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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Jan 25. 2023

27화 극의 절정이지만,

“나는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 같네.”

“매년 다아 생일이면 이제 방학도 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게 돼.”


연주가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듯 명랑하게 말을 꺼냈다.


“참, 수강신청은 잘했니?”


순간, 연주의 말투가 그 사람과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움찔거리자 연주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니, 딴생각 좀 하느라.”

“수업은 뭐 들어?”

“음, 잠시만, 시간표가-”


나는 사진으로 찍어둔 시간표를 보여주기 위해 휴대폰을 찾았다. 하지만 가방에도, 주머니에도 휴대폰은 없었다. 연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래? 휴대폰 없어?”

“응, 아무래도 카페에 놓고 온 것 같아.”


평소라면 시간을 본다고 여러 번 꺼내봤을 텐데, 손목시계가 생겨 휴대폰을 볼 필요가 없어서 깜빡한 모양이다.


“내가 전화해 볼게.”


수진이가 얼른 내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다. 제법 길게 신호음이 울린다.


“아, 현이니?”


역시 카페에 두고 왔구나!


“내가 조금 있다가 가지러 간다고 말해줘.”


저녁을 먹고 카페에 들렀다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응, 다아가 조금 있다가 가지러 간대. 응, 알았어.”


수진이가 전화를 끊고는 “알아서 가지고 가래.”라고 전해준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상한다. 알아서 가지고 가라니, 말을 해도 꼭-


“우리 왔어!”


선미와 지원이가 밝게 손을 흔들며 나타났다. 지원이는 동기이기도 하고 선미와 1학년 때부터 사귀고 있기 때문에 우리와도 자주 어울리는 편이었다. 물론, 연주와 그 사람이 사귀고 있을 때는 그 사람도 우리와 자주 어울렸었다. 이 자리에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낯설었다.


“이제 모두 모였으니까, 주문하자. 배가 너무 고파.”


친절한 연주는 내 앞에 살며시, 메뉴판을 펼쳐준다.


“여긴 뭐가 맛있어?”

“탄두리 치킨은 하나 시키자.”


나는 메뉴판을 보는 척하며 잠자코 다른 아이들이 메뉴를 정하기를 기다렸다. 이 식당을 약속장소로 정한 건 내가 아니었다. 대강 메뉴가 정해지고 선미가 확인 차 모두에게 묻는다. 나는 메뉴를 하나도 선택하지 않았다.


“참, 뮤지컬은 어땠어?”


주문을 한 후 선미가 기다렸다는 듯 수진이를 닦달했다.


“재미있었어, 노래도 좋았고.”

“얘는, 공연이 어땠는지를 묻는 게 아니잖아.”


다들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수진이의 대답을 기다린다.


“아, 현이? 그냥 괜찮았어. 만나서 뮤지컬 보고 같이 저녁 먹고.”


그렇게 말하며 수진이는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지원이가 되도록 짚고 넘어가지 않기를 바랐던 뇌관을 건드리고 말았다.


“현이는 왜 같이 안 왔어?”


그것은 나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고 수진이를 향한 질문이기도 했다. 짧은 순간,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미묘한 신경전이 오갔다. 하지만 선수(先手)를 차지한 것은 수진이였다.


“따로 축하를 해줘서 올 필요가 없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선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나를 보며 묻는다.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원래 카페는 10시에 문을 닫으니까.”


급히 수습을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수진이의 묘한 대답이 몰고 온 파장이 너무 컸다. 하는 수 없이 “어제 사장님이 나오셔서 같이 식사를 했거든.”이라고 덧붙여야만 했다. 그렇게 어색하지만 대충, 최악의 상황만큼은 모면하는 듯했다.


“어, 그런데 이건 뭐야?”


유난히 눈썰미가 좋은 선미가 내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시계를 가리키며 물었다. 더 이상의 최악은 없을 거라며 잠시 안도하던 나는 너무 놀라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선물 받은 거야? 예쁘네, 누구한테 받았어?”


빨리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만 한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항상 이런 순간엔 그 흔한 연예인 이름 하나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안 그래도 뾰로통한 수진이를 더 자극하고 싶진 않은데 빨리-


“뭘 물어, 윤후 오빠가 준 거겠지.”


수진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수진이의 묘한 말은 다시 한번 파장을 몰고 왔다, 더 강하고 더 파격적인 파장을. 모두가 할 말을 잃은 채로 서로의 눈치만 살핀다.


“주문하신 식사 나왔습니다.”


안타깝게도 희생양이 된 것은 나쁜 타이밍에 찾아온 직원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트레이 가득 가져온 요리들을 하나씩 테이블에 내려놓느라 가여운 직원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맛있게 드세요.”


직원은 마지막 요리를 내려놓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리고 곧이어 책임감을 느낀 지원이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먹자!”


하지만 누구도 지원이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아니야? 며칠 전에 스터디에 갔다가 들었는데? 너랑 윤후 오빠랑 같이 다니는 걸 봤다고.”

“수진아, 그건-”


선미가 다급하게 수진이의 말을 막으려고 했지만, 수진이는 멈추지 않았다.


“너도 같이 들었잖아?”

“그, 그야 그렇지만.”

“손잡고 다니는 걸 본 애들도 있었잖아?”


적어도 수진이는 그 사람의 이름만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만해, 수진아.”


말도 섞고 싶지도 않다는 듯 내내 잠자코 있던 연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너한텐 미안하지만, 너도 알 건 알아야 하잖아?”


수진이가 연주를 향해 말했다. 연주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분노와 일종의 흥분으로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한데, 틀렸어. 이 시계는 현이가 준 거야, 윤후 선배가 아니라.”


테이블 가득 차려진 먹음직스런 탄두리 치킨도, 어려운 이름의 커리들도, 아직도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난들도, 이로써 모두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생각보다 사이가 좋거든.”


나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내 안에 내가 아닌 다른 영혼이 깃든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고약한 심보의. 아니면 이것이 나의 본모습일까? 수진이의 얼굴은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데 나는 오히려 점점 더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아, 우리가 생각보다 사이가 좋았구나?”


그 목소리가 끼어들기 전까진 말이다.


“현아!”


놀라 돌아보니, 비에 젖은 남자가 내 뒤에 서있었다.


“자, 이거.”


그리고 남자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내가 가지러 가면 되는데.”


나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현아, 앉아. 이쪽으로.”


가여운 지원이가 자기 옆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 여기엔 왜 온 거야?”

“휴대폰.”


남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삐이이익- 하는 휴대폰의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알람을 확인하고 있었다. 호우 특보가 내려진 모양이었다. 알람은 몇 번 울리고 꺼졌지만, 아직도 귓가에 삐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좋아하니까, 한다아를.”


그리고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더 큰 충격과 함께 날아들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놀라 얼어붙었지만, 가장 놀란 건 아마 나였을 것이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뭐, 뭐라고?”


겨우 입을 연 건 수진이였다. 항상 부러워했던 수진이의 단아한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여전히 성녀(聖女)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연주에 비하면 수진이는 지극히도 인간적이어서 차라리 감동적일 정도였다.


“내가 한다아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이다. 남자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수진이는 그 말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다, 다아가 좋아하는 건 윤후 오빠야!”

“알고 있어.”


남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어째서?”


남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수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나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원래 고작 그 정도의 인간에 불과했다.


“나는 마치 이 자리에 없는 사람 같네.”


누가 들어도 비꼬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말투였다. 사실 언젠가는 살얼음판 같이 위태로운 이 관계가 이렇게 끝나지 않을까, 여러 번 상상을 했었다. 물론 윤현이라는 존재는 예상 밖이었지만. 얄팍한 우정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줄곧 참고 또 참았다. 연주가 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때도, 언제나 약속을 마지막에 통보받기만 할 때도, 내 앞에서 연주와 그 사람이 다정한 모습을 보일 때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여겨질 때도. 그래도 친구라는 껍질만은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그 사람이 지켜주고 싶어 했던 것을.


“너희는 항상 그랬지, 새삼스럽지도 않아.”

“야,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선미가 발끈했다. 그 와중에도 연주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심술이 났다. 나는 이렇게 밑바닥까지 다 보이고 있는데, 왜 넌 끝까지 고고하게 구는 거야?


“넌 정말로 몰랐어?”


나는 연주를 향해 물었다. 연주는 대답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본다.


“몰랐을 리가 없잖아, 처음 본 사람도 알아차린 사실을.”

“나, 나는-”

“넌 그저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잖아!”


촤악-


“수진아!”

“김수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수치스러움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런 일은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직접 당해보니 물 끼얹기라는 아주 상투적인 방법이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기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알 수 있었다. 역시 막장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나가자.”


남자가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눈을 뜬 나는 식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쯤은 놀라서 반쯤은 호기심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 테이블을 담당하는 직원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만하면 됐어.”


그 자리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남자뿐인 듯했다.


“왜 내가 아니야?”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수진이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내가 아니라 다아야? 왜 나는 안 돼?”


남자는 잠시 수진이를 바라보더니 이내 냉정한 말투로 대답했다.


“넌 너무 잘 아니까.”


수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한 듯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남자의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자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출구를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밖으로 나와서야 남자는 나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제야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말없이 그런 나를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비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 Pexels, Cottonbr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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