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이가 있었을 땐 이렇게 셋이서 자주 요리를 만들어 먹었었는데.”
“현이네 할아버지는 건축가셨어, 그리 유명하진 않으셨지만. 우리 카페도 현이네 할아버지께서 설계하신 거야.”
“아, 들었어요.”
남자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그러자 사장님은 뜻밖이라는 듯 깜짝 놀라신다.
“그래? 현이가 다아씨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도 했단 말이지?”
“아,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별장에도 같이 간 적이 있다는 건 역시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은 사장님은 남자의 전 여자 친구의 아버지니까, 그리고 지금도 남자는 이유정과의 관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닌 것 같으니까.
“그게 벌써 6년 전의 일이구나.”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열일곱 살의 남자. 전에 보았던 사진 속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지금보다 좀 더 앳된 얼굴의,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은 여전한.
“현이는 할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부모님의 반대가 많이 심했던 모양이야. 유명하지 않은 예술가들이 일생이 그러하듯 유명하지 않은 건축가의 일생도 그리 평탄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아마도 그런 이유였겠지 그쪽 부모님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가지만.”
그때 할아버지의 설계 노트를 보던 남자의 얼굴은 정말 행복해 보였었다. 할아버지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라고는 생각했지만, 할아버지처럼 건축가가 되고 싶었을 정도였구나. 그럼, 남자는 건축을 전공하고 있는 걸까? 여름 내내 함께 있었는데 나는 남자의 전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현이의 부모님은 할아버지의 소유로 되어있던 건물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대신 그 자리에 빌딩을 지어버렸어. 그에 대한 반발로 현이는 할아버지께서 설계하신 건물들을 찾아 나섰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젊으셨을 때 건축가로 활동하셨고 노년에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집 몇 채만 지으셨기 때문에 대부분은 이미 사라진 후였어.”
그다음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카페까지 오게 된 거군요?”
“응, 그렇지. 그때 나는 아내의 간호를 위해 돌아다니며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두고 아내가 운영하던 카페를 도맡았지, 어쨌든 먹고살아야 했으니까. 유정이와 번갈아 병실과 카페를 지켜가며 버텼어.”
자전거를 탄 어린 남자아이들 서너 명이 우리 옆을 쌩하니 지나간다. 반대편에서 걸어오고 있는 교복을 입은 여학생은 휴대폰을 만지느라 앞을 보지도 않는다. 우리는 부딪히지 않도록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현이가 카페로 찾아왔을 때는 아내가 죽은 직후였어. 나는 그때 다시 사진을 찍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만약 다시 사진을 찍게 된다면 카페는 닫을 생각이었어. 그때 현이가 나타난 거야. 그리고 우리 유정이랑 합심해서는, 보다시피 완전히 눌러앉아버렸지.”
남자와 사장님 사이에서 느껴지던 미묘한 친밀감은 아마도 이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서 우리는 나란히 멈추어 섰다.
“다아씨에게는 무척 고맙게 생각해.”
뜻밖의 말에 나는 놀라 사장님을 돌아보았다.
“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로 사장님은 싱긋, 웃으셨다. 나는 대체 무엇이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어때, 음식은 입에 맞아?”
마트에서는 장바구니에 아무렇게나 주워 담으시는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칵테일 새우가 듬뿍 들어간 고소한 새우 필라프와 새콤달콤한 토마토 펜네 파스타, 고소한 치즈와 신선한 올리브유를 곁들인 샐러드, 갓 튀긴 고로케, 그리고 시원한 오렌지 에이드.
“맛있어요, 정말!”
나는 한껏 오버하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본 남자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장을 봐온 후 사장님께서 요리를 하시는 동안에도 내내 남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계속 읽지도 않는 책만 들여다보고 있더니.
“이제 겨우 웃는구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사장님께서 먼저 하셨다. 그 말에 남자는 아이처럼 입을 삐죽거린다, 아직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유정이가 있었을 땐 이렇게 셋이서 자주 요리를 만들어 먹었었는데.”
사장님께서 뜬금없이 꺼낸 그 이름에 나와 남자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그 바람에 남자와 눈이 마주쳐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사장님은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 못 채셨는지, 아니면 모른 척하시는 건지 계속 말씀을 이어가신다.
“유정이가 이런 걸 좋아했거든, 둘러앉아서 같이 식사를 하는 것.”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세요?”
남자의 목소리는 잔뜩 화가 나있었다.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잠자코 분위기를 살폈다.
“그냥, 이렇게 셋이서 함께 앉아있으니 유정이 생각나서 말이다. 현아, 너는 안 그러니?”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사장님께서 남자에게 물으셨다. 그러자 남자는 잠시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싸늘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내뱉는다.
“안 그래요. 그리고 이 녀석은 유정이가 아니에요.”
이 녀석, 분명히 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가 끼어들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양상추를 와삭, 씹으며 나는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사장님은 요리를 정말 잘하시네요?”
사장님은 덥수룩한 턱수염을 한 손으로 스윽, 쓰다듬으신다.
“그거야, 아내가 죽은 후로 줄곧 유정이와 둘이서 살았으니까. 게다가 직업상 밖으로 다닐 일이 많으니 살아남으려면 직접 만들어먹는 수밖에 없었거든.”
전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사장님께서 커다랗게 웃으셔서 나도 가볍게 웃는 척을 했다.
“하지만 요리는 유정이가 참 잘했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어색한 분위기에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아 나는 말없이 에이드만 연신 마셔댔다. 마치 이 자리에는 네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나와 남자, 사장님, 그리고 이유정. 그 여자는 이곳에 없지만, 항상 이곳에 있다.
“이런, 다아씨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인데 분위기가 이상해졌구나.”
빨대에서 슉슉,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났다.
“자, 어서 먹으렴. 배고프지?”
마치 당신의 딸을 대하듯 말씀하시며 사장님께서는 내 빈 잔에 오렌지 에이드를 다시 채워주신다. 남자는 사장님의 요리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겨우 치즈 몇 조각을 집어먹었을 뿐이었다. 반면 나는 내 몫의 필라프와 파스타를 깨끗이 비워냈을 뿐 아니라, 고로케와 샐러드도 거의 혼자 다 먹다시피 했다.
“현아, 테이블 좀 정리해 주련?”
식사가 대충 끝나자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남자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그릇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도와줄게요.”하고 내가 손을 뻗자 남자는 “됐어.”라고 차갑게 대꾸했다. 머쓱해진 나는 오도카니 앉아, 테이블을 정리하는 남자의 손만 멀뚱히 보고 있었다.
“자, 이건 생일 케이크야.”
언제 준비하셨는지 사장님은 초가 꽂힌 생크림 케이크를 테이블 가운데에 내려놓으신다. 그리고 성냥을 켜서 초에 하나씩 하나씩 불을 붙이신다.
“현아, 포크랑 접시 좀 챙겨 오렴.”
빈 그릇을 가져다 놓으러 갔던 남자는 순순히 포크와 접시를 챙겨 테이블로 돌아온다. 천장에 달린 할로겐램프의 불이 꺼지고 아른거리는 촛불 너머로 남자와 사장님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사장님께서 뭔가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 듯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신다. 그러자 남자는 강한 어조로 대뜸 “싫어요.”라고 말한다.
“노래는 절대 안 해요.”
남자는 이번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하게 선언했다. 나도 그쪽의 노래를 썩 듣고 싶진 않거든요,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도 남자를 도왔다.
“노래는 저도 쑥스러워요, 사장님.”
사장님은 커다랗게 웃으시며 “그럼 노래는 생략하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남자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싫기는 정말 싫었나 보네.
“자, 어서 초를 꺼야지?”
사장님의 재촉에 나는 후- 하고 촛불들을 꺼트렸다.
“생일 축하해, 다아씨.”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날, 남자는 끝까지 내게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