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타치는 권작가 Dec 05. 2023

엄마의 눈물을 뒤로한 채 공사판으로 떠났다

오랜만에 아는 형 B와 연락이 닿았다. 서로 안부를 물었다.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B 자신도 일용직 중이라며 나보고 같이 일하러 가자고 했다. 마침 같이 일하던 친구가 직장을 구해 떠나는 바람에 혼자라 심심했는데 잘 됐다 싶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집 거리가 멀었다. 그때 난 부산에 살았고 형은 김해에 살았다. 어디서 볼지 상의했다. 부산보다는 김해에 있는 인력사무소에 가는 게 일을 구하기가 더 수월할 것 같았다. 형 B가 알고 있는 사무소가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버스와 경전철을 타고 김해로 갔다. 형을 만나 인력사무소로 갔다. 인력사무소도 여러 곳을 전전하다 보니 새로운 곳에 가는 게 그리 낯설지가 않았다.  


형은 공사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많은 듯했다. 확실히 나보다 아는 게 많았다. 일하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물으며 배웠다. 의지할 수 있어 좋았다.


일주일 정도 같이 일했다. 앞으로 며칠 더 같이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부산과 김해를 오가긴 힘들었다. 형이 나한테 제안했다.


"왔다갔다 하기 힘드니깐 당분간 우리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일 다닐래?"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른 좋은 일도 아니고 노가다 하는 게 뭐가 좋다고 그렇게 남의 집에 같이 살면서까지 막노동을 했나 싶다.



부모님께는 당분간 아는 형 집에서 같이 살면서 일하겠다고 말씀드리고 짐을 싸서 형 집으로 갔다. 25평 정도 되는 빌라였다. 작은 방을 내어줬다. 그날 저녁 같이 식탁에서 맥주 한 잔 했다.


"자, 내일부터 파이팅 해보자!"


우리가 함께 한 첫 일터는 D건설사의 건설현장이었다. 부지가 넓은 곳이었다. 이렇게 규모가 큰 공사현장은 처음이었다. 현장에는 수십 명의 인부가 있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낯설었지만 형과 함께 했기에 괜찮았다. 그간 혼자서 일용직을 한 경험도 있었고 하니 말이다.


처음에 업무파트를 나눌 때가 생각난다. 사람이 많아 파트별로 일을 배정해줬다. 해야할 파트별 업무에 대해 설명해줘도 다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한 가지 귀에 꽂히는 일이 있었다. 바로 신호수였다. 공사장 내에서 빨간색 경광봉을 들며 차량을 통제하는 일이었는데 편할 것 같았다. 나를 시켜줬으면 하고 마음 속으로 바랐다. '제발, 날 뽑아라. 날 뽑아라. 제발..' 나의 바람과 달리 30대 중반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신호수로 당첨됐다. 아쉬웠다. 하지만 신호수로 뽑히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데는 채 하루가 걸리지 않았다.


휴식을 할 때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쉬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신호수 청년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말이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가 한여름이었기 때문이다. 땡볕 아래서 계속 서있었으니 많이 힘들었나보다. 계속 움직이며 뭐라도 하면 시간이라도 잘 갈 텐데 가만히 서서 경광봉만 흔들고 지루해서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쉴 때마다 신호수 청년은 세상 고통은 자신이 다 짊어진 듯 격하게 호흡을 하며 누워있었다. 다른 어른들은 그 청년을 보며 "아이고, 날도 더운데 고생이네." 하며 안타까워했다. '저렇게까지 숨을 헐떡일 정도로 힘이 드는가? 너무 오버하는 거 아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내가 겪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신호수 청년을 보면서 느낀 게 있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됐다고 해서 반드시 나중에도 좋은 것은 아니며 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안 좋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엔 내가 신호수를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지만 신호수 청년이 고생하는 걸 보며 내가 신호수가 되지 않은 게 잘된 일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먼지 마셔가며 무거운 자재를 옮기는 일도 쉽지는 않았지만 날씨뿐만 아니라 시간과의 싸움까지도 해야했던 신호수보다는 나았다.



며칠동안 이곳 D건설사의 현장에 계속 투입됐다. 특별히 힘든 건 없었다. 공구 가져오라면 가져갔고 자재를 옮기라면 옮겼다. 크게 꾸짖는 사람도 없었다. 아침에 일 시작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갈지, 점심 때가 다 되면 식사 메뉴는 뭘까 생각하며 보통의 직장인처럼 지냈다. 나중에는 형의 친구가 합류해서 셋이서 일했다. 일하다가 공사판 한 쪽에 쭈그려 쉬면서 오늘은 힘이 드니 마니, 일 마치고 뭐 할 거니 하면서 시시껄렁한 얘기 나누며 매일을 보냈다.


일당은 7만 원이었다. 일용직 노동자 중에는 그날 받은 일당을 술값으로 써버리는 등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난 그러지 않았다. 돈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외식 한번 하지 않고 방 서랍장 구석에 차곡차곡 모았다.


그렇게 일한 지 한 달쯤 됐을 때였다. 형이 말했다. 윗지방에 사는 지인이 있는데 그가 일하고 있는 건설현장에서 한 달 정도 사람을 구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나보고 같이 갈 생각이 있냐 물었다. 충청도 어디에 있는 건설현장이라 했다. 주변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잠은 공사장 막사에서 자야 한단다. 허름한 여관방도 아니고 공사장 막사에서 자면서까지 일할 게 뭐 있냐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그땐 무슨 생각이었는지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짐을 싸기 위해 부산 본가에 갔다. 어머니께 당분간 더 먼 곳에 가서 일을 할 거라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 얼굴 못 봐서 어쩌냐며 아쉬워 하더니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며 울먹거렸다. 사실 그 당시 어머니가 좀 힘들어했다. 그때가 김해를 떠나 부산으로 이사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20년 동안 살면서 정이 많이 든 동네를 떠나니 외롭고 울적하다며, 내가 형 집에 있는 동안에도 전화로 몇 번씩이나 하소연하곤 했다. 생애 첫 내집 마련을 한 그곳 김해에서 평생 살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타지에서 적응하며 사는 게 쉽지 않은 듯했다. 그러다 내가 먼 곳으로 떠나기 전날에 갑자기 감정이 터졌나보다. 이해가 됐다. 당시엔 친누나도 외국에서 공부중이라 집에 없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계시긴 했지만 워낙에 무뚝뚝한 성격이라 어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주지 못했던 모양이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머니를 보니 집을 떠나 먼 곳으로 일하러 가는 게 편치 않았다. 어디 몇 년을 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신경이 쓰였다. 위로를 건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다. 나는 떠나야 했다. 뭔 대단한 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고작 막노동이라는, 남들 보기에 별볼 일 없는 일을 하러 가는 거였지만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다. 내 생계부터가 막막했다. 먹고살 궁리에 엄마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 한 채 마음을 다잡고 집을 나왔다. 그러곤 형과 함께 충청도의 어느 한 건설현장으로 떠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