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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니제이 Nov 04. 2024

목적지가 선택되었습니다(17)

#17. 늘어진 시간의 길

결혼 후, 한 달 후쯤이었을까.      

태어나 처음 하는 살림과 회사에서의 늦은 퇴근이 연속되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던 중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예전부터 서로의 어려움이나 힘든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던지라, 나에게 전화하자마자 푸념을 하던 언니에게 나는 “언니, 사람 사는 게 다 힘들어.”라고 이야기를  -아마도 통명스레- 내뱉었다. 그렇게 말이 나온 이유(라고 쓰고 변명이라 읽는다)는, 사실 내 마음도 힘들던 날이었다. 언니에게 전화가 오기 며칠 전 결혼식에 참여한 중학교 동창과 통화하던 중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한 다른 친구와 나의 결혼 생활을 비교하는 말에 기분이 상했기 때문이었다. 자존심도 뭉개지고, 마음도 무겁고. 더구나 당시에 남편의 잦은 외박으로 결혼 생활에 문제가 시작되던 때라 매우 예민한 상황이었다. 덧대어진 친구의 비교는 혼란스럽던 나의 기분에 불을 댕긴 것과 같았다. 

하필 마음이 무겁고 예민한 그때 받은 언니의 전화. 힘들어서 전화 한 언니에게 어제 있던 친구와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남편이 외박을 해서 내가 힘들다는 것을 미혼인 언니에게 말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마지막 자존심이었달까, 언니를 배려하는 마음이었을까. 

고등학생 때부터 알게 되어 서로가 취직해서까지 대구와 경기도의 먼 거리임에도 다른 친구들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마지막 통화로 더는 연락할 수 없었다.      


언니와의 만남은 마치 푸른 바다에서 돌고래들의 만남과도 같았다. 하이텔의 파란 화면 속 언니는 대구 사는 그림 잘 그리는 흰고래였고 나는 사춘기가 온 줄도 몰랐던 경기도 회색고래였다. 그렇게 언니와 나는 파란 화면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중학교 3학년, 언니는 고등학교 1학년일 때, 25년 전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처음 만난 채팅에서 몇 시간을 대화하였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는 것을 여전히 선명한 기억이 말해준다. 이렇게 인연이 된 우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선을 연결하여 여학생 둘이 채팅으로 친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폭탄 맞은 전화료 때문에, 부모님께 혼난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언니는 만화책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렸고, 늘 대화의 소재가 풍부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며, 삐삐의 시절을 지나 휴대폰이 생긴 이후에 더욱 자주 연락하며 지낼 수 있었다. 수능을 볼 때도 취직을 할 때도 항상 서로를 응원하던 우리였다.


많고 많은 언니와 함께한 추억 중에서 가장 기억나는 날은, 함께 동대문에서 신나게 놀았던 날일이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처음으로 친구와 밖에서 밤새도록 놀았던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은 옷이나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나에게도 즐겁게 쇼핑하는 언니를 보는 것만으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고,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았다. 코끝이 시린 날 새벽시간에 언니와 함께 포장마차에서 먹었던 떡볶이의 매콤함과 갓 튀겨낸 뜨거운 튀김이 입안에서 바삭 부서지던 그 감촉과 고소함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즐겁게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언니가 좋았던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혼에 환상이 없었고, 남사친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언니는 늘 확신에 차 있었다. 특이하다고 하달까. 그런 점 때문에 언니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당시의 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결혼에 대한 생각이- 언니와는 깊은 고민도 숨기지 않고 그 먼 거리의 우리 집까지도 편히 놀러 올만큼 좋았던 사이였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왜, 사소한 하나의 일로 단 한 번에 멀어지게 된 걸까.     


어쩌면 변명하지 않는 내 성격과 예민한 마음을 순간 참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난 그 이후부터는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보이는 데 조심하면서, 사는 내내 그때의 나를 자책하고 미워하며 산다. 언니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기도 하고 몇 달 후 사과하려 전화한 나와 통화가 되었다면, 하는 욕심이 묻은 생각을 한다. 그러면 언니는 내가 예민했던 때였구나라며 이해하고 사과를 받아줄 수 있는 이해심 깊은 사람이 분명했다. 

언닌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혼주의자였던 언니의 생각은 달라졌을까? 매년 간다던 유럽 여행은 아직도 하고 있을까? 자신만의 생각이 확실했던 언닌 어디서 뭘 해도 잘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혹여 언니가 이 글을 보고 있다면, 나는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전하고 싶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런 언니를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이 글이 유명해진다면, 언젠가 언니가 그때 왜 그랬냐며 나를 찾아오겠지,라는 희망의 마음을 담아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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