후에 찾아왔다.
내게 고음이 필요한 건, 오직 <기억의 습작>을 완창 하기 위해서였다. 김동률의 음울하면서도 포근한 저음을 위해 성대의 구덩이를 파고 한없이 내려갔다. 그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때때로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 남은 성대의 상흔으로 난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비음이 섞여 나와서, 김동률 노래가 아닌 노래를 부를 땐, ‘정준하’라는 오명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전람회 3집’을 지나, 김동률의 솔로 앨범이 차례로 나올 때도 노래방에서의 내 선곡은 꽤 오랫동안 그 유전자의 지배를 받았다. 노래에 대한 열망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이제서야>로 이어졌다. 가끔 그 유전자는 ‘이승환’으로 변이를 일으키기도 했다. 김동률의 묵직한 비음은 이승환의 가늘고 날카로운 비음으로 전이되었다. 비음은 내 최고의 무기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버렸다.
타이틀곡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김동률의 노래들이 더 좋아지고, 나만 사랑하는 듯한 곡이 하나둘 늘어갔다. <귀향>, <동반자>, <이방인> 같은 곡들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김동률은 내 감성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유전자를 완전히 파내는 일은 이제 글렀다.
2013년 9월, 나의 마지막 연애 상대와 처음으로 김동률 콘서트에 갔다. 콘서트홀에 퍼지던 그의 목소리와 격조 높은 반주들. 그곳엔 김동률이라는 유전자가 타고 다니는 ‘연애’들이 가득 차 있었고,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나의 마지막 연애 상대와 그해 11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연애의 종말이었다.
연애가 끝장나고도 생존하여 새로운 연애에 준엄한 명령을 내리던 김동률은, 이제 내 기억에 터를 잡고 그 존재감을 이어가고 있다. 내 안의 김동률이 발현할 때면, 난 귀향하듯 플레이 버튼을 눌러 그를 맞이한다. 그러면 그는 나를 기억 저편으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아이나 아내가 나를 급히 찾으면 그제야 선심 쓰듯 놓아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