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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작가 Sep 23. 2022

오늘의 냉소바

국수를 마주하며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오는 걸 보니, 이제 가을이다. 그래도 낮에는 꽤 더워서 여름이 가기 전에 올리고 싶은 국수들을 빨리 소개해드리려고. 냉면과 콩국수 다음으로 여름에 자주 먹는 국수, '냉소바'다. 우리말로 하면 냉메밀국수. 사실 직업병 상, '냉메밀국수'라고 '표기'해야 올바른 맞춤법이고 마음이 편하지만 어감은 냉소바가 제일 좋다. 딱 국수 맛 그대로를 표현한다고 해야 하나. 일본을 대표하는 국수는 첫 번째가 우동, 두 번째가 소바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하나. '소바'가 먼저일까, '메밀국수'가 먼저일까? 국수 자료조사를 철저히 하지 않은 상황에 글을 쓰는 것이기 때문에 뭐가 먼저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가면 오래전부터 그 지역에 유명한 메밀밭이 있다.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기도 한 것을 보면 최소 10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도 메밀이 있었다는 건데. 굳이 일본에서 이 국수가 유래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국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여름에 우리 선조들이 즐겨 먹던 국수였다는 기록이 하나쯤 남아있지 않을까. 메밀은 찬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몸에 더위를 가시게 하는데 좋을 뿐 아니라, 감칠맛 넘치는 시원한 가쓰오부시 육수(쯔유)가 더위에 잃은 입맛을 살아나게 하기 좋다.


 내가 냉소바를 좋아하게 된 때는, 여의도에서 나의 20대를 불태우던 막내작가 시절이었다. 보통 아침 9시 반쯤 출근해서 아이템 기사 찾기 및 자료조사를 하거나, 공공기관 섭외 전화를 돌리면 어느덧 점심시간. 오전 업무를 마무리하고 간단히 메인작가님께 상황 보고를 한 뒤, 허기진 배를 달래고 오후 업무에 전투적으로 돌입하기 위해 점심메뉴는 매우 중요했다. 지금도 아침, 저녁은 간단히 먹거나 대충 때우는 경우가 많은 편이고 점심은 푸짐하게 먹고 싶은 대로 먹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확실히 에너지 비축형이기보다는, 저장 후 바로 연소시키는 스타일 같다. 일할 땐 열정적으로 확실히, 쉴 때도 쿨하게 확실히.


 촬영 때나 편집 때는 주로 피디님이나 조연출, 다른 작가들이나 카메라 감독님, 아나운서들과 같이 밥을 먹지만 작가들은 대부분 혼밥을 할 때가 많다. 아닌 사람들도 있는데 나 같은 경우는 10년 넘게 작가 일을 하면서 거의 그랬다. 팀원이 그렇게 많은 프로그램을 하지 않았고, 대부분 장시간의 기획이 필요한 다큐멘터리나 준비 시간이 길지 않은 스튜디오 프로그램을 오래 해서 그렇다. 오히려 그때 혼밥을 하던 습관이 잘 잡혀서, 지금도 웬만한 중식당이나 일반식당에 가서도 혼자 밥을 아주 잘 먹는다.


무더운 여름날, 일에 사람에 지친 내가 자주 찾던 냉소바집이 있었다. 지금은 정확히 이름이 기억나지 않고 현재도 영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초밥이나 소바만 파는 집은 아니었고 일본 음식점이었다. 그곳에서 파는 왕새우 냉소바 맛이 진짜 좋았었는데. 다 먹고 나면 일로 인한 시름을 잊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느낌이었다.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방송사나 프로덕션이 대거 이사를 간 후에는, 나도 여의도에 갈 일이 뜸해졌고 냉소바의 추억도 잊혀졌다.


그런데 2020년쯤에 선릉역 근처로 유튜브 영상 제작사에서 일을 하면서 한 식당을 알게 됐다. '지구당'. 이름이 왜 '지구당'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지구에서 제일 맛있는 식당이 되겠다는 건가?) 들어갔을 때 일본 느낌이 물씬 나는 인테리어와, 혼밥 하는 직장인들에게 정말 편하게 생긴 1인 의자들이 가운데 주방을 중심으로 반원 형태로 둘러져있다. 그 일대 다른 밥집은 보통 한 끼에 만 원에서 만 이천 원은 있어야 먹는데, 그것에 비해 저렴한 가격과 부담스럽지 않은 양, 기분 좋은 맛은 손님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게 하는 듯했다.


덮밥 종류인 텐동, 규동도 맛있지만 나의 베스트는 역시 '왕새우 냉소바'. 여의도에서 처음 먹었던 그때 그 냉소바의 감동까지는 아니었지만, 작가 일을 하며 받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와 갑의 횡포에 진을 다 뺀 날은 이곳을 찾아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영혼을 채웠다. 가쓰오부시 육수 맛이 주는 시원하고 적당히 짭짤한 국물과, 다진 무가 주는 약간의 달달함, 고추냉이가 주는 알싸한 매운맛이 메밀면과 찰떡궁합인  듯. 여기까지는 모든 냉소바의 기본 법칙 같고, 가게에 따라서 김가루에 청양고추를 올려주는 곳도 있고, 아니면 '지구당'처럼 파를 올려주는 곳도 있다. 이것도 깔끔한 맛. 여기에 바삭하게 잘 익은 새우튀김. 캬~ 사실 냉소바를 먹다 보면 새우튀김이 조금씩 육수에 젖게 되는데, 국물이 스며들어서 부드러워진 새우튀김 맛도 내가 좋아하는 포인트.


 지금 내가 일하는 곳은 잠실이지만, 지구당의 '왕새우 냉소바' 생각나서 얼마  선릉을 찾았다. 여러 가지 힘든 일들과 바닥까지 떨어지는 자존감과 우울감에서 탈피하고자. 이래서 사람들이  소울푸드, 소울푸드 하는 건가. 확실히 좋아하는 음식이 주는 에너지나 힐링이 분명 존재하는  같다. 소중한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기쁨. 우리가 평생 죽기 전까지 추구하고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때로는 어렵기도 , 아주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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