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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YEON Feb 25. 2023

33화 헤어짐이 아쉬운 연인처럼

어쩐지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이 그 아픔을 더욱 부추기는 듯했다.

“싫어요, 죽어도 싫어요!”


나는 과한 손짓까지 섞어가며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럼 어떡할 거야? 애니메이션이라도 볼 거야?”

“차라리 그게 낫겠어요, 애니메이션이 나아.”


벌써 한참 동안 매표소에 서서 실랑이를 벌이는 우리를 보다 못한 직원이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나섰다.


“저, 고객님, 죄송하지만 정하신 후에 다시 오시겠어요? 번호표를 다시 뽑지 마시고 바로 오시면 됩니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직원의 말에 돌아보니 우리의 등 뒤는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는 서로 자기 탓이라고 투덜대며 물러섰다.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공포 영화가 뭐가 그렇게 무섭다고.”

“무서운 게 아니라, 놀라는 게 싫단 말이에요. 왜 돈을 내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해요?”


우리는 터덜터덜 포스터가 질서 정연하게 꽂혀있는 벽 쪽으로 다가갔다. 박스오피스 순으로 정렬된 것 같았는데 그 끝에 낯익은 포스터가 있었다.


“어, 이 영화 아직도 하는구나?”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무슨 영화?”


남자가 관심을 가지고 물어왔다. 나는 몽마르트르를 배경으로 연인이 키스를 나누고 있는 포스터를 가리키며 대답했다.


“친구의 남자 친구가 이 영화 배급사에서 일하거든요, 그래서 전에 친구가 보여줬어요.”

“흐음, 재밌었어?”

“음, 미묘해요.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어떨지.”


그 포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자가 낯설게 느껴졌다. 언젠가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들어 나는 남자의 팔을 와락 잡아당겼다.


“그, 그냥 이거 봐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남자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본다.


“아무래도 다른 건 영 아니네, 그냥 그쪽이 보고 싶은 거 봐요.”

“뭐? 죽어도 싫다며?”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보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요. 대신 놀리지 말아요, 돈 아깝다고 잔소리도 하면 안 돼요.”


나는 성큼성큼 매표소로 걸어갔고 남자는 천천히 내 뒤를 따랐다. 매표소 직원은 결국 볼 거면서 왜 그렇게 앙탈을 부렸냐는 듯 나를 힐끗 보았다. 그럼에도 예의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표 두 장을 우리에게 건넨다.


“팝콘 먹을래?”

“좋아요.”


팝콘과 콜라를 사고 나니 바로 입장 시간이었다. 컴컴한 통로를 지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계속 생각에 잠겨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차마 말을 걸지 못하고 광고가 나오는 커다란 스크린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조도가 낮아지고 웅성거림이 잦아든다. 나는 휴, 하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 돼?”


남자가 웃음 띤 얼굴로 내게 묻는다. 나는 팔꿈치로 남자의 팔을 툭, 치며 “시끄러워요.”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영화는 처음부터 음산한 배경과 긴장을 고조시키는 음악 소리로 시작했다. 겁 없는 주인공은 그 음산한 배경 속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다. 간도 크지, 무섭지도 않나?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것이 튀어나왔을 때 나는 단연코 가장 크게 비명을 질렀다.


“너 때문에 더 놀랐어.”


남자가 키득거리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보고 말았어, 눈이 마주쳤어!


“또 나올 것 같아.”


남자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고 스크린을 보았다. 그때 나는 다시 그것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대로 남자의 팔에 얼굴을 묻고 이를 악물었다. 아이고, 심장이야!


“거봐, 나올 것 같다니까.”


남자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영화는 100분의 러닝타임 내내 몇 차례나 그것을 등장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나는 처음의 두 번 이후로 한 번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 결국 비극으로 끝난 영화의 엔딩은 스산한 풍경을 비추는 것으로 끝났고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괜찮아?”


남자는 여전히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은 나를 그제야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죽진 않았어요.”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 것 같네.”라고 남자는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가방과 미지근해진 콜라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터라 살짝 현기증이 일었다.


“조심해, 거기.”


하지만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다. 남자가 재빨리 내 손목을 낚아챘다.


“그러게 조심하라니까!”


덩달아 놀란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른다.


“왜 화를 내요?”


남자는 한숨을 깊게 내쉬고 내 손을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감싸 쥔다.


“가자, 계단 조심해.”


나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쪽은 정말 눈도 깜짝 안 하더라, 안 무서워요?”

“무섭긴 왜 무서워?”


하긴, 내가 유난히 겁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지만 남자의 경우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딱히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쪽은 귀신이 없다고 생각해요?”

“글쎄, 대충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런 게 정말 있다면 한 번쯤은 찾아왔을 텐데.”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걸려 더 이상 귀신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참, 어제 다진이한테 누나가 좋으냐고 물어봤어요.”


내 말에 남자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아요, 난 진지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뭐라고 해, 동생은?”

“새삼스럽게 왜 그런 걸 묻느냐고, 하나뿐인 누나니까 당연히 좋다고 하더군요.”

“정말 착한 동생이네, 정말.”


나를 놀리는 말이었지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나가 둘이었으면 안 좋았을 거란 말인가?”

“아, 그런가?”


영화관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면서도 우리는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미끈미끈한 땀이 배어 나왔지만,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그렇게 버스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남자가 제안을 해왔다.


“동생한테 직접 물어보러 갈까?”

“직접?”

“응, 직접.”


뭐야, 이거 진심이야?


“버스 왔네, 가자.”

“어, 그쪽은 이 버스 아니잖아요?”

“데려다줄게, 겁쟁이 아가씨. 귀신 나올까 봐, 무서워서 울면 안 되니까.”


남자는 내 손을 잡아끌고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빈자리가 없어 우리는 나란히 섰다. 잡고 있는 두 손은 여전히 놓지 않고 나머지 한쪽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가려면 오후에 가요.”

“응?”

“수업이 늦게 마치니까.”


남자가 빙긋, 미소를 짓는다. 천진하고 예쁜 미소라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는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으려면 얼마든지 놓을 수 있었는데. 헤어짐이 아쉬운 연인처럼. 묵직한 돌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아파왔다. 이 감정을 대체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 어쩐지 희미한 죄책감 같은 것이 그 아픔을 더욱 부추기는 듯했다.




ⓒ Unsplash, Henrique Ferrei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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