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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Feb 15. 2023

29화 나랑 같이 있자, 일주일만

하얀 들꽃은 여전히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날은 아직 여름의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무더운 날씨에 체육복을 껴입고도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랫니와 윗니가 규칙적으로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며칠 전부터 자꾸만 잔기침이 나더니 지독한 여름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많이 아파? 보건실 갈래?”


점심까지 거르고 내내 책상에 엎드려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민서가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살짝 들고 고개를 저었다.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여름 감기였기에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열이 높은 것 같은데.”


민서의 말과 함께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자,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었지?”


5교시는 문학 시간이었다. 커다란 돋보기안경을 낀 할아버지 선생님은 얼마 전 막내딸을 시집보낸 후로는 통 기운이 없으셨다. 선생님 읽어주시는 고전소설을 자장가 삼아 학생들의 머리가 하나둘씩 꾸벅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교실엔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아서 교실의 모든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운동장 쪽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누렇게 변색된 커튼이 휘날리며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선생님은 명품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셨다.


“선생님.”


나의 힘없는 목소리가 나른한 오후의 일상을 깨트렸다. 아이들 몇몇이 잔뜩 잠에 취한 눈으로 게슴츠레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은 바들바들 떨리는 검지로 돋보기안경을 끌어올리며 물으셨다, “왜 그러냐?”


“보건실 좀 다녀올게요.”


선생님은 잠시 내 얼굴을 보시더니 이내 무심하게 대답하셨다.


“어서 다녀오너라.”


앞자리에 앉은 민서가 돌아보며 속삭이듯 물어왔다, “괜찮아?” 나는 민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천천히 뒷문을 열었다. 선생님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셨고 힘겹게 나를 돌아보던 아이들도 다시 졸기 시작했다. 교실은 금세 다시 평소의 모습을 되찾아버렸다.


어쩐지 수업시간의 복도는 평소에 알던 학교와는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실내화를 질질 끌며 천천히 텅 빈 복도를 걸었다. 옆 반에서는 지리 선생님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또 그 옆 반에서는 수학 선생님이 회초리로 교탁을 탁탁,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 복도를 지나 중앙 현관으로 이어지는 폭이 넓은 계단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어, 넌?”


계단을 올라오던 그 사람과 마주쳤다.


“우리, 구면이지?”


그 사람이 내게 물었다. 맙소사, 말도 안 돼! 나는 부끄러움에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야, 정윤후! 같이 가자니까!”


뒤이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재인 선배가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그날 재인 선배는 교복 상의 대신 파란색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 파란색은 그 사람이 입고 있는 하얀 교복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화려한 단짝은 언제 어디서나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예나 지금이나.


“어, 넌 그때 그-”


재인 선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는 체를 해왔다.


“혹시 어디 아프니? 보건실에 가는 길이었어?”


그 사람은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조그맣게 “네.”하고 대답했다.


“안색이 안 좋아, 어서 가봐.”


하필이면 몸이 아플 때 그 사람과 마주치다니, 난 정말 운도 없는 아이다. 학교의 아이돌이나 다름없는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있을까! 그때 불쑥, 재인 선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우리가 데려다줄게, 지난번 빚도 갚을 겸.”


그 사람 뒤쪽에 서있던 재인 선배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무슨 소리야, 구재인!”

“봐, 안색이 너무 안 좋잖아? 혼자 보낼 거야?”


재인 선배의 말에 그 사람이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뜻밖의 상황에 계속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눈앞이 핑 돌았다. 어쩌면 조금 오버액션이 섞여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이 재빨리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었다.


“괜찮니? 가자, 데려다줄게.”


내가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지만, 두 사람은 한사코 나를 따라나섰다. 중앙계단을 끝까지 내려와, 1층 왼쪽 끝. 그 사람이 똑똑, 노크를 했다. “들어오세요.”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 사람이 문을 열었다.


“어머, 윤후야?”


여유롭게 잡지를 보고 있던 보건 선생님은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그 사람이란 걸 알고는 몹시 놀랐다. 들고 있던 머그컵을 당장 내려놓고 다급히 물었다.


“어디 아프니?”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런데 아픈 건, 제가 아니라 이쪽이에요.”


그제야 선생님은 나를 발견하고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자꾸 윤후만 예뻐하실 거예요? 저 삐쳤어요.”


재인 선배가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어머, 구재인 군도 있었니? 몰랐네.”


선생님은 유쾌하게 재인 선배의 말에 대꾸했다. 서로 웃어넘기는 걸로 보아 두 사람은 선생님과 몹시 친한 것 같았다. 이십 대 후반의 젊고 예쁜 선생님은 하얀 가운 아래에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선생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눈길이 갔다. 선생님처럼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나도 두 사람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얼마나 심한 논리적 비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서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간절했다. 그때의 나는 어른이 되면 저절로 선생님처럼 예뻐질 거라고 생각했다. 참, 터무니없게도.


“1학년? 어디가 아프니?”


나는 선생님 맞은편의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았다. 우선 선생님은 체온계를 내 귓속에 넣어 체온을 쟀다.


“체온은 38도. 고열까진 아니지만, 꽤 높네.”


그 사람과 재인 선배는 숨죽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증상은? 가령 콧물이 난다던가, 기침이 난다던가, 그런 거.”

“콧물은 안 나는데 기침은 좀 나요. 그리고-”

“아, 잠시만.”


내 말을 멈추게 하고 선생님은 옆에 서있던 두 사람을 홱, 돌아보았다.


“그런데 지금 수업시간 아니니?”


두 사람은 동시에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정말 친구 사이가 맞는구나, 어쩐지 닮았어.


“왕자님들은 그만 교실로 돌아가렴.”


- 왕자님!


“어차피 자습인데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벌써 수업도 거의 다 끝났는데.”


그 사람은 재인 선배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선생님은 딱 잘라 대답했다, 절대 안 된다고. 선생님은 결국 두 사람을 보건실 밖으로 쫓아내 버렸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선생님은 상자에서 알약 두 개를 꺼내 내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


“감기 몸살인 것 같으니까, 일단은 약 먹고 한숨 푹 자렴.”


미지근한 물과 함께 알약을 삼키고 나는 보건실 안쪽의 간이침대 위로 올라갔다. 하얀 천장을 보고 눕자 몸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열 때문인지 약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기 때문인지!


“덥더라도 이불은 푹 덮고 자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뒤척이는 내게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의 말에 이불을 턱 밑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선생님은 식어버린 커피를 개수대에 붓고 새로 내린 따뜻한 커피로 다시 자신의 머그컵을 채웠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보다만 잡지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척이는 사이, 어느새 수업 마치는 종이 울렸다. 몸이 나른하고 몽롱해지며 복도로 쏟아져 나온 아이들의 웅성거림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나는 울고 있었다. 손등으로 거칠게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르며 뺨과 베개를 흠뻑 적셨다. 그렇게 이유도 없이 나는 누운 채로 한참을 더 울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릴 때까지.


“일어났어?”


문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까스로 울음을 멈추고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일어났어요.”

“아침 먹자, 나와.”


나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는 퉁퉁 부은 내 얼굴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하긴, 어제도 엄청 울었으니 새삼스럽게 이상하다고 여길만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남자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먹을 만한 걸 찾아봤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이 정도뿐이야.”


식탁에는 어제 먹다 남은 빵 몇 개와 샐러드 한 접시, 그리고 커피 두 잔이 차려져 있었다. 남자는 단출한 아침식사가 마음에 걸리는 듯 “아니면 돌아가는 길에 사먹을래?”라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그냥 먹어요.”


나는 자리에 앉아 아몬드 머핀에 손을 뻗었다. 사실 뭔가를 먹을 만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남자의 성의를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연하게 내려진 커피 두 잔의 도움으로 나는 겨우 머핀 하나를 먹어치웠다.


“애쓰네.”


그런 나를 보며 남자는 피식, 웃는다. 하지만 남자도 식욕이 없는지 샐러드만 몇 번 뒤적이고는 포크를 내려놓는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됐어, 그런 얼굴로 무슨.”


남자의 말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항상 그렇지만.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는 게 어때? 한결 기분이 나아질 거야.”


수도꼭지에서 쏴아아, 하고 하얀 물줄기가 쏟아졌다. 남자가 설거지를 시작하는 것을 보고 나는 남자의 조언대로 산책을 할 겸 정원으로 향했다. 보송보송한 아침 햇살 아래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자 남자의 말대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정원 한쪽의 작은 텃밭엔 여러 가지 식물들이 심어져 있다. 그중 방울토마토가 눈에 띄었다. 방금 먹은 샐러드의 재료들은 이 텃밭에서 채취한 채소들인 모양이었다.


그날 아침엔 그 사람과 함께였다. 하얀 들꽃은 여전히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뻗어 들꽃 한 송이를 꺾었다.


“서리 현장 목격.”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느새 남자가 내 뒤에 서있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남자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꽃 몇 송이를 더 꺾어서 내게 건넸다.


“집에 가면 엄청 혼나는 거 아냐?”

“괜찮아요, 잔소리 좀 들으면 되겠죠.”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너도 다시는 이러지 마. 다 큰 여자가 아무 남자랑 외박이나 하고 말이야.”

“그쪽은 아무 남자가 아니잖아요?”


남자는 말이 안 통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제부터 계속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남자는 계속하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사실 난 그쪽이 날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사이에는 어떤 감정이 싹틀 계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도저히 남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나를 놀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내가 널 싫어했다고?”라고 묻는다.


“계속 신경 쓰고 있었어. 네가 내내 그 형만 바라보느라 몰랐을 뿐.”


나는 뭔가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제안이 하나 있어.”


제안?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꺼낼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 제안보다는 부탁에 가깝지만.”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랑 같이 있자.”


바다 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남자와 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지만 그 바람에 실려 온 남자의 말에 나는 머리를 넘기기는커녕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일주일만.”




ⓒ Unsplash, Miche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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