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이는 역시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지?”
“어디 나가?”
쇼파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의 다진이가 나를 보지도 않은 채로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진이의 오른손에는 휴대폰이, 왼손에는 리모컨이 들려있다.
“뮤지컬 보러.”
“뮤지컬? 문화생활도 즐기는 사람이었어?”
나는 다진이에게 눈을 홀렸다.
“윤후 형이랑?”
심술이 난 나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렇다면?”
“잘 다녀와.”
그렇게 말하며 다진이는 TV 화면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나는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다. 여름날의 오후는 아직도 뜨거운 태양이 내리쬔다. 몇 걸음 걷지 못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집 앞 버스 정류장에 섰다. 버스는 내가 이어폰을 귀에 꽂기도 전에 도착했다. 삑, 소리를 내며 카드가 단말기에 읽히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다음 정류장에서는 사람들이 더 많이 올라탔다. 그 바람에 나는 손잡이를 놓치게 되었고 표류하듯 뒤로, 뒤로 떠밀려갔다.
“아, 죄송합-”
겨우 틈새를 찾아 손을 뻗는데 낯익은 향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의 오른팔은 남자의 왼팔과 닿아있고 나와 남자의 얼굴은 미묘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뒤로 좀 들어가 주세요!”
기사 아저씨가 승객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이미 수용 한계를 벗어난 인원을 태운 버스 안으로 쉴 새 없이 사람들이 밀려든다. 뒤로 이동하는 무리로 인해 내 몸은 다시 떠밀려가기 시작했다.
“꽉 잡아.”
남자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남자는 나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긴 후 휩쓸려가지 않도록 두 팔로 손잡이를 꼭 잡았다. 그 바람에 나는 남자의 품에 안기고 남자는 나를 뒤에서 감싸 안은 꼴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등 뒤로 남자의 온기가 느껴져 나는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잠시 신호에 멈춰 선 버스가 다시 달리려는 찰나, 관성의 법칙으로 인해 몸이 뒤로 쏠렸다. 균형을 잃은 내 몸은 남자의 팔에 부딪히고 나서야 겨우 균형을 되찾았다.
“미, 미안해요.”
공연장까지는 겨우 다섯 코스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은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 하차벨을 눌렀다. “이번에 내려야 해요.”하고 내가 조그맣게 말했다.
“나도 내려.”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며 남자는 내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주었다. 삐이이이, 하는 버스의 비명이 끝나기 직전에야 우리는 겨우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어본다.
“그런데 그쪽은 여기 웬일이에요?”
“공연장에 왜 오겠어?”
“그쪽도 이 뮤지컬 보러 왔어요?”
나는 공연장 벽에 걸린 커다란 현수막을 가리키며 물었다. 남자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랑 보는데요?”
항상 그렇듯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김수진.”
어쩌지? 일단은 이 남자랑 같이 있지 않으면 될 거야. 제법 큰 공연이니까 조심하면 괜찮을 거야,
“젠장,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직 공연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어 공연장 주변은 한가했다. 갑자기 내게 “가자.”라고 말한 남자는 내가 뭐라 말할 겨를도 없이 막무가내로 나를 공연장 1층의 카페로 끌고 들어갔다.
“뭐, 뭐예요?”
억지로 끌려들어 간 모던한 인테리어의 카페 안은 시원하고 쾌적했다. 잔잔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배경으로 서너 명의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결국 나는 반항하기를 포기하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진 창가의 짙은 파란색 의자에 앉았다. 짙은 파란색은 흡사 바다의 그것과 닮아있어서 나는 마치 바닷물 속에 앉아버린 기분이 들었다.
“뭐 마실래?”
주로 손님들이 공연 전후로 잠깐 머물기 때문인지 주문은 테이크아웃 형식이었다.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휘핑크림 듬뿍 얹어서.”
내 말에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다.
“배고파? 점심 안 먹었어?”
“당연히 먹었죠, 시간이 몇 신데. 왜요?”
“살쪄, 크림은 빼.”
남자는 카운터로 걸어가, 애플 주스와 아이스 카라멜 마끼아또 - 물론 크림은 빼고 - 를 주문했다. 나는 황망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새 남자가 손에 커피 두 잔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아, 얼마예요?”
내가 가방에서 지갑을 찾으며 물었다.
“됐어.”
“그래도-”
“됐다고.”
정말 친절한 건지 무례한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뭘 그렇게 빤히 쳐다봐?”
나는 급히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남은 대응 방법은 시치미를 떼는 것뿐이다.
“내가 언제요?”
“왜, 너무 잘생겨서 눈을 못 떼겠어?”
태연한 척하며 커피를 마시던 나는 그만 입에 든 액체를 뿜을 뻔했다.
“어디 아파요? 갑자기 왜 그래요?”
뭐,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제법 잘생긴 편에 속하긴 하지만. 나는 얼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요? 너무 예뻐서 눈을 못 떼겠어요?”
남자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 웃는다.
“솔직히 예쁜 얼굴은 아니잖아?”
“굳이 그쪽이 그렇게 콕 집어서 말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거든요?”
살짝 기분이 상한 나는 입을 쑥,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러고 보니 남자와 이렇게 길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다. 나한테 실망했을까? 아마도 그렇겠지. 남자는 내가 누구와 공연을 보러 왔는지 묻지 않았다.
“그만 나갈까요?”
나는 남은 커피를 단번에 들이마신 후 말했다.
“먼저 가. 김수진은 여기로 오라고 할게.”
“고마워요.”
남자를 혼자 남겨두고 나는 로비로 나갔다. 마침 그 사람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왜 자꾸 실실 웃어, 기분 나쁘게?”
남자가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쓰며 투덜거린다. 공연장에서의 일 이후로 남자는 다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게 어쩐지 무척 기뻤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쁠 건 뭐예요? 아무튼 꼬였다니까, 정말!”
나는 명랑하게 대꾸한다. 그리고는 다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사장님께서 부탁한 얼음물을 준비한다. 오랜만에 카페에 나오신 사장님은 계속 전화 통화를 하며 서류를 살피시더니, 조금 전부터는 큐레이터라는 사람들이 와서 회의를 하고 계셨다. 사진전, 내일부터라고 했던가? 나는 회의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얼음물이 찰랑거리는 유리컵을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사장님은 들고 계신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며 말씀하신다, “고마워.”
“아, 잠깐만.”
조용히 돌아서는데 사장님께서 갑자기 나를 불러 세우셨다.
“내일이 생일이라며, 다아씨?”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소곤소곤, 마치 장난꾸러기처럼.
“보자, 내일은 약속이 있을 테고. 그럼 오늘 저녁은 어때? 그동안 일하느라 수고도 했는데 겸사겸사 식사나 같이 하면 어떨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꼭 무언가에 홀린 듯.
“좋아. 현아, 너도 알았지?”
“싫어요. 저까지 끌어들이지 마세요, 전 빠질래요.”
계속 사장님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남자에게서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뭐,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지만.
“현아.”
사장님이 낮은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짧은 순간,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호 같은 것이 오간 듯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남자였다. 남자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알았어요.”라고 대답한다.
“이거 미안합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할까요? 이 주제는-”
회의는 다시 시작되었다.
“약속 있는 거 아니었어? 귀찮게.”
남자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전시회장에서 뵙겠습니다, 선생님.”
회의가 끝나셨는지 큐레이터들과 사장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마감 준비하고 있어, 나갔다 올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사장님은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셨다.
“대충 정리하자. 설거지할래, 바닥 닦을래?”
“설거지요.”
나는 방금 전까지 손님들이 있던 테이블로 가서 사장님의 서류나 사진들을 최대한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컵과 그릇을 챙겼다. 내가 설거지를 시작할 때 남자도 바닥을 닦기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딸랑딸랑- 종소리와 함께 사장님께서 손으로 부채질을 하시며 카페 안으로 들어오신다.
“여전히 푹푹 찌는구나, 벌서 8월 말인데도.”
우리가 마감을 하는 동안 사장님은 테이블로 돌아가셔서 서류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빠른 속도로 바닥을 닦은 남자가 막 블라인드를 닫으려던 때였다. 사장님께서 커다랗게 남자를 향해 소리치셨다.
“아, 블라인드는 닫지 않아도 돼.”
“왜요?”
남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묻는다.
“여기서 먹을 거니까, 저녁.”
사장님의 대답에 놀란 나와 남자는 동시에 소리쳤다.
“네?”
“아저씨!”
하지만 사장님은 아무 말도 못 들은 척했다.
“자, 그럼 이제 슬슬 장을 보러 가볼까? 다아씨, 같이 갈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요?”
사장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저씨!”
“자, 서두르자고, 다아씨.”
이번에도 사장님은 남자의 말을 무시하셨고 의도적인 게 분명했다, 나는 앞치마도 벗지 못한 채로 사장님께 떠밀려 얼떨결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더위는 여전하지만 태양만은 계절을 잊지 않아서 거리는 벌써 조금 어둑어둑해졌다.
“어때, 다아씨?”
“네?”
“현이는 역시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지?”
생각보다 괜찮은 아이, 예전에도 그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땐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그때처럼 간단하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이라는 형용사가 너무 많은 의미를 포함하기에-
“나도 현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다아씨와 똑같이 생각했었어. 세상에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었지. 말투는 퉁명스럽고 표정은 무뚝뚝하고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어.”
왠지 그 모습이 상상이 가서 나는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보여주는 모습만이 전부가 아닌 아이란 걸, 다아씨도 알지?”
웃음을 멈추고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