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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작가 Sep 07. 2022

오늘의 쌀국수

국수를 마주하며

 내가 쌀국수의 맛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건,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는 대학로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은 주로 대학로 음식점이나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나의 베프 선영이는 인천에서 학교를 통학하며 본인의 학비와 생활비, 치과 치료비 등 모든 것을 아르바이트로 마련하느라 늘 바쁘지만 유쾌하고 씩씩한 친구였다. 선영이의 첫 아르바이트 장소가 바로 '빠리 하노이'라는 쌀국수집이었다. 이름이 '빠리 하노이'인 이유는, 파리에서 영화 공부를 하다 만나신 사장님 부부가 하노이에 가서 쌀국수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셨고, 그 뒤 한국에 와서 가게를 차리셨다는 정말 영화 같은 사연이...^^


  , 대학로 연극인들이나 연극 보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는 쌀국수 맛집이었는데 종로로 이전을 하더니 코로나 이후  이상 영업은  하는  같다. 아르바이트생이던 친구 덕에 놀러 가서   쌀국수의 맛은 정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신세계였다. 아니, 세상에 이런 맛이! 뜨겁고 진한 고기 육수에 하얀 쌀면, 푸짐한 숙주, 청고추와 홍고추의 콜라보레이션... 거기에 고수까지 첨가해서 이국적인 향을 듬뿍 느끼며, 해선장 소스와 스리라차 소스를 섞어 양지 고기와 면을 찍어 먹던  ... 너무 맛있어서 행복했던 기억. 그렇게 나의 쌀국수 사랑은 시작되었다.

이 전설의 가게에서 선영이를 비롯해 무려 세 명의 과 동기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선영이가 진이에게, 진이가 수현이에게 물려주며 잉꼬부부였던 사장님 내외를 내심 부러워하던 친구들. 이들을 이곳에 심어둔 덕에(?) 나는 대학시절 내내 일반 손님들보다 푸짐한 쌀국수를 먹으며 흡족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작가가 된 이후에도, 이 맛이 그리워서 생일 때 같이 일하던 피디님을 졸라서 먹고 가기도 했었다.


 그 뒤 쌀국수는 나의 소울 푸드 1호가 되었는데, 국내에 수많은 쌀국수 프랜차이즈들이 들어와 호아빈, 포베이, 반포 식스, 에머이도 점포별로 다녔었고 여의도 근처, 시청 근처 쌀국수집들도 숱하게 다녔다. 하지만 '빠리 하노이'의 맛을 대적할 곳은 없었으니.. 어딘가 헛헛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던 어느 날...

내가 사는 답십리 지역에 '아라기'라는 쌀국수집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게 됐고, 지인과 함께 방문한 나는... 그때부터 다시 쌀국수로 힐링을 찾게 되었다. 문을 열자마자 환한 얼굴로 우리를 반겨주는 사장님이, 진짜 베트남 사람인 것을 보고 나서 드는 생각. 드디어 찾았다!


 서울의 오래되고 작은 동네에서, 마치 베트남의 현지 가게에 와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들... 그리고 시종일관 아이같이 해맑은 웃음을 지으시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손수 음식을 서빙하시고, 실없는(?) 농담까지 할 줄 아시는 한국화 되신 사장님. 쌀국수 맛은? 두말할 것 없다. 베트남 전통 음식을 베트남 사람이 못 만들면 누가 만들랴. 갈 때마다 시키는 기본 쌀국수 '포다이'는 한국의 쌀국수 프랜차이즈와는 다른 뭔가가 느껴진다. 일단 국물의 깊이가 느껴지고, 소고기는 80%만 익히는데 그것 또한 매력이고('포찐'은 완전히 익힘), 쌀면은 약간 넓적한데 쫄깃하다. 송송 썬 파와 풍미를 더하는 양파, 약간 쪄서 나오는 숙주, 앙증맞은 레몬까지 환상의 조합이다. 가게 이름인 '아라기'는 베트남어로 '먹으면 중독되는 맛'이라는데...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걸려들었다. (작년엔가 '아라기' 생일이라고 서비스로 주신 연유 커피 때문은 아니고요^^)


(왼쪽부터) 포다이, 오믈렛 반미, 분팃느엉

'포다이' 다음으로 맛있는 건 '분팃느엉'이라는 비빔 쌀국수. 이것도 진짜 짱맛이다. 돼지고기와 짜조, 그리고 각종 야채를 면 위에 올려주는데 함께 나온 피시소스를 비벼서 먹는다. 먹다 보면 줄어드는 게 아까울 정도의 맛이라면 설명이 되려나. 그리고 '반미' 샌드위치도 별미. 빅데이터 공부한다고 대학원 다니던 아는 동생이 여기 '반미'를 아침마다 도시락처럼 싸서 다니며, 그 어렵고 깐깐한 논문 심사를 통과하고 웃으며 졸업했다는 후문. 아무튼.



이 글을 쓰려고 아까 저녁에 퇴근 후 '아라기'에 들러서 포다이를 먹고, 베트남 사장님의 순수한 미소에, 해선장을 한 숟가락 반 국물에 넣어 먹으면 더 맛있다는 친절한 설명을 들으며 생각했다. 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오래오래 살아야지. 쌀국수 맛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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