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YEON Feb 28. 2023

35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너의 인생에?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시끄러운 벨소리와 함께 액정에 떠오르는 이름을 본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사람이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선배?”

“일어났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그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 네. 어쩐 일이세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그 사람은 결심한 듯 “잠깐 나올 수 있어?”라고 묻는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이렇게 대답했다.


“방금 일어나서 엄청 초췌한데….”


그리고 또다시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괜찮아, 그래도 예쁘니까.”


그 사람이 대답한다. 그 사람의 말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나갈게요.”

“응, 나도 아직 집이니까 천천히 준비해.”


그 사람은 천천히 준비하라고 했지만, 나는 서둘렀다. 준비를 마치고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하니, 집 앞으로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나는 아래에 내려가서 그 사람을 기다렸다. 곧 낯익은 자동차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니에요.”


조수석은 비어있었다. 그렇다, 이제 그 사람과의 만남에 연주가 함께 나올 리가 없다. 나는 비어있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아무것도 못 먹었지?”

“네, 배고파요.”

“그럼 뭐라도 먹자.”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간다.


“선배, 혹시 들으셨어요?”


그 사람이 물어보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응.”


그 사람은 조그맣게 대답한다. 나는 그 사람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 사람은 운전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실망하셨죠?”


나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나를 돌아본다.


“어째서?”

“그러니까 제가….”

“실망하지 않았어.”


그 사람의 목소리는 눈물이 날 만큼 다정했다.


“나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막은 알 수가 없잖아. 그렇지만, 네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좀 더 일찍 연락을 하고 싶었는데, 나름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꾹, 참았어.”


그렇게 말한 후 그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선배는 왜 늘 그렇게 저한테 친절해요?”

“글쎄, 어째서일까?”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은 듯 그 사람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재인 선배는 제가 선배들의 첫사랑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나는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깜짝 놀라며 내게 되묻는다.


“뭐? 재인이가 그렇게 말했어?”

“네, 그게 정말이에요?”


그 사람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 사람은 어쩐지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실은 모든 게 내 책임인 것 같아서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어.”


뜻밖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그 사람을 돌아봤다.


“선배! 그렇지 않아요, 어째서 선배가-”


나는 대체 무슨 짓을 저질러 버린 걸까.


“그건 선배의 잘못이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 나는 정말로 결백할까?”

“선배는 선배의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어요. 제가 멋대로 선배를 좋아했던 것뿐, 선배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모를 리가 없었어. 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야. 너무 소중해서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 내내.”


나는 그저 내 감정에만 취해 있느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했다. 나는 정말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인간이었다.


“그때 별장에서 너와 현이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 비로소 깨달았어, 너와 재인이가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는 걸. 그게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한 건.”

“선배는 알고 있었어요?”

“남자에게도 직감이란 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 사람은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마. 내가 잘못한 게 없듯이 네가 잘못한 것도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그 아이도, 우리는 모두 어떤 과정 위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정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제까진 날 좋아했고 내일부턴 그 앨 좋아하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일단은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봐, 그러면 곧 결론에 다다르겠지.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윤후 선배를 좋아했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나의 보물이었다.


“다아야, 난 네가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동안 나로 인해 받은 상처 때문에 네가 위축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런 말, 너무 늦은 것 같지만.”


눈물이 뚝뚝, 흘렀다. 아주 오래전, 나는 그 사람의 손은 괜찮은지 물어보지 못했다. 나를 위해 농구공을 막아줬던 그날 이후로 며칠이나 손목에 파스를 붙이고 다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나는 그런 아이였다. 지금도 나는 그 사람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선배의 마음은 괜찮아요?”라고.


“그럼 일단은 맛있는 걸 먹자.”


그 사람은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허겁지겁 카페로 달려가니 남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아이스커피 두 잔을 들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난간에서 몸을 떼어내고 말한다.


“왔어? 그럼 가자.”

“어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산책할 겸 좀 걷자.”


확실히 환절기가 되니 하루가 다르게 계절의 변화가 느껴진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


“어디 가는 건데?”

“아저씨한테.”

“아저씨?”


남자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인다.


“사진전, 오늘이 마지막 날이야.”

“그럼 선물이라도 준비할걸!”


급한 대로 갤러리 근처 꽃집에 들러 작고 예쁜 제라늄 화분 하나를 샀다. 그리 넓지 않은 갤러리는 정숙하고 한산했다. 사장님은 입구 쪽에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마도 인터뷰 같은 걸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를 발견한 사장님은 여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신다.


“저어, 이거, 달리 마땅한 게 생각나질 않아서요. 현이랑 같이 골랐어요.”


나는 들고 있던 제라늄 화분을 쭈뼛거리며 내밀었다. 사장님은 활짝, 웃으시며 화분을 받아주신다.


“고마워. 오, 이런, 정말 아름다워.”


그리곤 여자를 향해 “제가 아끼는 아이들이랍니다.”라고 우리를 소개하셨다. “반가워요.”하고 살짝 웃으며 인사를 한 후 여자는 우리를 유심히 뜯어본다. 뭔가 이야깃거리가 없는지 먹잇감을 노리는 동물처럼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나는 그 시선이 불편해서 한 걸음 물러서 남자의 뒤쪽으로 몸을 반쯤 숨겼다. 하지만 남자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눈치였다, 불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이윽고 여자가 뭔가를 알아차린 듯 눈을 반짝이며 사장님을 향해 물었다.


“이번 전시에 영감을 주었다는 그 소년이로군요? 아, 이제는 청년인가요?”


사장님은 대답 대신 긍정의 의미로 살짝 미소를 지으셨다.


“초상권 사용료를 지불하느라 등골이 휘는 줄 알았습니다.”


사장님의 장난스런 말씀에 여자는 조금 경망스러울 정도의 웃음으로 대응한다. 나도 그 말이 그저 농담인 줄 알고 조그맣게 따라 웃었다. 하지만 남자만은 못마땅한 듯 눈을 내리깔았다.


“음료수라도 한 잔 하련?”

“아뇨, 전시부터 볼게요.”


더 이상 이 자리에 머물며 시시껄렁한 농담거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듯 남자는 단호히 대답했다. 그리곤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아당긴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사장님께 꾸벅, 인사를 한 후 남자가 이끄는 대로 몸을 돌렸다.


“신경 쓰여?”


불쑥, 남자가 물었다. 나는 갠지스 강에서 명상을 하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도 이미 아실 거야. 그러니까 그렇게 눈치 볼 거 없어.”


나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이 남자는 내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다니까, 정말. 사실 나로선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장님은 바로 이유정의 아버지가 아닌가? 이유정, 절대 내가 이길 수 없는 여자. 그런데 남자의 말에 따르자면 사장님도 남자의 마음을 알고 있단 말인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거?


“그런 복잡한 표정 짓지 마. 정말 괜찮으니까. 어차피 아저씨는 그 녀석이랑 내가 더 이상 얽히지 않는 걸 더 원하실 테니까.”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면서도 헤어지게 된 건 사장님의 반대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사장님은 남자를 좋아하는 걸. 아까도 아끼는 아이들, 실은 남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을 테지만, 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던가?


“뭐, 난 아무 생각 없었는데.”


어색한 거짓말을 해본다. 남자는 기꺼이 그 거짓말을 눈감아준다.


“그럼 다행이고. 너라면 또 쓸데없는 생각으로 혼자 고민하고 있을 것 같아서.”


정곡을 찔렸다.


“너란 아이는 생각이 많은 건지 생각이 전혀 없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뭐라고? 그거 욕이지?”

“그럼 칭찬일까?”


나를 놀리려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던 남자는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다. 오늘 처음으로 제대로 웃는다는 걸 본인은 알고 있을까? 그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고. 수진이도 알고 남자도 알고 사장님도 알고 하지만 나만 모르는 그녀. 하지만 이렇게 남자의 옆에 있으면서 조금씩 알아가도 되지 않을까?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는지, 어째서 헤어져야만 했는지, 그리고 지금 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지. 천천히 알아가도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직 시간이 많으니까.


“아, 정말 재미없네.”

“난 재밌는데.”


어제, 그리고 오늘. 이 사진전의 주제였다. 사진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리 어렵지 않은 사진들이 차분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전시의 대부분은 오랜 시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찍어 짝을 이룬 사진들로 채워져 있었다. 다만 내 마음에 걸렸던 것은 미로처럼 복잡한 전시실 구조였다. 마치 누군가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 자꾸만 파고드는 것처럼 꺼림칙한 기분. 나는 그것을 무심코 넘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때 나는 어떤 것을 직감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거의 마지막인 것 같은데?”


우리는 마지막 전시실로 들어갔다. 파티션으로 나눠진 각 전시실에는 작게 부제가 붙어있었는데 내가 그 전시실이 마지막 전시실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마지막, 그것이 그곳의 부제였다.


“어, 이건?”


그 전시실 안은 남자와 이유정으로 가득했다. 흠칫 놀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사색이 된 걸 보니, 본인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었다. 초상권 사용료, 그 말이 번뜩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건가!


“젠장, 빌어먹을!”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하지만 어쩐지 거기에서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당황했을 뿐인 것이다. 언제나처럼,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유정란 존재에.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교복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진지한 표정으로 커피를 만드는 모습, 어린아이처럼 퍼즐을 맞추고 있는 모습. 내가 모르는 10대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카메라를 향해 한없이 투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뢰와 존경을 담은 눈, 부드럽게 미소를 짓고 있는 입, 행복에 젖은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너의 인생에?


그 사진은 이 방에서 가장 큰 사진이자 가장 마지막에 전시된 사진이었다. 전에 내가 보았던 그 사진, 남자와 이유정이 나란히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 그곳에 걸려있었다. 어느새 남자는 주먹을 꼭 쥐고 그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남자의 눈가가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불그스레하게 부어있었다.


“정말 예쁘다.”


나는 사진 속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남자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어쩌면 내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 건지도 모르겠다.


“역시 재미없네.”


나는 홱, 돌아섰다. 돌부처처럼 꼼작 않고 사진만 보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내 손목을 거칠게 낚아챈다.


“이거 놔!”


내 외침에 울음이 섞여있었다. 막 전시실로 들어서던 커플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느끼곤 돌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왜 나는 항상 이 모양인 걸까? “한다아.”하고 남자가 차분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에서 내 팔을 빼내려고 버둥거릴 뿐이었다. 마침내 그가 나를 놓아주었을 때 우리는 거의 동시에 그것을 발견했던 것 같다. 그 사진의 반대편에 걸려있는 커다란 거울, 그 거울 속에는 우리가 나란히 서있었다.




ⓒ Unsplash, Jackson David


이전 04화 34화 “함께 올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