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쁘지 않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대로 잘 따라가며 살아.”
“이제 8월도 며칠 안 남았네요.”
태풍이 와서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오후의 창가, 나와 남자는 나란히 쪼그리고 앉아 화분을 돌보고 있었다. 나는 ‘윤후‘의 잎을 손가락으로 톡, 치며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밉살맞게 덧붙인다, “그리고 신나는 여름방학도 곧 끝이지.”하고.
“좋겠네요, 휴학하는 아무개 씨는.”
‘윤후‘의 잎에 쌓인 먼지를 살짝, 털어내며 나는 비꼬듯 말했다.
“같이 학교를 다니면 좋을 텐데.”
“나랑?”
부지런히 분갈이를 하고 있던 남자가 손을 멈추고 의아하다는 듯 돌아본다.
“그럼 안 돼요?”
“응.”
“어째서요?”
“넌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나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야, 바보 아니에요?”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런데 왜 복학 안 해요?”
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하고 싶은 게 있어서.”
“하고 싶은 거?”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이 계절이 끝나면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더 이상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없을 테지. 어느새 미운 정이 많이 든 건지, 어쩐지 아쉽게만 느껴진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아요. 벌써 여름도 거의 끝나가네요.”
“여름을 좋아해?”
“더운 건 싫지만, 여름은 좋아요. 여름이 끝나면 왠지 내 젊음도 끝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꽃삽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빨리 늙고 싶었어.”
“어째서요?”
“빨리 죽고 싶어서.”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말이야?
“그래서 무기력하게 기다리고만 있었어,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만을. 자고 일어나면 죽음을 앞둔 노인이 되어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노인들이 들으면 통곡을 할 일이네요.”
나는 자주 오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올랐다. 그 두 분을 보면서도, 남자는 빨리 늙어서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아니야, 그렇지는 않았을 거야. 부러움과 존경이 담긴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았으니까, 늘.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거봐, 역시.
“그거 차-암 다행이네요.”
“특히 지금 이 순간, 가장 간절해.”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덧붙였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시선을 돌려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멍하게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것 같았다.
“소중히 여겼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니까.”
나는 시선을 떨리는 손끝에 고정한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남자가 시선을 거둬들이며 “그래야지.”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참, 이거.”
남자가 부스럭거리며 앞치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낸다. 남자가 건넨 것은 은색의 고급스러운 봉인이 붙어있는 종이봉투였다.
“이, 이게 뭐예요?”
“빚 청산.”
나는 떨리는 손길로 봉인을 뜯고 봉투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케이스가 들어있었다. 딸깍, 하고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시계가 있었다.
“왜, 왜 이런 걸?”
“그러니까 빚 청산이라고.”
나는 조심스레 시계를 집어 들었다.
“너무 예뻐요.”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심플한 디자인의 시계알과 가죽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줄. 시계알 뒷면엔 Daa라고 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요, 마음에 쏙 들어요. 그런데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별로.”
“내 선물은 비싼 거 아닌데.”
“알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내가 좀 민망하거든요?”
“그래도 마음에 들었어.”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시계를 차 보려고 하는데 새 거라 그런지 잘 채워지지 않았다. 끙끙거리고 있는데 남자가 불쑥, 손을 내밀어 시계를 낚아챈다. 그리곤 말없이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워준다.
“나쁘지 않네.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대로 잘 따라가며 살아, 너무 늦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생일 축하한다.”
남자가 빈 화분을 들고 일어서며 툭, 던지듯 말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나는 내 손목에 얌전히 채워진 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밖의 비는 점점 더 거세져 유리창을 요란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같이 안 갈 거야?”
“응.”
남자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미 나는 퇴근 준비를 다 마친 채로 수진이가 단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서두르지 않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은데, 나는 손목시계를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같이 가면 좋을 텐데.”
수진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지만, 남자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됐어, 가기 싫다고 하잖아. 늦겠어, 그만 가자.”
나는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그런데 그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불편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어쩌면 내가 기분이 상한 건 ‘나의‘ 생일 파티를 단호하게 거절하는 남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뜻밖의 사실을 깨달은 나는 혼란스러웠다. 대체 왜? 어째서?
“전에 너랑 같이 갔었던 인도음식점에 갈 거야, 어딘지 알지?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그리로 와.”
수진이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는 남자를 혼자 남겨두고 우리는 폭풍우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산을 뚫을 기세로 비가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수진이는 가여울 만큼 풀이 죽어있었다.
“원래 좀 무뚝뚝한 사람이잖아, 너무 마음 쓰지 마.”
“너희는 정말 안 친하구나?”
내 딴에는 위로랍시고 그렇게 말했지만, 솔직히 효과는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말에 수진이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졌다. 위로가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우리가 친하지 않은 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
“그, 그런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수진이의 모습에 나는 어쩐지 심술이 났다. 그래서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고 말았다.
“생일 파티는 따로 해줬거든.”
“그-래?”
수진이의 얼굴이 굳는 걸 보며 나는 우쭐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다아야, 수진아!”
반대편에서 오던 연주가 우리를 발견하곤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선미는 조금 늦을 거래. 우리끼리 먼저 들어가라는데 어떡할래?”
“그럼 어서 들어가자, 너무 습해.”
손으로 팔랑팔랑, 부채질을 하며 수진이가 대답했다.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바깥의 습하고 후텁지근한 공기와 다른 시원하고 쾌적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우리 동네에 있지만, 나는 처음 와보는 식당이었는데 분위기가 꽤 좋았다. 알록달록한 천들이 천장과 벽에 주렁주렁 걸려있었고 테이블마다 아른거리는 촛불이 놓여있었다.
“다섯 명이요, 두 명은 곧 올 거예요.”
유니폼으로 인도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여자가 걸을 때마다 하늘하늘한 천들이 우아하게 펄럭인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곧 다른 직원이 샐러드 한 접시를 내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