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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Feb 22. 2023

31화 여름의 끝자락

단 며칠 후면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계절을 잊지 않고 불어오리란 것을.

이틀 동안 너무 많은 일은 겪었던 나는 쉽게 잠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거실에선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엄마, 전화 좀 받아!”


나도 모르게 잠결에 소리쳤다. 하지만 전화벨은 끊이지 않고 울려댄다.


“엄-”


다시 소리를 지르려다가 집에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재빨리 일어나 전화기 앞으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평일 대낮,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의 종류는 뻔했다. 쓸데없는 광고 전화일 거라고 확신한 나는 몹시 무뚝뚝하게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나는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인기척을 냈다. “고객님.”하고 억지로 상냥한 척하는 여자의 음성이 곧 들려올 것이 분명했다.


“한다아씨 댁이죠?”


하지만 수화기 속의 상대방은 뜻밖에도 무뚝뚝한 말투의 젊은 남자였다. 나는 빨리 전화를 끊고 싶어 “그런데요?”라고 짜증스레 대답했다.


“나야.”


응? 앗! 뒤늦게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한 나는 화들짝 놀라 “네에?”하고 커다랗게 대답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두고 싶었는데 미안해. 카페로 좀 와줘야겠어, 최대한 빨리.”


남자는 조금 빠른 말투로,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쏟아냈다. 나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야, 듣고 있어?”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남자가 묻는다. 나는 얼른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생긴 걸까? 남자의 목소리에게 긴박함 같은 것이 느껴져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알았어요, 금방 갈게요.”


전화를 끊고 나는 서둘러 다시 외출 준비를 했다. 빠른 속도로 샤워를 하고 바쁜 와중에도 비비크림은 잊지 않고 발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두 블록.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잠깐의 시간이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녹색 신호가 켜지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에요?”


딸랑딸랑-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문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이던 남자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저기-”


남자는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창가 쪽을 가리켰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 나도 창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불러달라고 했어.”


그곳에는 선미가 있었다. 선미를 보는 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던 생각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선미에게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차라리 연주나 수진이였다면 좋을 텐데.


“미안한데, 자리 좀 피해 줄래?”


선미의 말에 남자는 순순히 책을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무, 무슨 일이야?”


선미는 테이블 위에 뭔가를 올려놓았다.


“일단 이거. 휴대폰은 가방 안에 넣어놨어.”


내가 식당에 놓고 온 내 가방이었다. 직접 가져다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나는 머뭇거리며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고, 고마워.”


목이 타서 앞에 놓인 물을 꿀꺽꿀꺽, 비워버렸다.


“나는 솔직히 이 상황이 이해도 안 되고, 무엇보다 네가 제일 이해가 안 돼.”


역시 선미다. 선미는 상대방을 배려한답시고 의례적인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지 않는다.


“만약 네 말대로 넌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더라도 연주를 위해서 혹은 수진이를 위해서 너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줬어야 했어. 하지만 넌 그러지 않았지.”


내가 그 사람과, 남자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었어야만 했을까? 연주와 헤어진 그 사람과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걸까? 아르바이트를 그만뒀어야 했다는 걸까?


하지만 내가 왜 그래야만 해?


“나는 제 3자라서 끼어들 자격이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하지만 수진이와 연주는 착해빠졌으니까, 네가 대신 나서는 거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선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이런 식으로 반응할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렇지만 넌 정말 제 3자니까, 나서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난 더 이상 할 이야기 없는데 그만 일어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때 선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정말 이대로 괜찮아?”


뜻밖의 말에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선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만약 나라면 진작 그렇게 했을 거야. 두 사람의 관계를 부수는 건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 윤후 오빠와 연주는 네 마음을 알고도 계속 사귈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간단한 방법을 두고 왜 너는 그렇게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기만 했을까?”


항상 두 사람이 헤어지길 바라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고통스러웠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었다. 나는 그 사람을 뺏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내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네가 용서도 안 되고 이해도 못해. 하지만 우리가 잘한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우리는 친구라기보다는 지인, 그저 아는 사람에 가까웠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람들은 점점 친구보다는 지인을 사귄다. 눈에 거슬리는 점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설사 그런 점을 발견하더라도 굳이 지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는 사람들과 쓸데없는 감정소모를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안해. 사과할게.”


선미가 말했다.


꼭 지금이 아니었어도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상황이 닥쳤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런 계기가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불만을 토로하며 서로의 속마음을 확인할 기회. 앞으로 나아가야 했던 것은 단지 그 사람과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앞에 낭떠러지가 펼쳐지더라도, 그래서 지금처럼 우정이라 믿었던 우리의 얄팍한 포장마저 갈기갈기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까지고 모른 척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머리채라도 잡고 싸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시시한 걸.”


남자는 창고 어딘가에서 찾아온 낡은 야구 모자를 내 머리에 씌워주곤 기특하다는 듯 가볍게 툭툭, 쳤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얼른 항복의 표시로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내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농담이야, 농담.”


나는 모자를 똑바로 고쳐 쓴 후 웬 모자냐고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듣지 않아도 대답은 뻔했다. 이곳엔 그 여자가 남긴 흔적이 가득하니까.


“나온 김에 저녁이나 같이 먹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여자들이 왜 이 남자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쪽이 쏘는 거죠?”

“그래, 알았어.”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여름의 끝자락, 해는 확연히 짧아졌지만, 후덥지근한 공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날까, 자꾸만 입버릇처럼 되뇌게 되는 시기. 그러나 알고 있다, 단 며칠 후면 어느덧 서늘한 바람이 계절을 잊지 않고 불어오리란 것을.




ⓒ Unsplash, Ramiro Pianar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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