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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타치는 권작가 Nov 28. 2023

20대 청년의 막노동 도전기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가 며칠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일주일 뒤 초췌한 모습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들었다.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했는데 과하게 이용한 탓에 폰 요금이 100만 원이 청구됐다고 했다.(폴더폰을 쓰던 그 시절에는 인터넷 이용 요금이 상당히 비쌌다.)


부모님께 말할 수가 없어 며칠동안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봤던 공사장 막일을 친구가 했다고 하니 신기했다. 막노동은 어디에 가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지 이것저것 물었다. 소 노가다라고 일컫는 막노동이라는 세상에 대해 알게 된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내가 막노동판을 전전하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20대 시절 다양한 업종에서 일다. 내가 경험한 일들을 다 열거하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우와, 별 걸 다해봤네." 하고 놀란다. 장래희망이 없었다. 직업선택의 폭이 넓다는 이유로 경영학과에 진학했지만 별볼일 없었다. 진로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아무 일이나 해보기로 했다. 뭐든 해보면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보일 거라 생각했다. 업종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여러 일을 해보기 위해 자주 이직했다. 이직 중간중간에 한 것이 바로 공사장 막일이었다. 놀면서 직장을 구하는 것보다 짧게나마 일하며 용돈을 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막노동을 하기로 한 첫날이었다. 새벽 5시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더러워져도 괜찮을 만한 허름한 옷을 입고 집을 나섰다. 과연 일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긴장됐다. 인력사무소에 도착했다. 사무소 앞에는 일을 구하러 온 아저씨들로 바글바글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사무소 안으로 들어서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딜 들어 와!?' 하는 듯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나를 쳐다봤다. 주눅이 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때 나는 키 169cm에 몸무게는 60kg이 조금 안 되는 마른 체격이었으니까.

  

"일 구하러 왔는데요."

떨리는 목소리로 소장님에게 말했다.


"기다리세요."

나를 본체만체한 소장님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무소 앞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아 뻘쭘하게 서있었다. 사무소 앞으로 승합차가 도착했다. 소장님이 호명한 사람들이 차에 탔다. 수시로 승합차가 왔고 사람들을 태워갔다. 어느덧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남았다. 소장님 다음에 다시 오라고 했다. 사무소를 나와 집으로 갔다.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몰려왔다. 첫날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다음날 다시 가보려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40, 50대 아저씨들 사이에 20대인 내가 끼어 있으려니 위축이 됐다. 일을 달라고 큰소리 낼 자신도 없었다. 내가 소장이라도 나처럼 작고 마른 사람에게 일을 맡길 것 같진 않았다. 고민하던 찰나에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뭐하냐? 나 노가다 뛸려고 하는데 같이 래?" 


같이 가면 덜 부끄러울 것 같았다. 함께 하기로 했다. 새벽 일찍 친구를 만나 인력사무소로 갔다. 눈도장을 찍고자 소장님께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대기했다. 한 명, 두 명씩 사람들이 차를 타고 떠났다. 우리만 남았다. 결국 그날도 허탕쳤다. 혼자가 아닌 둘이라 좀 나았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날 또 갔다. 소장님은 계속 찾아오는 우리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일손이 모자랐는지 우리를 불렀다.


"잘 할 수 있겠어요? 둘 다 빼짝 말라가지고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요?"

친구도 나도 둘 다 작고 말랐으니 소장님이 미심쩍어 할 만했다.


"할 수 있습니다!"

낮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몇 분 뒤 사무소 앞에 승합차가 도착했다. 소장님이 우리 보고 차에 타라고 했다. 드디어 성공! 기마음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짐짝처럼 실려 어디론가 떠났다. 나의 막노동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소장님과 안면을 튼 이후부터는 고정으로 일을 얻을 수 있었다. 인력사무소에 가면 그날 어디에서 일하는지 바로 알 수 없다. 승합차를 타고 목적지에 도착해봐야 안다. 차에 탑승한 후 꾸벅꾸벅 졸다 보면 어느새 일터에 도착해 있곤 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 얼마나 긴장이 됐는지 모른다. 건설현장에서 일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심적으로 부담이 컸다.


예상대로였다. 가는 공사판마다 욕을 먹었다. 일하는 방법이나 순서는커녕 기본적인 자재나 공구 이름도 몰랐다. 시키는 대로 잘하자 마음먹었지만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유난히 욕을 많이 먹었던 현장이 생각난다. 바다가 보이는 거제도의 한 공사판이었다. 작업 반장에게 인사했다. 걸걸한 목소리에 험악한 인상이었다. 관상은 과학이라고? 인상도 과학이었다. 반장은 인상 만큼이나 성격이 더러웠다. 내가 일을 잘 하지 못하는 걸 보고는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다. 한 번 말한 걸 제대로 못 알아 들을 때도 화를 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했던가. 점심시간에 밥 먹는 것도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반장 눈이라도 마주칠까 무서워 밥그릇에 코를 박고 먹었다. 점심식사 후 오후 업무 때도 반장의 욕 릴레이는 이어졌다. 그날은 결국 종일 욕만 먹다가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받은 돈은 일당이 아니라 욕값이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시원한 바닷가와 달리 내 마음은 죽상인 하루였다.



그늘 하나 없는 고속도로 건설 현장

한 번은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팔려간(?) 적이 있었다. 건물을 짓는 공사장과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했다. 고속도로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는 약 1m 높이의 시멘트 담벼락이 있었는데 벽에 시멘트가 떨어져 나간 곳을 메우는 일을 맡았다. 할 만했다. 힘든 게 없었다. 혼을 내는 사람도 없었다. 구멍을 찾아 다니며 물과 잘 섞어 만든 시멘트를 바르기만 하면 됐다. 쉬운 일이 걸렸다는 생각에 흥얼거리며 일했다.


반전은 점심시간 이후에 일어났다. 오후가 되니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 땀을 뻘뻘 흘렸다. 그늘을 찾았다. 허허벌판이었다. 그곳엔 그늘이 하나도 없다는 걸 그때 인지했다. 죽을 맛이었다. 남은 몇 시간을 이 더위 속에서 어떻게 버티지 하는 생각 뿐이었다. 어떻게든 버텨냈고 일은 끝났다. 일이 편해서 좋았지만 또 가고 싶지는 않았다.  



석면 만지다 가려워서 기절할 뻔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은 따로 있었다. 그날은 공사장이 아닌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간 날이었다. 김해에 있는 한 소기업이었다. 어떤 제품 안에 충전재를 채우는 일을 맡았다. 되게 쉬웠다. 일을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손과 팔이 조금씩 근질거렸다. 아침에 뭘 잘못 먹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러다 퇴근할 때쯤 되니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미친 듯이 가렵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같이 일했던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석면 때문이라 했다. 그랬다. 내가 손으로 만졌던 충전재가 바로 석면이었던 것이다. 석면이 이렇게 인체에 해롭다는 걸 처음 알았다.


참아서 될 가려움이 아니었다. 가만히 뒀다간 한숨도 못 잘 것 같았다. 퇴근하자마자 피부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을 복용하고 나니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다음날도 평소처럼 새벽 일찍 인력사무소에 가서 승합차를 탄 후 일터로 출발했다. 오늘은 어디에 갈려나 하고 창밖을 보는데 길이 익숙했다. 설마했다. 도착하고 보니 전날에 석면 만지는 일을 했던 그 공장이었다. 한숨과 함께 절규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마냥 울상을 지으며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하기 싫은 건 나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대여섯명의 일용직 아저씨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똥씹은 표정을 하며 서있었다. 무리 중 한 아저씨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이 씨 진짜! 석면 만지는 이 일을 또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내 심정을 대변해 대신 소리를 질러주니 내 속이 다 시원했다. 단체로 못하겠다 하면 혹 다른 일을 시키진 않을까 내심 기대하던 찰나 갑자기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고성방가를 한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아저씨가 지른 소리만큼이나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일 하러 왔으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예?!! 하기 싫으면 집에 가이소!!!"


아저씨는 "에이 시팔" 하고 욕을 하고는 그대로 공장을 나가버렸다. 나도 아저씨를 따라 대차게 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너무 외진 곳이라 버스를 타고 집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택시를 타고 가려니 택시비 역시 만만치 않을 듯했다. 힘들게 일어나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순 없었다. 이왕 이렇게 출근한 거 어떻게든 하루를 버텨 일당을 받아가야 했다. 


일을 시작했다. 팔토시를 끼고 점퍼소매를 손목 끝까지 내렸다. 장갑도 2개 꼈다. 소용이 없었다. 일하는 내내 몸이 가렵고 따끔거렸다. 결국 그날 밤 가려움이 더 심해져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틀 동안 일해서 받은 일당의 기쁨보다 가려움 때문에 잠을 설친 괴로움이 더 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일을 쉴걸 그랬다. 다음 날 소장님에게 다른 곳으로 바꿔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편한 일을 하는 운 좋은 날도

막노동이 몸을 많이 쓰고 날씨 영향도 받는 일이다 보니 힘들기는 했지만 어쩌다 쉬운 일이 걸리는 운 좋은 날도 있었다. 한번은 텅 빈 공간에 스티로폼만 가득한 현장에 간 적 있었다. 각기 다른 모양의 스티로폼이 있었는데 같은 모양끼리 끈으로 묶어 분류하면 된다고 했다. 힘들 것도 없었고 위험하거나 더러운 것도 없었다. 친구와 같이 놀면서 재밌게 일했다. 


시간이 다 되어 마무리 하려고 하는데 사장이 나오더니 스티로폼 분류가 잘못 됐다고 했다. 하노라고 했는데 잘못 됐었나 보다.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죄송하다고 하니 사장의 반응이 의외였다.

 

"괜찮습니다. 내일 다시 하면 되죠, 뭐^^ 고생하셨습니다!"


분류가 잘못 돼도 크게 상관이 없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지나치게 착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날 하루는 놀다시피 한, 그야말로 날로 먹은 하루였다.



친한 이모들과 함께 한 박스접기

일용직을 하면서 가장 재밌게 일했던 때는 휴롬 착즙기 생산 공장에서 박스접기 일을 할 때이다. 재밌었던 이유는 전에 일했던 직장 P에서 함께 일하던 이모들과 같이 일했기 때문이다. 3년 6개월을 근무했던 나의 첫 직장 P에는 대다수가 이모들이었는데 일을 그만 둔 후에도 친한 이모 두세 명과 안부를 주고받곤 했다.


하루는 한 이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뭐하냐고 묻길래 노가다 하고 있다고 말했더니 자기가 다니고 있는 공장에도 일용직 아저씨들 많이 온다고 했다. 어떤 일이냐 물어봤다. 근무환경이 괜찮은 듯했다. 나도 그리로 가겠다고 했다. 일용직 아저씨들에게 어느 인력사무소를 통해 왔는지 물어봐 달라고 했다. 김해 장유에 있는 S인력사무소라고 했다.


다음날 새벽 일찍 S인력사무소로 갔다. 일용직을 몇 번 해보고 나니 새로운 인력사무소를 찾아가는 게 어렵지 않았다. 사무소에 들어가 소장에게 말했다.

 

"여기서 휴롬 착즙기 만드는 공장으로 사람 보내준다고 하던데 저도 그쪽으로 보내주세요."


단번에 바로 휴롬 공장으로 가게 됐다. 가서 보니 P에서 같이 일했던 이모들이 서너 명은 더 있었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 편안하게 일했다. 일도 수월했다. 착즙기를 포장하는 박스를 접고 손잡이를 다는 일이었다. 적성에 맞았다. 단순노동을 좋아할 뿐더러 평소 손이 빨라 손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내려오는 제품에 맞춰 박스를 빨리 접어 올려야 했는데 후다닥 박스를 접어 올리는 나를 보며 주위 이모들이 감탄하곤 했다.


"손이 진짜 빠르네. 이 쉬운 일도 못해가지고 다른 일로 바꿔 달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총각은 참 잘하네."


지금 생각해보면 박스 빨리 접는 일이 뭐 그렇게 대단하겠냐마는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못한다는 소리 듣는 것보단 어쨌든 잘한다는 소리 들어 나쁠 건 없으니까 말이다. 그곳에서 2주 정도 일했다. 더 이상 일용직이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갈 수 없었지만 잠깐이나마 친한 이모들과 같이 일해서 좋았다. 공사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백 배는 나은 곳이었다.




일용직 특성상 보통은 여러 곳을 짧게 다닌다. 나 또한 여러 곳에서 잠깐씩 일했는데 그러다 본격적으로 막노동판에 뛰어들게 되었다. 공사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숙식을 하면서까지 말이다. 거제도 작업반장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크게 호통을 치는 사람 때문에 세상살이가 녹록지 않음을 제대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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