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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Feb 27. 2023

34화 “함께 올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말은.

“날씨 참 좋네.”


책을 덮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커다란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반짝인다.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 우리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헝클인다. 남자가 책에서 잠깐 눈을 떼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 미소에 이끌려 나도 싱긋, 웃고 만다. 한쪽씩 나눠 낀 이어폰에서는 느린 멜로디가 나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기하지 않아?”


셰익스피어와 씨름하고 있던 그가 나를 돌아본다. 그리곤 의아하다는 듯 되묻는다.


“뭐가?”

“우리가 이러고 있는 게.”


내 말에 남자는 가볍게 웃음 짓는다. 평화롭고 느긋한, 밀도가 낮은 시간. 바구니가 달린 예쁜 자전거를 빌려, 호숫가를 따라 아름다운 산책로를 달렸다. 허기가 질 즈음, 나무 그늘 아래에 예쁜 피크닉 매트를 깔고 아침에 만든 도시락을 먹었다. 콜드 파스타와 튜나 샌드위치, 해쉬 브라운,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청포도와 오렌지. 별 것 아닌데 남자는 기꺼이 맛있게 먹어주었다. 이래서 여자들이 요리를 하는 걸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점심을 먹고 나선 지나가던 커플이 같이 배드민턴을 치겠냐고 물어와 함께 배드민턴을 치기도 했다.


“정말 의외긴 했어.”


시원한 녹차 한 모금을 머금으며 남자는 흘러가듯 말했다. 이번엔 내가 되묻는다, “뭐가?” 남자는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글쎄.”


“무슨 의미지? 뭐야?”


나의 집요한 문책에 남자의 입술이 묘하게 뒤틀린다. 웃음을 참고 있는 표정이 분명했다. 나는 다시금 그를 채근한다, 왜 웃어?


“음, 의외로 요리 실력이 괜찮아서.”

“의외로?”

“아니, 농담이야.”


내가 눈을 치켜뜨자 남자는 재빨리 꼬리를 내린다. 어쩐지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언제나 당하는 쪽은 나였는데. 사흘째, 어느새 나와 남자는 역할놀이에 흠뻑 빠져있었다. 그즈음의 우리는 누가 봐도 사이좋은,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정말 맛있었어.”


남자가 책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며 말한다. 나는 물끄러미 그가 열심히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았다.


“졸려?”


내가 하품을 하자 남자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묻는다. 아침 일찍부터 도시락을 만든다고 수선을 떨었더니 졸음이 밀려왔다.


“어쩐지 아침부터 너무 무리하는 것 같더라.”


놀림 반, 걱정 반. 남자가 내 머리를 자신의 어깨 쪽으로 끌어당긴다.


“눈 좀 붙여.”


생각보다 이런 자세는 몹시 불편하다. 그럼에도 여자들이 불평하지 않는 까닭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남자에게선 잘 건조된 빨래에서 나는 보송보송한 향기가 난다. 나보다 조금 느린 호흡, 그에 맞춰 그의 어깨가 조금씩 올라갔다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그에게 묻는다.


“정말 자도 돼?”

“응, 침은 흘리지 말고.”

“안 흘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잠이 들었다. 꿈에서 나와 남자는 평소처럼 카페에서 화분을 돌보고 있었다. 오늘처럼 청량한 오후였다.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데 창밖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창백한 얼굴의 그 여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커다랗게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현아!”


내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자 남자는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뜬다.


“응? 깼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바람결에 식으며 나는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이유정은 어떤 사람이었어?”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말처럼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름에 남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어.”


나를 잠시 바라본 후 남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다는 체념이 어린 목소리였다.


“조금 특별한 아이였어.”


그는 ‘특별한‘에 힘을 주어 말했다.


“순수하지만 결코 어수룩하진 않았고 도도하지만 상냥했어. 취향과 가치관이 뚜렷하고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했어. 나쁘게 말하면 그냥 고집이 센 거라고 할 수도 있고.”


어느새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사진 속의 그녀를 떠올려보았다. 어렸을 때 이미 그녀는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쯤 그녀는 틀림없이 상당한 미인일 것이다. 그녀의 화려한 외모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매력적인 성격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여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이 남자처럼.


“아마도 그건 방랑하는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 사이에서 스스로를 돌보며 자라야 했기 때문이었을 거야.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더욱 소중한 존재였지.”


서로 닮은 두 아이가 서로를 의지하며 보내왔을 시간을 떠올리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굳이 묻지 않았다면, 남자가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 정말 괜히 물었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꼴이라니. 괜히 적당히 둘러대지 않는 남자에게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만 가자, 버스 타러.”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다. 남자는 순순히 책을 덮고 짐을 챙겨 자전거 바구니에 담았다. 우리는 푸른 잎이 무성한 벚꽃나무가 곧게 뻗은 가로수 길을 따라 천천히 자전거를 끌고 걸었다. 마지막 힘을 다해 빛을 발하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따라 반짝반짝 춤을 춘다.


“이 나무들, 다 벚꽃이지?”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짐짓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마.”

“벚꽃이 필 때 오면 좋겠다.”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살짝 자존심이 상한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변명처럼 덧붙였다.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런 말은.


“함께 올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시골은 도시보다 시원해서 벌써 가을이 찾아온 것 같기도 했다. 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5시 30분. 슬슬 걸어가면 다진이네 학교에 시간 맞춰 도착할 듯했다. 우리는 서동 고등학교를 향해 늦은 오후의 시골 읍내를 가로질러 걸었다.


“와, 무슨 영화 세트장 같네.”


남자는 신기하단 듯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남자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어느새 기분이 좋아졌다. 학교 근처에 다다르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다진이가 나올 때까지 운동장 구석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다진이에겐 다짜고짜 야자를 하지 말고 나오라고 연락을 한 터였다. 키가 큰 포플러 나무의 이파리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서걱, 서로 스치는 소리를 냈다. 몇몇 남학생들이 축구를 한다고 바삐 뛰어다니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는 어떤 학생이었어? 축구하는 거 좋아했어?”


나는 부지런히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눈으로 좇으며 물었다. 남자는 글쎄, 하는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축구는 안 좋아했어.”라고 대답한다.


“그냥 평범했어.”


덤덤한 목소리로 남자는 계속 말을 이어간다.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었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눈에 띄진 않았지만, 눈 밖에 나는 일도 없었지.”

“여자애들한테 인기는 많았어?”

“당연한 거 아냐?”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되묻는다. 붉은 노을이 남자의 얼굴을 물들였다. 붉은 노을. 나는 이렇게 붉게 물든 그 사람의 얼굴을 보며 고백을 했었다. 그 일이 아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농담이야, 인기 없었어. 알다시피 성격이 이 모양이라서.”


하지만 나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인기가 없었다곤 하지만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그는 알게 모르게 관심의 대상이었을 거라고. 몰래 좋아했던 여학생들이 제법 많았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사자만 몰랐을 뿐.


“별로 다른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없었던 것 같아, 그게 지금은 좀 아쉽네.”


그가 생략한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에게는 이유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는 부러운 듯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이랑은 한 번도 이렇게 학교에 같이 있어본 적이 없었어. 어째서일까,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있었는데.”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홀연히 그녀를 입에 올렸다. 그의 중얼거림이 너무 다정하고 애틋해 나는 가슴이 아팠다. 이것은 그에게 너무 깊이 감정이입한 탓일까, 아니면 단순한 질투일까?


“그래도 너랑은 이렇게, 여기에 있을 수 있어서 기뻐.”


그가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가슴이 아픈 까닭은 질투가 분명했다, 나는 하마터면 그의 뺨을 어루만질 뻔했으니까. 하지만 마침 다진이가 나타나 나는 그 충동을 실행에 옮기지 않을 수 있었다.


“누나?”


달려왔는지 숨을 헉헉, 몰아쉬는 다진이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진이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태연하게


“왔어?”하고 아는 체를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안녕, 동생.”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다진이는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홀린 듯 남자의 손을 잡았다.


“보고 싶어서 왔어.”


나는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다진이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럼 저녁이라도 먹으러 갈까?”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안했다.


“먹을 만한 게 없는데, 여긴.”


교정을 나서며 다진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읍내로 되돌아가는 길, 서쪽 하늘이 불타오르듯 빨갛게 변해있었다. 다진이의 말대로 마땅히 먹을 곳이 없어서 좁은 읍내를 두어 바퀴 돌다가 우리는 터미널 근처 낡은 국밥집에 들어갔다.


“그런데 정말 어쩐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다진이가 미심쩍은 시선으로 우리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메뉴 선택의 권한도 없이 사람 수대로 국밥을 한 그릇씩 가져다주는 식당이었다. 우리는 출입구 쪽에 곧장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거나하게 취한 아저씨 두 명이 구석 자리에서 떠들고 있었을 뿐 좁은 식당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대게 말없이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 보고 싶어서 왔다니까.”


다진이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당연한 일이지만.


“참, 전에 이거 갖고 싶다고 했지?”


남자가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USB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남자. 다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와, 이거 그때 말씀하신 경기 영상이에요?”

“응.”

“감사합니다. 주말에 실컷 봐야겠어요.”


나는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경기라는 건, 분명히 무슨 운동의 시합을 말하는 것일 텐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남자와 다진이는 주인 할머니가 국밥 세 그릇을 던져놓고 가실 때까지 계속 내가 모르는 선수들의 이름을 들먹이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옆에 앉은 다진이의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다진이에겐 형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만약 다진이를 지켜줄 수 있었을 형이 있었다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어도 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괜히 다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Pexels, Amy T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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