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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Feb 14. 2023

28화 달과 6펜스

"그냥 눈앞의 문장을 해독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되니까."

“내려, 다 왔어.”


자동차가 멈추는 느낌에 눈을 뜨니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남자는 먼저 차에서 내려서 빗속을 뚫고 별장으로 달려간다. 탁, 하고 오렌지색 야외 조명이 환하게 켜졌다. 나는 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안 내릴 거야? 거기서 밤새도록 있을 건가?”


우산을 든 남자가 문을 홱, 열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나는 가방을, 아, 가방을 식당에 두고 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는 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을 기울여 준다. 낯익은 별장은 그의 할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따뜻하고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벌써 12시야, 우선 뭐든 좀 먹자.”


그러고 보니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은 한입도 먹지 못했다.


“환기를 시켜야 하니까, 테라스로 나갈까?”


남자가 분주히 움직이며 창을 여는 동안 나는 테라스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보이지도 않는 검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와인 마실래? 조금 마시면 잠들기 쉬울 거야.”


남자는 담요 하나를 내게 건네고 편의점에서 사 온 먹을거리가 든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좋아요.”


남자는 다시 안으로 들어가 와인 한 병과 잔을 가지고 나왔다. 와인을 따라준 후로 남자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새 챙겼는지 손에는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들려있었다. 정말 질리지도 않나,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밤처럼 남자와 나는 나란히 앉아 와인을 마셨다. 달라진 것은 매미 소리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는 것뿐이었다.


“거짓말이죠?”


나는 불쑥, 주어도 목적어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애석하게도 아니야.”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남자는 대답했다. 나는 남자의 손에서 책을 홱, 낚아챘다.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이해가 안 되는 건 바로 나야.”


남자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테이블 위에 있던 다른 책, 이번에는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내게 뺏긴 달과 6펜스 대신 집어 든다.


“나도 이해가 안 돼,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왜 좋은지.”


책 따위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는지 남자는 그 두툼한 책을 아무렇게나 펼치더니 그냥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한다.


“미안하게 됐어요.”


나는 남자에게서 빼앗은 달과 6펜스의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깨알 같은 활자들이 빠른 속도로 눈앞을 스쳐가 마치 한 마리의 벌레가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네가 자꾸 신경 쓰여. 아무래도 좀 미친 거 같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뺨이 발그레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적어도 남자의 말이 거짓이나 장난 따위가 아님을 알았다.


“그쪽은 그 여자를, 그러니까 이유정을 아직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요?”


그 이름을 말하기 전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알아야만 하는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그 이름에 반응한 남자는 드디어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대체 그 책들은 왜 읽는 거예요? 정말 재미있어서 보는 것도 아니면서?”


종종 남자가 몇 시간이고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본 적 있었다. 실은 그냥 펼쳐놓은 것에 불과한.


“응? 이 책이 얼마나 재밌는데? 들어봐, 존 로크는 외부세계에 대한-”

“됐어, 듣기 싫어요. 존 로크가 뭐라고 했든, 그런 건 나랑 상관없어요.”


하지만 나는 참을성도 없고 배려심도 모른다. 남자는 책을 접어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어려운 책을 읽고 있으면 다른 생각이 나지 않으니까. 그냥 눈앞의 문장을 해독하는데 온 정신을 집중하게 되니까, 그래서 읽는 거야.”

“그 다른 생각이란 게, 혹시 이유정이에요?”


더 이상 숨길 생각 없는 듯 남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안 돼,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역시 그쪽이 좋아하는 건 이유정이잖아요.”

“나는 네가 좋아, 그건 진심이야. 하지만 나는 딱히 너와 어떻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단지 네가 좋을 뿐이야. 그러니까 네가 그 형을 좋아하든, 아니면 그 형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든, 그런 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네게도 내가 이유정을 좋아하든 아니든, 그런 건 전혀 신경 쓸 문제가 아닌 거지.”


남자의 말이 너무 당당하고 뻔뻔해서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지금 제정신이에요?”

“응.”


분명히 오늘 저녁의 일은 곧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떤 생각을 할까? 허탈하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얼마나 못된 아이인지 알고 실망할까? 아니, 다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 사람은 내게 자신의 마음을 직접 밝힌 적은 없으니까, 나처럼 멍청한 아이랑 엮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할 거야.


“넌 정말로 그 아이들을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 애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잖아. 단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함께 어울리는 척했을 뿐이었던 거 아냐?”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뭐라고 더 이상 대꾸할 수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동안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삭히고 있던 생각들을, 남자는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술술 읊어대고 있었다.


“맞아, 나는 혼자가 되는 게 싫어서 그 아이들과 어울렸어. 나는 내 동생이 혼자가 되고, 그로 인해 다진이는 물론이고 가족들 모두가 상처받는 걸 지켜봤어. 나까지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어,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껍데기뿐인 우정이라도 지키고 싶었어.”


화가 나는 대신 가여운 마음이 샘솟았다. 내가 숨기고 싶었던 어두운 마음을 읽었다는 건 그만큼 남자의 마음도 그 어둠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형은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밝히지 않을 거야. 그게 너를 위한 거라고 굳게 믿을 테니. 차라리 잘 된 거 아니야? 둘 다 가질 순 없어. 욕심을 버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네가 진짜 지키고 싶었던 걸 지켜.”


언제나 나를 배려하는 친절하고 다정한 그 사람, 그리고 배려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무뚝뚝하고 못된 남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피곤해.”


남자는 주섬주섬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도 더 이상 계속했다가는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고 판단해 일단 남자의 의견에 동의했다.


“지난번에 썼던 손님방을 쓰면 돼. 에어컨은 안 켜도 되지?”


테라스는 추울 정도였고 실내도 서늘할 정도로 시원했다. 남자는 달과 6펜스 - 아마도 인간오성론보다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를 챙겨 들고 지난번에 자신이 썼던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나는 꼼짝 않고 멀뚱히 거실에 서있었다. 내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남자가 뒤를 돌아본다.


“왜 그러고 서있어?”

“혼자 있기 싫어.”


툭, 달과 6펜스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야, 나는 방금 전에 널 좋아한다고 한 사람이야.”


남자가 얼른 책을 주워 들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나랑 어떻게 해볼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요?”


내 능청스러운 대답에 남자는 말이 안 통한다는 식으로 “그거랑은 다른 문제지.”라고 한숨 섞인 대답을 했다.


“설마 내게 플라토닉이나 아가페 같은 걸 바랄 정도로 멍청한 건 아니지?”


나는 쇼파에 걸터앉으며 남자에게 되물었다.


“남자는 다 똑같나 봐?”


질 수 없다는 듯 남자는 내 옆에 털썩, 앉는다.


“그럼 아닐 줄 알았어?”




ⓒ Pexels, Mohsen am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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