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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Jan 21. 2023

22화 언젠가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예요

선배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을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아, 배불러!”


안과 밖의 온도 차이 때문에 뿌옇게 흐려진 식당의 유리문을 열자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여름밤의 공기가 밀려온다. 뜨거운 공기는 습도까지 높아 절로 숨이 턱, 막혀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화도 시킬 겸 좀 걸을까?”

“좋아요!”


우리는 대낮처럼 환한 거리를 나란히, 걷는다. 포장마차에서 풍기는 매콤한 떡볶이 냄새, 음반 가게에서 틀어놓은 달콤한 멜로디, 과일 노점의 아저씨가 떨이를 외치는 소리, 자전거를 타고 스쳐가는 학생들. 평화로운 여름밤의 풍경에 마음이 금방이라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뛰면 안 돼!”


그것은 마치 90년대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갑자기 달려드는 아이 때문에 나는 균형을 잃었고, 그 사람은 재빠르게 휘청거리는 나를 잡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우리에게 사과를 한 후 아이의 엄마는 저만치 앞서가는 아이를 쫓는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듯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우리는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말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니?”


먼저 정신을 차린 그 사람이 나를 품에서 놓아주며 걱정스레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이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건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그런 그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내게 친절하게 대해줄 그 사람의 상냥함을 이용하고 있다.


“아,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아이스크림?”

“밤인데도 참 덥네요. 아, 더워라.”


손바닥으로 어색하게 부채질까지 해가며 나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마침 아이스크림 가게가 보였다. 마침 재인 선배가 인턴으로 일했던 회사의 브랜드였다.


“저기 있네요, 아이스크림 가게!”


나는 앞장서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형형색색의 아이스크림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보랏빛 라벤더, 푸른 페퍼민트, 연분홍빛 라일락, 빨간 애플민트, 초록색 바질, 하얀 케모마일.


“전 라벤더로 할래요. 선배는요?”

“주문할게요, 라벤더 하나랑 레몬밤 하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과 레몬밤. 레몬밤은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 주는 향을 가지고 있다, 마치 그 사람처럼.


“9천 원입니다.”


나는 얼른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아이스크림을 제가 쏠게요.”라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을게.”


우리는 다시 거리로 나왔다. 손에 든 아이스크림만 빼면 5분 전과 다를 게 없는 어느 여름밤의 거리로.


“자, 가실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 사람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아이스크림 가게의 스피커에서 음악이 커다랗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그 노래다. Someday my prince will come. 프로방스의 보랏빛 라벤더 밭을 배경으로 하늘거리는 드레스를 입은 신인 여배우가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담은 광고가 대형 스크린에 비친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의 손바닥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늘어선 전광판은 마치 축하를 위한 폭죽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거리를 걷는다, 손을 꼭 잡고.


- 언젠가는 나의 왕자님이 오실 거예요.


“이 광고, 재인 선배네 팀에서 기획한 거래요.”

“정말?”

“역시 대단해요, 재인 선배는.”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말을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 사람의 크고 부드러운 손과 맞닿은 나의 작고 못생긴 손에 쏠려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횡설수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런 나를 무척이나 따뜻한 눈길로 바라봐준다.


“응, 가끔은 녀석이 부럽기도 해. 아, 물론 열에 아홉은 멍청한 짓이지만.”

“재인 선배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요.”

“응? 뭐라고 했는데?”

“음, 그건 비밀이에요!”


그 사람은 피식, 웃는다.


“신기한 일이야. 부모님들끼리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면 재인이랑은 절대 친구가 되지 못했을 거야. 내가 수학을 좋아하면 그 녀석은 국어를 좋아하고, 내가 농구를 좋아하면 그 녀석은 축구를 좋아했으니까.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시 선배들은 닮았어요.”

“우리가?”

“선배들은 사람들의 단점보다는 장점을 먼저 봐주잖아요. 특히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인정하고 동경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절대.”


선배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건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것은 선배들이 눈에 띄게 수려한 외모나 우수한 재능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배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을 조금은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나도 몰랐던 나의 장점을 찾아주고 진심으로 칭찬해 주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니까.


“아니, 우리는 조금도 멋지지 않아.”


그 사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형편없어, 아주. 알게 되면 실망할 거야.”


나는 그때 그 사람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눈에는 멋있게만 보이는 사람들이니까.


“누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였다. 다진이는 라면 한 봉지와 콜라 한 병을 들고 막 슈퍼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사람의 손을 놓았다.


“슈퍼 다녀오는 거야?”

“응, 배고파서.”

“엄마 안 계셔?”

“아빠랑 같이 외갓집 가셨어. 이모부 생신이라던가?”

“아, 그렇구나.”


어색한 대화가 오간다.


“참, 이쪽은 윤후 선배.”

“안녕, 오랜만이네. 예전에 한 번 봤었는데 기억나니?”


다진이는 꾸벅, 인사를 하며 “누나 졸업식에서 봤었잖아요.”라고 퉁명스레 대꾸한다.


“응, 맞아.”


내가 대신 대답하며 다진이를 잡아끌었다.


“선배,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아니야, 그만 들어가.”


나는 그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조심해서 가세요.”


멀어져 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 후 나는 다진이를 향해 돌아섰다. 다진이가 멀뚱히 나를 보고 있었다.


“뭐 해? 들어가자.”

“이 상황은 뭐야?”


다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는다. 나는 퉁명스레 “뭐가?”라고 되묻는다. 다진이의 의도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저 형은 누나 친구랑 사귀는 거 아니었어?”


다진이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있었다.


“연주랑은 헤어졌어.”


다진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이렇게 묻는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다진이는 나를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나를 질책하는 걸까?


“나는 누나가 그 형이랑 만나는 줄 알았는데. 그럼 그 형은 뭐야?”

“그 형?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데?”


설마, 그 남자? 나는 피식, 웃었다.


“윤현? 잘못짚어도 한참을 잘못짚었어, 이 찐따야. 그만 들어가자, 피곤해.”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곧장 욕실로, 다진이는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들기 전까지 각자의 방에 틀어박혔다.


[ 잘 들어갔니? 나도 집에 도착했어. ]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 사람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나는 재빨리 답장을 보낸다, 잘 들어왔어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진이의 말 때문에 심란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편안해진다. 레몬밤 같은 사람.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침대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리고 천장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그 사람이 잡았던 손. 눈에서 레이저라도 나올 듯 그 못생긴 손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 왜 그랬을까?


열대야가 찾아온 그날 밤,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exels, Natalie B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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