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반달이 손톱만 하게 떠있었고, 샛별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선배들과의 첫 만남은 굳이 기억해 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첫 만남이란 선배들이 나를 알게 된 사건을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입학하던 순간부터 선배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가서 좀 걸을래?”
“응, 좋아.”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계절, 자율학습 전 석식 시간이었다. 해가 길어져 밖은 아직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식사를 일찍 마친 후 민서와 산책 삼아 교사를 걷고 있었다.
“어서 가자!”
여자 아이들 몇 명이 운동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멀리서 와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무슨 일 있는 건가?”
“글쎄. 또 시시한 일이겠지.”
민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 시시한 일이란 건 아마도-
“꺅, 윤후 오빠, 멋있어요!”
“재인 오빠, 파이팅!”
역시 그랬다. 운동장 한쪽에서 남학생들 몇 명이 농구를 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여자학생들이 빙 둘러서있었다. 그 남학생들 중에 그 사람과 재인 선배가 있었다. 나는 민서를 향해 눈을 반짝였다.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유치하게.”
투덜대면서도 민서는 내 옆에 있어줬다.
“멋있지 않아?”
“뭐, 솔직히 좀 멋있긴 하지.”
교복 차림으로 뛰어다니는 선배들의 모습은 청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처음엔 민서의 눈치를 살피던 나도 어느새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람이 공을 놓치면 나도 같이 안타까워하고, 그 사람이 골을 넣으면 나도 같이 기뻐하고.
“그렇게 좋아?”
민서가 웃으며 묻는다.
“넌 정말 얼굴에 티가 다 난다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전교생이 라이벌이네, 그렇지?”
“아니, 나는 그냥-”
그때였다. 무언가가 슬로우 모션처럼 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노, 농구공? 하지만 몸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나는 농구공이 날아오고 있는 걸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다. 바로 옆에 있던 여학생들이 놀라 내지른 비명 소리와 함께 이마를 강타하는 충격을 느꼈고, 다리가 풀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만큼이나 놀란 민서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웅성거림 사이에 섞여 들려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괜찮아?”
빨갛게 상기된 얼굴, 희미하게 풍겨오는 땀 냄새, 깔끔하게 다림질된 하얀 셔츠 깃, 까만 눈동자. 아, 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묻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관중들은 어느새 나와 그 사람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다친 덴 없어?”
그제야 깨달았다, 이마의 통증은 착각이었다는 걸. 농구공보다 빨랐던 건 그 사람이었다.
“네….”
“일어날 수 있겠어?”
나는 얼떨떨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내 손 잡아.”
그 사람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내게 날아오던 농구공을 막아준 손이었다.
“괜찮아? 미안해.”
그 사람의 뒤쪽으로 튕겨나갔던 농구공을 주워 품에 안은 재인 선배가 보였다. 아마도 공을 내 쪽으로 던진 사람이 재인 선배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잠깐 잡았던 그 사람의 손은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정말 괜찮아?”
그 사람이 다시 물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말을 나눠보는 것도 처음이라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내는 커다란 소리를 애써 감추며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네.”하고 대답했다.
“미안해.”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곤 재인 선배가 들고 있던 농구공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곤 커다란 목소리로 친구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들어가자!”
구경을 하던 여학생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사람과 친구들은 곧바로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의 퇴장과 동시에 관중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이야. 다아야, 너 괜찮아?”
나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민서야.”
“응?”
“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큰일 날 뻔했지. 다쳤으면 어떡할 뻔했어?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
민서는 투덜거렸지만, 나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운동장 위로 핑크빛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희미한 반달이 손톱만 하게 떠있었고, 샛별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사람의 손이 남긴 감촉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첫사랑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살그머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거실에선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소리를 죽인 TV를 보고 있던 엄마가 문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깜짝 놀랐지만, 엄마는 모른 척해주었다.
“한다아, 여기 좀 앉아봐.”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죄가 있는 나는 얌전히 엄마의 앞쪽 거실 바닥에 앉았다. 엄마가 빤히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내 속을 다 훑어보는 기분이 들어,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잠시 말이 없던 엄마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어젯밤에 어디에 있었는지를 심문하듯 물어왔다.
“여, 연주네 집에 친구들 다 모였었거든.”
오랜만에 민서네 집에 갔었어. 몇 번이나 연습을 했는데 튀어나온 말은 연습 때와는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연주, 그 이름을 말하면서 나도 놀랐다. 왜 하필이면 연주가 튀어나온 거람!
“전화는 왜 꺼놨어?”
아, 휴대폰. 그제야 식당에 두고 온 가방과 휴대폰이 생각났다. 그 식당에 가면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엄마 몰래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잃어버렸어.”
“뭐? 어디서?”
“잘 모르겠어. 미안.”
“그럼 휴대폰을 빌려서라도 집에 전화는 했어야지.”
“깜빡했어, 미안.”
나는 방긋방긋 미소를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수다를 정신없이 떨었거든.”
“알았어.”
“응, 미안해요, 엄마.”
엄마와 딸 사이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엄마는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고 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엄마의 입버릇처럼 엄마가 낳아 이십여 년을 먹이고 입히며 길러온 딸이니 아마 엄마는 내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엄마는 내 서툰 거짓말에 속아주었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휴대폰은 어떡할 거야? 새로 사야 해?”
“한 번 더 찾아볼게.”
“어휴, 칠칠치 못하긴.”
방으로 들어가려다 나는 문득 다진이의 빈자리를 깨달았다. 개학을 해서 시골로 돌아간 다진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건 틀린 말이 아니다. 어쩐지 집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참, 찐따한테선 전화 왔어?”
“너 또 동생을 이상하게 부를래?”
TV에서 나오는 빛에 비친 엄마의 얼굴이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어제 전화 왔었어, 개학해서 바쁘다더라.”
엄마는 푸석푸석한 눈가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그리곤 TV를 끄고 안방 앞으로 휘청휘청 걸어갔다. 안방 문손잡이를 잡고 나를 돌아보며 엄마는 조용히 속삭인다.
“조용히 씻어, 아빠 주무시니까. 그리고 다진이한테 가끔 먼저 연락도하고 해, 하나뿐인 누나잖니.”
하나뿐인 누나, 그 말에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간 후에도 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 가만히 서있었다.
시골로 내려가기 전날 밤, 아니,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다진이가 내 방을 찾아왔었다. 나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뭐야?”라고 대꾸했다. 어쩌면 그 말이 쫓아내는 것처럼 들렸던 걸까? 다진이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문 앞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곤 문을 닫기 직전에 조그맣게 말했다. “누나, 잘 자.”라고.
나는 거실의 전화기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긴가민가하며 숫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뚜르르, 뚜르르, 하는 기본 수신음이 들려온다. 그리고 20초쯤 지났을 때 다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나야.”
“누나? 웬일이야?”
다진이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에서 다진이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 밖에 없는 지도 모르겠다.
“어디야?”
“집이지. 누나, 무슨 일 있어?”
다진이와 통화를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니, 그냥. 공부하고 있었어?”
“방금 와서 야식 먹고 있었어.”
“너무 많이 먹지 마, 몸매 망가져.”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다진이의 핀잔에 나는 그저 웃는다. 그리곤 서로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
“다진아.”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누나 좋아?”
다진이는 황당하다는 듯 “헐.”하고 소리 낼뿐이다.
“응? 우리 다진이는 누나가 좋으니?”
“진짜 미쳤어?”
다진이는 생각보다 세게 나왔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어서 대답해 달라고 졸라 본다.
“징그럽게 왜 이래?”
하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는 다진이.
“됐어, 농담이야. 일찍 자.”
민망해진 나는 얼른 통화를 끝내려는 심산으로 급히 마무리를 했다. 하지만 다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다진?”
“그래도 나한텐 하나밖에 없는 누나인데. 뭘, 새삼스럽게 당연한 걸 물어?”
퉁명스러운 목소리.
“나 이제 공부할 거야. 방해되니까, 얼른 끊어.”
하지만 쑥스러워서 일부러 그러는 걸 모를 줄 알고?
“응, 열심히 해.”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명랑하게 말했다.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다진이는 잘 자란 인사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