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서.
“뭐 먹을래?”
남자와 나는 조금 거리를 둔 채 나란히 그 늦여름의 거리를 걸었다.
“아무거나, 그쪽이 먹고 싶은 걸로.”
“그럼 뱀탕이나 개구리 뒷다리, 이런 것도 괜찮아?”
유치한 장난. 하지만 싫지가 않다.
“냉면 어때요, 시원하게?”
“그러자.”
남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식당은 우리처럼 막바지에 접어든 여름의 별미를 즐기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나와 남자는 창가의 빈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물냉면 두 개 주세요. 아, 콜라도 하나.”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이. 우리는 주변의 소음과는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졌다. 문득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
“혈액형이 뭐예요?”
침묵을 깨트린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남자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다시 물었다, “혈액형이 뭐냐고 물었어요.” 그제야 남자는 “그런 건 왜 물어?”라고 퉁명스레 되묻는다.
“그냥 궁금해서. 생각해 보니까 나는 그쪽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요. 혈액형이 뭔지 별자리는 뭔지 좋아하는 색은 뭔지. 그런 사소한 것들 말이에요.”
까칠한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던 남자는 결심했다는 듯 자신의 신상을 읊기 시작했다.
“혈액형은 B형이고 별자리는 아마 게자리일걸? 그리고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 더 궁금한 건?”
남자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역시 그랬구나.”
“뭐가?”
“혈액형, 분명히 B형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야, 그거 무슨 의미야?”
“그럼, 가장 좋아했던 수업은? 혹은 성적이 가장 좋았던 수업은?”
나는 못 들은 척 질문을 이어갔다. 어쨌든 남자는 제법 성실하게 대답을 고민한다.
“글쎄, 교양 영어 정도?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지만, 쉬우니까.”
잘난 척하는 말투는 아니었는데, 나는 심기가 뒤틀렸다.
“그쪽, 좀 재수가 없네요. 난 교양 영어, C 받아서 재수강했었는데.”
“너 영문과라면서?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냐?”
“나한텐 식은 죽 아니거든요. 전공이랑은 성적은 별개예요.”
“네, 네. 그렇다고 하자.”
“그럼 반대로, 가장 싫어했던 수업은?”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을 한다, “전자회로.”라고. 뜻밖의 대답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저, 전자회로?”
“응. 전공과목이었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어. 그래서 매번 수업을 빼먹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지. 결국 출석일수가 모자라서 F를 받았어.”
“잠깐만 전공이 건축 아니었어요?”
나는 정리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남자는 무슨 소리냐는 듯 “아닌데?”라고 냉큼 대답한다.
“그러면?”
“전자공학.”
남자와 전자공학이라,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로군.
“당연히 건축인 줄 알았어요. 건축가가 되고 싶었던 거, 아니었어요?”
“어째서? 내가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가?”
참, 그 말은 사장님께 들은 이야긴데. 나는 얼른 “그냥 느낌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래, 맞아. 그런데 건축은 돈이 안 되니까.”
남자답지 않은 말이었다. 내가 의아해한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남자는 짧게 덧붙였다. “우리 부모님의 생각이 그렇다고.”라고. 나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정말 의외네요. 과에서 왕따였죠?”
“그러는 너도 엄청 의외거든. 영어도 못하면서 영문과는 왜 간 건데?”
아픈 구석을 찔린 나는 입을 쭉, 내밀었다.
“흔한 케이스죠, 그냥 성적에 맞춰서.”
그리곤 자조적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한심하게도 말이죠.” 남자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예의 무표정한 얼굴에선 어떤 생각도 읽어낼 수 없었다.
“뭐야, 그 표정은?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거든요?”
남자는 억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학교에 성적 맞춰서 왔을 정도면 아주 바보는 아니었구나?”
“뭐라고요?”
“농담이야, 한심한 걸로 치면 내가 훨씬 더 한심하지.”
남자가 씁쓸한 말투로 말했다. 어쩐지 섣불리 말을 꺼내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을 때 구세주처럼 냉면 두 그릇이 등장했다.
“사실은-”
냉면이 담긴 그릇을 바라보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을 꺼냈다.
“나는 전공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어요. 그냥 윤후 선배랑 같은 학교에만 갈 수 있다면 다른 건 아무 상관없었거든요. 이왕이면 그 사람이랑 같은 과에 가고 싶어서 열심히 공부했는데, 알다시피 안타깝게도 그건 실패했지만.”
남자가 콜라 캔의 뚜껑을 따자 치익- 하고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내 인생은 모든 것이 그 사람 위주로 돌아갔어요. 나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노래만 좋아했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을 나도 좋아하려고 노력했죠. 그 사람의 마음에 드는 아이가 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어요.”
남자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왜 내가 그 사람을 놓지 못하고 그 사람 주변만 맴돌고 있는지 알아요? 한심해 보여도 어쩔 수 없어요, 그 사람이 없는 나는 김 빠진 콜라나 다름없어요.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나는 어떤 책을 좋아했는지, 나는 어떤 노래를 즐겨 들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너무 밝고 아름다워서. 마치 지구가 태양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수억 년 동안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 사람의 주위를 맴돌 수밖에 없었다.
“지금부터 찾으면 되잖아.”
남자는 컵에 방울이 몽글몽글하게 솟아오르는 콜라를 따라서 내게 건넨다.
“그럴 수 있을까요, 정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