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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Nov 21. 2023

하루 16시간 근무, 이게 사람이 할 짓이야?

나의 사회생활 첫 신고식

나의 첫 직장은 경남 김해에 있는 회사 P였다. 주 업무는 세탁기에 들어가는 부품을 가공, 조립, 검사하는 일이었다, 가공 파트는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이 24시간 교대 근무했다. 조립 및 검사 파트는 대부분 40, 50대 이모들이었다. 내가 맡은 업무는 품질관리를 하는 QC(Quality Control)였다. 세탁기에 보면 화면이 나오고 버튼을 누르는 디스플레이가 있는데 그 조립체의 작동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조립된 디스플레이가 내 앞에 오면 그 조립체를 들어 버튼은 잘 눌러지는지 화면엔 이상이 없는지 겉면에 흠집은 없는지 등을 검사했다. 



이모들이 많아 편안한 분위기였다. 처음엔 일이 재밌었다. 매일 5시 30분에 정시퇴근했다. 그러다 점점 일이 많아져 야근을 해야 했다. 퇴근 시간은 늦어졌다. 2시간 하던 잔업이 3시간이 되고 4시간이 됐다. 어느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늘어났다. 8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9시, 10시에 마치는 일이 일상이 됐다. 11시까지 일하는 날도 허다했다. 집에 오면 밤 12시가 되었다. 씻고 누우면 새벽 1시였다. 너무 피곤해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잠만 자고 바로 일어나 다시 출근했다. 


매일 야근을 해도 물량을 다 쳐내지 못할 때는 1시간 조기출근해서 7시부터 일을 시작했다. 그래도 안 될 땐 중식잔업이라고 해서 1시간인 점심시간을 나눠 30분은 밥 먹고 30분은 일했다. 회사 내에서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주말이라도 쉬었으면 다행이다. 토, 일요일도 쉬지 못하고 출근해야 했다. 한 달에 하루도 못 쉰 달도 있었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하루가 1년 같았다. 출근해서 공장에 들어가면 과연 오늘은 몇 시에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게 퇴근 시간을 몰랐다. 언제 마치는지 안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면 언제 마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날 생산량에 따라 퇴근 시간이 정해진다. 보통 30분이나 1시간 전에 결정난다. 그러니 출근하면 다들 똑같은 소리를 한다. “아, 오늘은 몇 시에 마치려나..” 감옥이 따로 없었다. 


피곤했던 건 통근차를 운전하는 이모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퇴근하는지를 알아야 이모도 미리 시간 계산을 해서 우리를 데리러 회사에 올 텐데 퇴근 시간을 모르니 항시 대기해야 했다.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 초저녁부터 밤 늦게까지 손에서 폰을 놓지 못했다. 목욕탕을 갈 때조차 지퍼백에 휴대폰을 넣어 들어갔다고 하니 말 다했다. 



일이 많을 때 직장에서 머무는 시간은 평균 14시간, 최고 16시간이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보통의 직장인의 경우 일하는 중간에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등 적절히 쉬며 일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달랐다.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2시간 일하고 10분 쉬었다. 쉬는 시간 외엔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컨베이어 벨트 위로 제품이 내려온다. 내 자리에 일은 내가 해야 한다. 벨트가 움직이는 이상 나도 움직여야 했다. 내 몸 역시 기계나 다름없었다. 


얼마나 일만 하며 살았던지 당시 가장 많이 받았던 월급이 230만 원이었다. 2023년인 지금 5년, 10년 일해도 250만 원 언저리로 급여를 받는 직장인도 제법 있는데 당시 시급이 약 3,500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230만 원은 제법 큰 액수였다. 더군다나 내 나이 24살이었으니 당시 나에겐 큰 돈이었다. 그렇게 벌면 뭐 하나. 쓸 시간도 없는데. 


잦은 야근과 특근으로 인해 이러다 곧 쓰러지겠다 싶은 순간을 수없이 겪었다. 한 번은 퇴근 후 집에 왔는데 너무 피곤해 씻을 기력조차 없었다. 침대 위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댔다. 몇 분이 지났을까. 밖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앉은 상태 그대로 잠이 들어 아침까지 잔 것이었다. 사람이 피곤하면 이렇게도 잘 수 있구나 싶었다. 


피로가 쌓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몸이 버티지 못했다. 몸살이 나서 연차를 쓰겠다고 하면 계장이 노발대발했다.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한 번은 통근차를 타고 출근하는데 그날따라 뭘 잘못 먹은 건지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가 아프고 위장이 울렁거렸다. 구토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통근차를 운전하는 이모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차에서 내렸다. 공장단지밖에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근처 풀밭에 고대로 꼬꾸라졌다. 창피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 상태로 누워 잠이 들었다. 


갑자기 누가 깨웠다. 젊은 남자였다. “행님, 행님!” 하며 나를 불렀다. 직장 동생이었다. 출근길에 운전하다가 나를 본 모양이었다. 꽤나 놀랐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자신의 직장 선배였으니 말이다. 속이 안 좋아 그러니 먼저 가라고 했다. 그러곤 한두 시간을 더 누워있었던 것 같다. 눈 뜨자마자 계장에게 전화를 했다. 욕을 한바가지 먹었다. 차가 다니는 곳까지 걸어 나가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제정신이 아닌 날이었다. 



쉬지 못하고 일하니 직원들 모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조금만 건드리면 터질 듯한 분위기였다. 실제로 고성방가가 자주 오갔다. 특히 남자들이 그랬다. 일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욕도 했다. 누군가는 제품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맨바닥에 패대기치기도 했다. 서로 싸우기도 했다. 멱살을 잡고 같이 먼지 가득한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먹이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애, 어른 할 것 없었다. 부처님, 하느님이 와도 구제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속 시끄러운 날이면 이모들은 20대인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이 든 우리 이모들은 바보라서 군말없이 여기서 일하는 거니까 똑똑한 너네들은 하루 빨리 여기서 나가서 살길 찾아!"  


너일을 그만두는 사람이 생겨났다. 회사에서 새로 사람을 구했다. 처음엔 새 직원이 들어오더니 언젠가부터 신입의 발길이 끊겼다. 있는 사람도 나갈 판인데 새로 온 사람이 버틸 리 없었다. 동네에서 일 많은 회사로 소문이 났다. 있는 사람만 죽을 맛이었다. 



어떻게든 시간은 흘렀다. 일한 지 3년 6개월에 접어들었을 때쯤 집을 이사하게 되면서 회사를 그만뒀다. P에서 첫 직장 생활을 함으로써 사회생활의 첫 신고식을 제대로 치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내가 그렇게나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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