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시험 당일이 되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준비는 끝났다.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하고 엄마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이런 기분, 수능 이후 처음이다. 너무 긴장이 돼 시험장까지 어떻게 갔는지, 학교는 어디 였는지 또 건물 외관과 내부 모습은 어땠는지 다 기억나지 않는다.
학교 출입문에 붙어있는 수험번호를 보고 내가 시험 칠 교실을 찾아 앉았다. 앉자마자 책을 꺼내 요점만 빠르게 훑었다. 감독관이 들어왔다. 책상 위에는 필기구 제외하고 다 치웠다. 심호흡을 하며 대기했다. 그때의 그 떨림과 긴장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시험지가 분배되었다.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시험지를 펼쳤다. 시험이 시작됐다. 내 인생을 건 시험이.
과목은 국어, 국사, 전자공학, 기계공학 총 4과목이었다.(18년부터는 국사가 한국사능력시험으로 대체 되었다.) 과목당 25문제로 4과목이니 총 100문제이다. 시험 시간은 100분. OMR카드까지 작성하려면 1문제를 1분 미만으로 풀어야 한다.
문제를 풀지 않고 우선 문제 난이도 체크를 위해 4과목을 다 훑어봤다. 전반적으로 수준이 무난해 보였는데 한 과목이 문제였다. 기계공학이었다. 문제를 보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말도 안 되는 문제들이 수두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말도 안 되는 문제란 바로 계산 문제다. 기계공학을 공부할 때 계산문제는 애초에 내가 포기한 문제였다. 너무 어렵고 복잡했기 때문이다. 공식 몇 개 외워서 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실제 시험에서 기계공학 25문제 중 계산 문제가 무려 18문제나 출제되었던 것이다. 문제마다 지문이 기본 7, 8줄 이상이라 문제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당연히 손 댈 수 없었다. 지금껏 풀었던 문제집이나 학원 모의고사에서도 이런 식의 문제는 보지 못했다. 암담했다. 눈 앞이 캄캄했다.
고민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어차피 못 풀 거 붙잡고 있어봤자 시간만 허비할 것 같으니 대충 찍고 다른 과목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국 7문제만 고민해서 풀고 나머지 계산 문제 18개는 다 찍었다. 고민해서 찍은 게 아니다. 문제는 아예 보지도 않고 ORM카드에 답만 다 마킹했다. 그렇게 기계공학을 10분 만에 풀었, 아니 정리했다.
다 찍어서 몇 개나 맞을지 걱정할 여유도 없었다. 서둘러 나머지 3과목에 집중했다. 국어와 국사는 무난했다.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강의실을 뛰쳐 나가 눈물 쏟게 만들었던 전자공학도 풀 만했다.
시험 종료 5분 전에 문제를 다 풀고 OMR 마킹까지 마쳤다. 과목마다 확실하게 맞는 문제가 몇 개인지 헤아려봤다. 국어와 국사, 전자공학 다 맞힌 문제수가 과락을 면하는 10개는 넘을 것 같았다. 관건은 기계공학이었다. 온전히 운에만 맡겨야 했다. 문제를 출제한 사람은 계산 문제 다 풀 줄 알고 출제 했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답답하고 야속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시험이 끝나면 후련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허무했다. 지난 8개월간 쉼 없이 매일 바쁘게 달려오다가 갑자기 멈춰서니 뭔가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같이 시험 친 사람들은 이제 좀 쉴 수 있겠다며 좋아했는데 나는 이제 무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낼지 고민이 됐다. 허전한 마음에 당장이라도 도서관을 가야 할 것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좀 걷고 싶었다. 바로 지하철을 타지 않고 한참을 걸었다. 하늘이 유난히 파란 날이었다.
한 달 뒤 필기시험 합격자 발표가 있었다. 발표일 전날 밤 너무 긴장이 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발표 당일에는 긴장돼서 밥도 안 넘어갔다. 발표 시간이 되기 전부터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몇 번이나 새로고침하며 확인했다.
드디어 고대하던 필기 합격자 명단이 떴다. 한글 파일을 열었다. '내 수험번호가 없으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에 스크롤 바를 내릴 수 없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마우스휠을 돌렸다. 심장이 미친듯이 요동쳤다. 내 수험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빠르게 수험번호를 훑던 중 낯익은 번호가 눈에 보였다. "엇 있다, 있어!!" 끝에서 3번째에 내 수험번호가 있었다. 합격이었다. 믿기지가 않아 수험번호를 열 번 넘게 확인하고서야 합격을 실감할 수 있었다.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얼떨떨했다. 내가 어떻게 합격할 수 있었는지 나조차도 신기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 하나, '내가 합격했다는 건 기계공학이 과락을 넘겼다는 건데?' 기계공학 점수가 궁금했다. 맞힌 문제수가 10개 이상은 돼야 과락을 면한다. 다른 3과목을 다 100점 맞는다고 해도 나머지 한 과목에서 맞힌 문제수가 9개 이하이면 과락으로 불합격이다.
홈페이지에서 과목별 점수를 확인했다. 점수를 보고 나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깜짝 놀랐다. 딱 10문제를 맞혔기 때문이다. 문제를 보지도 않은 채 OMR카드만 보고 마킹했는데 정확하게 10문제라니, 너무 신기했다. 한 문제만 틀렸어도 나는 불합격이었다. 얼마나 아찔했는지 모른다. 운이 좋았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살면서 누릴 행운을 이날 다 쓴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직 축배를 들긴 일렀다. 준비해야 할 서류도 수두룩했고 최종적으로 면접이 남아있었다. 이제 겨우 산 하나 넘었다. 면접이라는 산 하나를 더 넘어야 한다. 면접까지 남은 시간 한 달, 면접 준비를 위해 나는 두 주먹 불끈 쥐고 다시 학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