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의 권유로 군무원 시험에 도전했지만 공부가 너무 어려워 내가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생각에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이 시험에 떨어지면 여자친구와도 끝이라는 생각, 항상 나를 지지해주는 어머니에게 보답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이 시험에 떨어지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것만 같은 생각 등등 여러 생각들 때문에 눈물이 났다.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2, 3주 정도 쉬었다. 쉬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다시 시작해보자.'
학원으로 갔다. 공부를 하려고 간 건 아니었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수업 시간에 앉아만 있다가 오자고 생각했다. 손은 가만히 둔 채 칠판을 쳐다보며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이해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했다. 이해가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넘어갔다.
그렇게 마음을 가볍게 먹고 할 수 있는 부분에만 집중했더니 그 어렵던 전공과목도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개만 배우자는 마음으로 공부하면서부터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조금씩 생겼다. 다시 펜을 꺼내들고 필기를 했다.
공부에 적응해 나가는가 싶더니 이번엔 다른 일이 터졌다. 여자 친구와의 이별이었다.
만나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건 군무원 학원을 다니며 시험을 준비한 지 한 달 만에 일이었다. 이별을 고한 건 그녀가 아닌 나였다. 그녀와 밥을 먹기로 한 날에 만나자마자 다투게 되었고 이제 헤어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기분이 안 좋은 상태로 식당에 들어갔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녀에게 말했다.
- 우리 이제 그만하자.
밥을 떠 먹으려던 그녀는 숟가락을 든 채 깜짝 놀란 듯 나를 쳐다봤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한 반응이었다. 잠깐 뜸을 들이더니 그녀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 이미 다 결정한 거네?
- 어..
- 알겠다. 이건 내가 계산하고 갈게.
그날 그녀의 무례한 행동 때문에 화가 나서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한 건 아니었다. 만난 지 서너 달쯤 됐을 때부터 우리는 오래 만나지는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를 가르치려는 태도 때문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그런 삶의 지표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단어를 잘못 말하거나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을 "그건 A가 아니라 B야."라는 식으로 일일이 지적하곤 했고 그때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주길 바라는 내 마음과 달리 그녀는 일일이 짚고 넘어가야 속이 후련한 듯했다. 자신이 교사라서 그런 거라고 말했지만 핑계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교사 중에도 가르치려 들지 않는 사람은 많다. 언행이 직업과 무슨 상관이랴. 스스로를 합리화 하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에 대한 자격지심이 점점 커지게 되면서 그녀가 그냥 하는 말도 나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곤 했다. 한번은 너무 화가 나서 카페에서 그녀에게 짜증을 내자 그녀가 맞받아치며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고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나 혼자 운 적도 있었다. 지금이라면 솔직한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풀어 나갔겠지만 그땐 쪼잔해 보일까 봐 창피해서 내 마음을 얘기하지 못했다.
다투고 대화하고 맞춰 나가다 보면 나아질 수도 있었겠지만 문제는 다툰 날에는 도저히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앞으로 공부하는 동안 또 싸우지 말란 법 없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시험도 여자 친구도 둘 다 놓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 것이다.
헤어지고 나면 속이 후련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식당을 나가는 여자 친구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중하게 생각한 후에 고한 이별이었는데도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생각과 너무 달랐다.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다시 붙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붙잡아선 안 됐다. 지금은 힘들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분명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미래를 위해서 어떻게든 참아야했다. 가만히 서서 멀어져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을 때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손으로 머리를 싸맨 채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었다.
한 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밥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더 미칠 것 같아 엄마 일터에 따라가 일을 거들며 잠깐이라도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했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났을 때쯤 정신이 좀 들었고 그제서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
공부였다. 시험 합격이었다. 시간이 지난 후 지금 이 순간을 돌이켜봤을 때 흐뭇하게 웃을 수 있으려면 반드시 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그것이 내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다시 학원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