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타치는 권작가 Dec 19. 2023

거짓말 보태서 때밀이 빼고 다 해봤어

20대 때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깃집, 호프집, 전단지 배포, 인형탈 쓰고 홍보, 소주 제조 공장, 피자 배달, 가방 판매, 구두 판매, 착즙기 조립, 주차관리, 세차장, 컴퓨터 부품 검사, 호텔 연회식 등 10여 가지 이상의 알바를 했다. 여러 일을 해보고 싶었다. 또한 뭐든 해보면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보일 거라 믿었다. 


20살, 고깃집에서의 첫 아르바이트

나의 첫 알바는 고깃집이었다. 동네 골목에 있는 작은 음식점이었다. 사장님은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이모님이었다. 까탈스러운 인상이었다. 대화를 해보니 인상만큼이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듯했다. 


나의 업무는 서빙이었다. 먼저 일하고 있는 동갑내기 알바생 A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일을 배웠다. 기본적인 상차림부터 고기, 채소, 음료 등등을 나르는 일까지 차근차근 배웠다. 어려운 건 없었다. 다만 힘든 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불판 닦기였다. 검게 탄 불판은 뜨거운 양잿물에 담가 불린 후 수세미로 닦아냈는데 양잿물 냄새가 얼마나 역한지 헛구역질이 나왔다. 불판을 많이 닦은 날이면 머리가 어지러워 집으로 가는 내내 세상이 빙빙 도는 듯했다. 말로만 듣던 양잿물이 이렇게 역겨운 건지 그때 알았다.


사장은 힘들고 어려운 일 대부분을 나에게 시켰다. 무거운 걸 드는 일도 나에게 말했다. 알바생 A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사장은 나에게 말했다. "무거운 거 들고 하는 건 니가 해야지. 이런 거 하라고 남자 뽑은 거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그게 남녀차별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쨌든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있으니까 말이다. 시키는 대로 묵묵히 일했다.  


사장은 가끔씩 일을 거들 뿐 대부분의 시간을 식당 안에 있는 작은 방에서 티브이를 보며 보냈다. 항상 화나 있는 듯한 인상 때문인지 방 문을 열고 나오는 사장을 볼 때면 긴장이 됐다. 사장 아들도 종종 일을 거들었다. 20대 초반쯤 돼보였다. 학교를 다니는 건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 식당에 나타나 잡일을 했다. 사장이 말하기를 자기 아들은 효자라 했다. "우리 아들은 자다가도 내가 슈퍼 가서 뭐 사오라고 하면 벌떡 일어나 갔다 오는 그런 아들이다. 완전 효자다, 효자."라며 우리에게 말하곤 했다. 자식 농사 잘 지었다고 자랑하는 건지 아니면 나보고도 그런 아들이 돼라는 건지 의아했는데 전자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장 아들이 내 눈에는 겉으로 보나 성격으로 별 볼 일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고슴도치가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한다 하니 그런 가보다 했다.


손님이 그렇게 많은 식당이 아니라 처음엔 한적하게 일했다. 그러다 갈수록 손님이 늘어 아르바이트생을 1명 더 뽑았다. 공교롭게도 새 알바생 B 역시 우리와 동갑이었다. 우리 셋은 서로 도와 가며 재밌게 일했다. 일이 한산할 땐 이런저런 잡담을 하기도 했고 가끔은 사장 몰래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키득키득거리기도 했다.


그런 우리가 사장은 점점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처음엔 일 잘하더니 3명 모이니까 일 똑바로 안 하고 떠들고 논다며 한 번씩 혼을 냈다. 우리 중 특히 B를 싫어했다. 하루는 B가 잘못을 했는지 사장이 엄청 혼을 냈다. 사장은 이때다 싶었는지 그 자리에서 B를 잘랐다. 일이 끝난 후 B는 씩씩거리며 우리에게 상황을 이야기억울하다는 듯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됐다. 차라리 잘 됐지 뭐. 그지 같은 인간 안 봐서 좋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B와는 그렇게 헤어졌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다음 타자는 나였다.


5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손님이 식사 중이었다. 한창 먹고 마시던 중 파재래기를 더 갖다 달라고 했다. 그릇에 담아주었다. 몇 분 뒤 또 달라고 했다. 파재래기가 담긴 그릇을 들고 테이블로 갔다. 원래는 집게로 집어서 손님 그릇에 담아주는데 양이 많지 않았다. 집을  얼마 없어 그릇 채로 손님 그릇에다가 부어줬다. 내 행동을 보던 아저씨는 나를 스윽 하고 올려다봤다. 술에 취했는지 눈을 꿈뻑꿈뻑 하더니 "이걸 지금 내고 쳐 먹으란 말이가? 어!?" 하고 고함을 쳤다. 억울했다. 그런 의도 아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저씨의 고성방가에 방 안에 있던 사장이 뛰쳐나왔다. 자초지종을 듣고는 나 대신 손님에게 사과했다. 손님이 식당을 나가고 난 후 갑자기 눈물이 났다. 왜 눈물이 났는진 모르겠다. 그냥 서러웠다.


다음날이었다. 출근했더니 사장이 어제 있었던 일을 꺼냈다. 파재래기를 그렇게 부어주는 건 쳐 먹으라는 말이랑 다름 없는 행동이라면서 이제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일한 지 3달 만에 첫 아르바이트를 그렇게 잘렸다.



피자 배달

해본 일 중 재밌으면서도 그만큼 위험했던 일 피자 배달이 아니었나 싶다. 오토바이를 타고 마음껏 달릴 수 있어 재밌었지만 오토바이 특성상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6개월 정도 일하면서 두 번의 사고가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 두 번이 하루에 다 일어났다. 배달 갈 때 넘어지고 돌아올 때 넘어진 것이다. 


비 오는 날이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중 갑자기 오토바이가 기울어지면서 그대로 넘어졌다. 맨홀 뚜껑 위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일어나려 하는데 한 쪽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오토바이에 순간적으로 깔린 듯했다. 그래도 좁은 길목이라 저속으로 주행해서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다행히 마주오는 차도 없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일어나 먼저 오토바이를 갓길에 세웠다. '아차, 피자..' 정신을 차린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오토바이도 내 몸뚱아리도 아닌 피자였다. 상자를 열어 상태를 확인했다. 제대로 고꾸라져 있었다. 이걸 어떡해야 하나 고민했다. 일단 배달을 하기로 했다. 한 네일숍이었다.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장님에게 내가 말했다.


"제가 금방 여기 앞에서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넘어져서 피자가 엉망이 됐는데요. 한번 보시고 상태가 너무 안 좋다 하시면 새걸로 다시 배달해 드릴게요."  


사장님은 피자는 쳐다도 보지 않고 내 몸 상태부터 살피며 말했다.


"아니에요. 피자는 상관없어요. 몸 괜찮으세요? 많이 다치신 거 아니에요?"


나는 일단 피자부터 확인해 보라며 굳이 상자를 열어 확인시켜줬다. 사장님은 피자를 대충 보고는 그냥 먹으면 되니 괜찮다고 했다. 피자를 새로 갖다 달라고 하면 가게 들어가서 혼날까 봐 걱정했는데 괜찮다고 해서 정말 고마웠다. 내 무릎에 피가 나고 있었는지 사장님은 피 닦고 밴드라도 붙이고 가라며 내게 휴지와 밴드를 건넸다.  자리에서 밴드를 붙이고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네일숍을 나왔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가게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조심히 운전해서 가는데 또 넘어졌다. 앞에서 달리던 차가 급정거를 했고 나도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그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연이어 두 번을 넘어지니 온몸이 더 쑤시고 아팠다. 그래도 앞차와와 충돌은 피해서 다행이었다. 내 몸도 몸이지만 오토바이 여기저기가 많이 깨져 있었다. 사장님에게 한 소리 들어야 했다.


피자배달 할 때를 떠올리면 화나고 서러운 마음에 엉엉 울었던 날이 한 번씩 생각나곤 한다. 비가 오는 밤이었다. 마감시간이 다 되어가던 늦은 밤에 배달 주문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이 나보고 이것 하나만 갔다 오라고 해서 오토바이를 타고 출발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한 성인오락실이었다. 자욱한 담배연기를 헤치고 안쪽 카운터로 갔다. 사장님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피자를 주고 결제를 했다. 인사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옆에 아들로 보이는, 20대 초반쯤 돼보이는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피자 이거 와 이래 작노?" 하고 말했다. 못 들은 척하고 오락실을 나왔다.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님이 금방 만든 피자를 나에게 건네주며 "방금 갔던 곳에 한 번 더 가야겠는데.." 하며 말 끝을 흐렸다. 양이 적어 추가로 주문했구나 싶어 다시 오락실로 갔다. 도착해서 사장에게 피자를 건네고 나왔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앞에서 어떤 남자가 날보며 담배를 끼우고 있는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며 자기한테 오라는 시늉을 했다. 그냥 모른 체하고 가면 될걸 난 또 순진하게 그 남자 앞으로 갔다. 피자가 왜 이렇게 작냐며 짜증을 냈던 사장 아들이었다. 다짜고짜 나한테 욕을 하며 소리를 쳤다.


"아, 씨x  피자가 작으면 작다고 미리 말해야지. 누구 쳐묵으라고 이래 x만한 걸 보냈습니까? 예?!"


너무 놀랐다. 당황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뭐라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아버지가 조폭이라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동생이었지만 괜히 잘못 건들면 안 될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옆에는 친구로 보이는 남자가 같이 서 있어 더욱 기가 죽었다. 마구 짜증을 쏟아내더니 "배달 다 했으면 빨리 가야지, 안 가고 뭐합니까?" 하며 조롱하듯 말했다.


가게로 가서 오토바이를 넣고 뒷정리를 한 후 바로 집으로 갔다. 너무 분하고 화나고 서러운 마음에 방에 들어가 혼자 엉엉 울었다. 형도 아니고 나보다 동생인 사람에게 말대꾸 한번 못하고 욕을 먹은, 초라한 내 자신이 미웠다. 지금이야 길 가다가 누가 꼬나보든 욕을 하든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그때는 아직 중2병 때가 다 빠지지 않은 23살 언저리의 나였다. 불 꺼진 방에서 한참을 울었다. 외출 나갔던 누나가 들어왔다. 날 보더니 왜 우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누나가 말했다.


"누나도 그런 적 있었다. 학교에 자기 아빠가 조폭이라고 소문난 애가 있었는데 걔가 내한테 이유없이 욕하고 할 때 나도 진짜 서럽고 화가 나더라고.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별것 아니더라. 그러니까 괜찮다."


똑같은 경험을 해봤다는 누나의 말이 조금은 위로가 됐다. 지금은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일에 왜 그렇게 혼자 분개하며 눈물 쏟았나 싶지만 그땐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철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호텔 연회식 알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은 아르바이트도 있다. 호텔 연회식 알바였다. 하루만 하는 단기아르바이트 모집을 보고 신청했다. 부산에 있는 한 호텔에 갔다.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을 만났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며 탈의실로 안내했다. 정장을 줬다. 입고 보니 옷이 너무 컸다. 특히 자켓이 많이 헐렁했다. 어린 아이가 아빠 옷을 입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작고 마른 내가 유난히 더 초라해보여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매니저를 따라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나처럼 정장을 입고 있는 알바생 열댓 명이 더 있었다. 다들 나처럼 혼자 온 듯 보였다. 서로 인사도 없이 주뼛주뼛해 했다. 매니저가 다가와 업무를 알려줬다. 하객들이 식사를 마친 자리를 치우면 된다고 했다. 간단했다.


몇 분 뒤 사람들이 들어와 식사를 시작했고 우리는 각자 흩어져 대기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일어나자마자 자리를 정리했다. 테이블을 닦은 후 위에 있는 쓰레기, 수저, 음식물, 접시 등을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남은 음식물은 음식물 쓰레기통에, 수저와 접시는 한쪽에 쌓아뒀다. 


처음엔 순조롭게 진행되더니 하객들이 많아지면서 치워야 할 것들도 점점 늘어났다. 그러다 나중에는 하객들이 먹고 남은 음식과 식기류를 든 알바생들이 주방 앞에 줄지어 서있는 형국이 되었다. 뒤에 서 있던 나는 '빨리 정리하고 나오면 되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린담?' 하고 생각하며 주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되어 주방에 들어가서야 오래 걸린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치운 접시 위에는 음식물뿐만 아니라 휴지, 물티슈, 물티슈 포장지 등도 같이 뒤섞여 있었는데 음식물 사이에 있는 쓰레기를 젓가락으로 골라내서 버리다 보니 시간이 지체됐던 것이다. 계속 이렇게 하다간 정리도 안 되고 테이블은 테이블대로 못 치워서 하객들이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주방 안에 있던 나는 두 팔을 걷어붙였다. 그러곤 다른 알바생들이 들고 들어온 접시를 받아 들어 맨손으로 음식물 속 쓰레기를 집어내기 시작했다. 음식물도 손으로 깡그리 다 잡아 치웠다. 접시에 들러붙은 음식물도 손으로 싹싹 긁어냈다. 줄 서 있던 알바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하나같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 돈 더 주는 것도 아닌데?', '저거 완전 미친놈 아니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쓰레기와 음식물을 분류하고 수저와 접시를 쌓아나갔다. 막힌 고속도로가 뚫린 듯 주방 안 알바생들의 대열도 금세 뚫렸다. 속이 시원했다.


결과적으로 돈을 더 받은 것도 아니고 칭찬 한 마디 들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다. 사명감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매번 그런 건 아니. 내가 나서서 해결하고 싶은 때가 있다. 이후의 여러 일터에서도 그랬고 지금의 직장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주인 의식, 사장 마인드 같은 거라고나 할까? 포장해서 말하면 그렇다. 누군가에겐 오지랖일 수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자세라 생각한다. 누군가 그랬다. 언젠가 할일이면 지금 하고 누군가 할일이면 내가 하라고 말이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문턱을 넘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땐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일을 시도해볼 수 있었는지 스스로가 대견하다. 가끔씩 20대 때의 내가 떠오른다. 밖에서도 과거의 내가 보인다. 길거리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 사람을 볼 때도, 식당에서 서빙하는 사람을 볼 때도, 추운 날 공사장에서 무거운 자재를 어깨에 짊어지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도 어린 20대의 내가 생각난다. 그러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래,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심하게 고생을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기특하다. 그때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단단해진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일 테니까 말이다.


이전 04화 공사장에서 숙식까지? 막노동꾼 다 됐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