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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Jan 21. 2023

21화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래서 제로

“분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일이야, 그런 녀석이 나의 제일 친한 친구라니.”

그날 이후로 남자는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나도 굳이 침묵을 깨트리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침묵은 어딘가 불편하다. 확실히, 이것은 이전과는 다른 침묵이다. 우리는 서로를 강하게 의식하면서도 고의적으로 침묵을 지킨다.

“자기들 싸웠어? 분위기가 이상하네.”


오랜만에 나타난 지혜 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묻는다. 나는 벌써 몇 시간째 같은 페이지만 노려보며 프로이트와 씨름하고 있는 남자를 힐끗, 본다.


“참, 이것 좀 읽어 봐줄래?”


지혜 언니는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곧 본론으로 들어가 두툼한 인쇄물 두 권을 내민다.


“일단은 완성본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네?”하고 되묻는 내게 언니는 싱긋, 웃어 보인다.


“내가 쓴 소설 말이야.”

“아, 드디어 완성하셨군요?”

“응. 그런 의미에서 읽어보고 어떤지 이야기 좀 해줘.”

“저는 이런 거 잘 모르는데.”

“괜찮아, 평범한 독자의 의견을 듣고 싶은 거니까. 두 사람이 내 첫 독자야.”


나는 조심스레 언니의 첫 번째 책을 받아 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딸랑딸랑, 종소리가 지혜 언니의 목소리를 덮었다. “오랜만이다, 현아!”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김영호 팀장님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사람 좋은 팀장님은 “다아씨도 안녕?”하고 내게도 인사를 잊지 않는다.


“영호씨?”


갑자기 지혜 언니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박지혜?”


지혜 언니는 정말 싫은 표정을 짓는다.


“어이, 표정 좀 관리해. 넌 정말 여전하구나?”

“그러는 영호씨도 변죽 좋은 건 여전하네.”

“게다가 여전히 멋있지?”


그에 반해 팀장님은 여유롭게 장난까지 치며 언니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현아, 나도 시원한 커피 한 잔만.”

“다른 데 앉아, 자리 많잖아?”


언니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팀장님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거운 듯 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는다. “뭐야, 왜 웃어?”하고 언니가 인상을 쓴다.


“화장 좀하고 다녀, 이제 나이도 있는데.”

“내, 내 마음이야! 영호씨가 무슨 상관이야?”

“민폐야, 다른 사람들한테.”


위험해, 라고 위험한 기운을 감지한 내 본능이 경고의 메시지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주시한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 같은 사이라고 생각하며.


“정말 무례한 것도 그대로구나, 영호씨는?”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잖아. 넌 잘 지냈어?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걸 보니 아직 백수야?”


표정이 점점 더 굳어가더니 언니는 결국 의자를 박차고 일어서고 만다.


“그래도 오랜만이라고 잠시나마 반가워한 내가 바보지. 먼저 일어설게, 볼일 보고 가.”


하지만 팀장님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명함 한 장을 마음대로 언니의 지갑 사이에 꽂는다.


“천하의 박지혜가 반가워해주다니, 이거 영광인데? 내 명함이야, 연락해. 다음에 식사라도 한 번 하자.”


언니는 이를 바득, 갈며 “커피는 내가 살게.”라며 테이블 위에 만 원짜리 지폐를 탁, 놓았다. 문 앞까지 걸어간 언니는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싱긋, 웃는다.


“참, 식사는 사양할게. 재수 없는 사람이랑 마주 보고 밥 먹으면 소화가 잘 안 될 것 같아서 말이야.”


문을 쾅, 닫고 언니는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팀장님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린다, 뭐가 그렇게 우스운 건지 알 수 없지만. 내내 커피를 가져다줄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나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 눈빛을 교환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커피 드세요.”


남자가 팀장님께 다가가 커피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현아. 그리고 이건 지혜가 사는 거래.”


그러면서 팀장님은 언니가 놓고 간 만원을 가리켰다.


“그런데 두 분은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

“아, 전 여자 친구.”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팀장님이 말했다. 너무도 가벼운 그 말투에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지금 전 여자 친구라고 했어?


“전 여자 친구요?”

“응, 헤어진 지 벌써 4년쯤 되었을까?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팀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역시 여기 커피가 제일 맛있다니까!”라며 웃었다.




“야, 저기.”


출근을 하자마자 남자가 창가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가 가리키는 곳에는 재인 선배가 커피를 마시며 앉아있었다.


“선배! 아침부터 웬일이세요?”

“아침부터 네가 보고 싶어서.”


나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회사는요?”

“끝났지, 인턴 기간.”

“그럼 다음 학기엔 복학하세요?”

“아마도.”

“학교에서 자주 봐요, 가끔 점심도 같이 먹고.”


나는 아예 선배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참, 그때 찍은 광고는 언제부터 나와요?”

“아마 이번 주부터 시작될걸? 용케도 그런 걸 기억하고 있구나?”

“당연한 거 아니에요? 완전 기대하고 있어요.”


선배는 쑥스럽다는 듯 웃는다.


“전에 윤후 선배가 그랬어요, 선배는 선택을 망설이지 않고 목표를 향해 확실히 나아간다고.”

“그 녀석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선배만 모르는 거 같은데요?”


나는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선배는 웃지 않았다.


“하긴, 넌 늘 윤후 편이었지.”


내가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선배는 장난이었다는 듯 씨익, 웃는다.


“인정하긴 싫지만, 윤후가 좀 멋지긴 하지?”

“선배, 그게-”


하지만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가끔은 애늙은이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제멋대로인 나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녀석이야. 분하면서도 자랑스러운 일이야, 그런 녀석이 나의 제일 친한 친구라니.”


선배는 평소와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다.


“전 사실 선배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상적인 모습을 한 친구를 바로 옆에 두고 유치한 질투나 치졸한 시기를 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나는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보기엔 내가 전혀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는 걸로 보여? 아니야, 틀렸어. 나는 방금도 윤후를 질투했어. 시기도 하고 미워도 해. 하지만 그런 감정들보다 윤후를 좋아하는 마음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래서 숨기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야.”


나는 아니었다. 연주를 좋아하는 마음은 그런 감정들보다 작았다. 나를 친구로 대하는 그 아이의 곁을 맴돌며 내내 그 아이를 시기하고 미워했다.


“아마 그건 윤후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 녀석은 겉보기엔 완벽해 보여도 사실은 허점투성이거든. 예를 들어 그 녀석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너-무 배려해. 그게 언뜻 보기엔 대단한 성인군자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그런 그 녀석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도 분명히 있어. 뭐랄까, 세상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래서 제로인 셈이니까.”


플러스와 마이너스, 그래서 제로. 선배다운 표현이었다.


“그 녀석은 그저 누구에게나 친절했을 뿐이지만, 그런 마음을 오해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또 그로 인해 상처받는 사람도 있을 거야.”


재인 선배는 알고 있을까, 오랫동안 그 사람을 좋아했던 내 마음을? 알고 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해 왔을까? 가엾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어리석다고 생각했을까? 재인 선배는 알고 있을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건지? 알고 있다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뭘까?


“그렇지만, 그런 성격은 타고난 기질이라서 노력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보거든, 난. 중요한 건 아마 그 녀석도 그걸 모르는 건 아니란 거야. 음, 아예 자신이 바보라는 것도 모르는 바보랑 자신이 바보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바보, 둘 중에 누가 더 바보인 것 같아?”


나는 재인 선배의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도 모르는 바보는 정말 구제불능이지만, 자신이 바보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바보도 ‘어쩔 수 없다는 점‘에서 바보인 건 결국 마찬가지 아닐까? 점점 생각의 미로로 빠져드는데 선배가 탁, 하고 테이블을 쳐서 나를 미로에서 꺼내주었다.


“그만, 어차피 이건 수학공식과 달라서 명확한 답이란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다만 자신이 바보인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바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보다는 더 불행하지 않을까? 윤후도 답답할 거야, 자신은 선의를 가지고 한 행동들이 의도치 않은 피해를 불러오니까.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 남들과 똑같이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어. 다만, 남들보다 그것을 감추는 연기를 잘하는 ‘더 불행한 바보‘들일뿐이야.”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선배들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줄곧 내 감정에 취해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어땠을까?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그 녀석도 좀 더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 사람이 부러웠다, 이런 좋은 친구가 있는 그 사람이.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이야기를 늘어놓았네, 이거 때문에 온 건데.”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선배는 테이블 위에 작은 티켓 한 장을 내려놓았다. 나는 몸을 기울여 티켓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유명 뮤지컬의 이름과 좌석번호가 적혀있었다.


“조금 이르지만, 생일 선물이야.”




ⓒ Pexels, Min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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