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엄마라는 순례자의 길
친정엄마는 제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전화해서는 서운하다 이야기하는 분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났느냐, 요즘은 어떠냐, 애들은 어떻고 등등… 서운하다는 말 대신 걱정스러운 마음이 가득 담긴 잔소리들로 늦잠을 깨워주지요. 최근에는 연락이 잦아들었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 일찍 '아침형 인간'이라던가 '체중조절'에 관한 영상을 카톡으로 전달하곤 하셨답니다.
엄마가 이리도 걱정이 많은 이유는 제 성격 때문이지요. 저는 주변 정리 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랍니다. 성격분류검사에서는 ISTP 또는 ISFP라던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성격으로 분석되더군요. ㅋㅋㅋ
늘 정신이 없고, 잘 잊어버리고, 방 안에 갇혀 혼자 스트레스를 푸는 게 제 성격이지요. 저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엄마는 혹여나 혼자 우울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저를 걱정하시는 거겠지요. 아니면 스스로를 잘 챙기지 못했던 엄마의 젊은 시절이 보이는 걸까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저의 건강 걱정을 가장 많이 하시는 걸 알기에 얼마 전부터 커피를 줄이고 몸에 기운을 넣어준다고 엄마가 손수 만들어 보내주신 생강차를 열심히 마시고 있습니다. 엄마의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다면 더욱 쓴 약도 삼켜내야겠지요.
이렇게 삼키고 삼켜도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것, 일이 완벽한 것. 이 모든 게 삼박자가 딱 맞게 돌아간다면 좋으련만, 저는 여러 가지를 한 번에 완벽히 해내는 것은 여전히 부족하네요. 전업주부일 때도 힘들어했던 살림을 일까지 하면서 오롯이 혼자 해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남편과 떨어져 살던 재작년, 그 일 년간은 정신적 신체적으로 참 힘들던 기간이었습니다. 일하는 엄마라는 변명을 붙인다고 해도 너무하다 싶을 만큼 집안일은 ‘엉망’ 그 자체였죠.
그때 저의 관심은 ‘완벽하게’ 깨끗한 집보다는
‘온전히’ 아이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돌보는 것이었어요.
그런 저의 노력하는 마음을 알았던 건지, 그때부터 아이들과의 대화도 눈에 띄게 늘고, 꽁꽁 얼어있던 집안 분위기는 따뜻해져서 조금씩 웃음소리가 현관 밖으로 새어 나오기도 했답니다. 생활 습관이 셋 다 안 좋은 편이라 걱정스러웠지만, 큰 생활 습관은 자꾸 가르쳐서 바로 잡아주되, 사소한 습관들은 눈감아주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이 안정되고 어른들의 일로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 가장 먼저였기 때문이었지요. 이렇게 중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면 언젠가는 눈에 거슬리는 문제점들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여전히 아이들과 저는 노력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남편과 떨어져 살던, 그 일 년 동안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제가 혼자서 방 안에 있을 때만 안정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둘째와 함께 요리하고, 장난을 치고, 큰애의 불평을 들을 때에도 저는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저에게 의지하고 있기에 생기는 의무감이 불안감보다 컸기 때문이었을까요? 모든 상황이 저를 불안하게 만들거라 지레 겁먹었던 것과는 다르게 저의 의무감은 또 다른 표정으로 저의 마음을 감싸주고 있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게 방증하고 있지요.
무엇보다 우리 세 식구의 대화가 예전보다 늘고 웃음소리가 잦아졌다는 게 가장 기분 좋았습니다. 간혹 아이들의 잘못을 꾸짖느라 언성이 높아진다거나 화를 내더라도 오래가지 않는 우리 셋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훈육에 있어 더욱 편해졌답니다. 이견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제가 이렇게 저의 지난 생활을 가감 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글이 완성된 이후의 저의 생활에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해내겠다는 무모한 자신감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졌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의 문제점과 고칠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면을 고쳐나갈 계획을 구체적으로 만들다 보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더 나은 날들이 될 거라고요.
그때의 저처럼 자신감이 떨어지거나, 본의 아니게 현 상황이 어려우신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그때 제가 많은 도움을 받았던 마음가짐 두 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앞으로의 생활을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보지 않을 것.
다만 지금 느껴지는 상태를 알고, 그에 맞는 상황을 더 좋은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먼저 확인한 후 그에 맞는 대책을 강구해도 늦지 않음을 이제는 압니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한다고 하지요. 그동안의 저 역시 그리 살았습니다. 서둘러 판단하고 경계하여 좋은 기회를 놓치거나, 또는 너무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은 나머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이던 일도 있었습니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한다는 말이 있죠. 마음의 결정 또한 급히 먹은 밥처럼 섣부르게 판단을 먼저 내리게 되는 경우 밥은 그대로 토해버리기 마련이지요) 저는 쉽게 판단하지 않는 생활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이면서 그들의 경험과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제 것으로 만드는 연습을 할 것입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제게 맞게 만들어야 하겠지요. 현재는 메모와 생각 정리를 그때그때 메모 애플리케이션에 적고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큰 생각의 틀이 바뀌는 것은 여전히 어렵지만, 작은 생각의 그물들은 다시 짜이고 있는 듯하니, 다른 분들도 꼭 시도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방법은 물론 제 아들들과 대화하면서도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많지만, 서로가 노력해야겠지요.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도 적당한 소화제를 마시고 마사지하는 듯한 행위들을 통해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 일어나는 실수에 집중하기보다 그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날을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두 번째, 작은 만족들로 매일 나를 높여주기.
당시 남편을 내보내면서도 나의 잘못 때문에 내 생활이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자책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만에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유는 어차피 이전의 상황으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쏟아놓은 커피를 아까워하기보다는 깨진 커피잔을 얼른 치워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죠. 힘들어도 매일 쓰던 글도 잠시 놓아도 보고, 일도 중요치 않은 것은 우선순위에 제외하고 하루에 한 가지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냉장고 청소와 정리 정돈을 시작으로 집 청소에 한 달의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비운다는 행위는 생각보다 환경을 바꿔주기도 하면서 동시에 머리를 맑게 해 줬습니다. 지나고 보니 청소라는 환경의 변화가 작은 만족감을 채워준 셈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유지하는 것이 힘들다고들 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저만의 방식으로 잘 해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 방식이 다 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 정도 지저분함은 참을 수 있는 제 성격도 큰 부분 차지하겠지요? 그 외에도 지금까지도 소소하지만 불필요한 쇼핑을 하고, 수첩에 예쁜 스티커를 붙이고, 좋아하는 커피와 티가 가득한 진열장을 만들고, 작은 비즈들을 꿰어 팔찌를 만들며 하루 하나씩 집중하는 행위를 통해 지금까지 작은 만족을 잘 쌓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복리식 적금처럼 좀처럼 무너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처럼 취미가 많은 사람은 위기가 왔을 때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나 소소하게 나를 만족시키는 것들. 이 소중한 아이들 또한 역시 나의 무너진 자신감 회복에 좋은 역할을 해주고 있으니까요.
다른 많은 방법도 있었지만, 지금의 제가 되돌아보니 저 두 가지는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동시에 마음이 약해 쉽게 상처받았던 저를 짧은 시간 안에 방탄유리로 바꿔준 아주 빠르고 쉬웠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도 남의 마음과 같이 뜻대로 되지 않아요. 힘든 이유야 다 다르겠지만,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준다면 못할 것 없는, 우리는 人;사람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이 글이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되길 바라며, 저에게 기댈 누군가를 위해, 오늘도 조금 더 힘을 내며 하루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