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녹차밭 한가운데서 찾은 나의 길
외출을 즐기지 않는 제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바로 녹차밭입니다. 사실 저는 원래 단맛을 좋아하기에, 녹차의 떫은맛은 즐기지도 않는 불호에 가까운 차(tea)입니다. 그러나 몇 해 전 학부모님에게 고급 녹차를 선물 받게 되어 맛본 후, 깊게 감탄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 보는 브랜드의 녹차였지만, 이왕 선물을 받았으니 맛은 보자며 차를 우려냈습니다. 몇 분 후, 차를 마시기 전 따뜻한 기운을 느끼려 찻잔에 얼굴을 가까이하는 순간, 그동안 내가 알던 녹차가 맞는지 한 번 더 확인해봤습니다. 내가 여태 알고 있던 녹차의 느낌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첫 모금이 입안과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말린 풀 내음 대신 허브향과 같은 상큼한 향과 함께 씁쓸한 맛의 끝에 살짝 달린 구수함이 차를 완전히 목 안쪽으로 넘기고 나서도 입안에서 끝까지 맴돌았습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녹차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던 녹차는 진짜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니, 이건 녹차가 아닐지도. 그럼 그동안 내가 알던 것은 뭘까. 녹차 말고도 내가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한 것은 또 없을까?’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때 그 녹차 이후로 비슷한 녹차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은 지금도 매우 아쉽습니다.
어쩌면 저와 같이 녹차가 이렇게 깊고 다채로운 맛을 낸다는 것을 모른 채 사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더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에 잠겨봅니다. 아니, 어쩌면 저 또한, 그동안 보편적인 녹차들의 맛으로 실패를 해보았기에 진짜 깊은 맛을 알아볼 수 있던 것은 아닐까요.
저는 지금 이글을 써 내려가며 장인 정신으로 정성을 다해 ‘나’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좋은 찻잎을 골라내고 정성을 들여 가공하듯, 글을 통해 진짜 나를 찾고 정성을 들여 진심을 담아봅니다. 사실, 최근 들어 글을 쓰는 일이, 마음의 상처를 도려내는 것 같아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 글 쓰는 것을 멈추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멈춤의 기간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본업에 충실하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나를 재탄생 시키는 일이라는 것. 하지만 그와 동시에 본업이 없다면 좋아하는 일을 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현실을 더욱 직시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연구하고 찾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는 내내 저는 육체로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저는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사는 것과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부터 원래 내 속에 존재하는 숨어있던 나를 불러내듯 내 마음속의 진짜 나를 찾는 시간이자, 그동안 나인 줄 알고 지내던 가짜인 나를 찾아내고 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글 쓰는 일이 오히려 나에게 쉬는 시간이자 고민을 해결하는 시간이 되어주는 덕분에 이제는 일주일에 한두 번 일지라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글을 쓸 만큼, 그 시간을 더 즐길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이렇게 나의 글을 쓴다는 것은, 진짜 나를 알아보는 눈을 키워주었습니다. 더해서 그 눈 덕에 저는 타인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졌지요.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면, 가장 먼저 나를 알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 속에서, 나에게 화도 내고, 눈물도 흘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점점 진정한 저에게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수없이 흘러간 많은 생각이 정리되면서 후회는 버려지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아나니, 더 좋은 일들을 계획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글을 씁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저는 나만의 이상향 속으로 빠지며 다시 사춘기 예민했던 때로 돌아갑니다. 조금 부끄럽지만,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글을 써 본 적이 있습니다. 부끄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담당 문학 선생님께서 제 글에 대해 한 번도 고운 피드백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제 글은 글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걸까요? 아직도 선생님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일을 겪은 후부터 한동안 글에 관해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다시 글을 쓰게 되면서 –그때도 지금도- 확신합니다. 글을 써 내려가기 이전에, 무엇을 쓸지 제대로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야만 진정 자유로운 기분으로 글쓰기를 즐기는 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저는 숙성의 시간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녹찻잎이 잘 말려지는 시간이 꼭 필요하듯 말이죠. 그렇게 우리의 모든 생각이 잘 말려져 진하고 깊은 생각을 머금은 글을 쓰게 된다면, 녹차 장인이 만든 녹차의 깊은 향과 같은 글을 쓰게 되어 그 글로 인해 저는 그와 같은 말과 행동을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먼 훗날 더욱 성숙해질 제 생각과 글을 기대하며, 저는 오늘도 그날의 녹차 향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더 깊고, 진하게, 우러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