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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May 31. 2023

사랑할 자격

FT Island "사랑사랑사랑"


현장학습이 있던 날 아침. 나와 친구는 한 아파트 단지 주차장 출구 쪽에서 차를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형의 것이었다. 우리를 집결 장소인 부산 문화회관까지 데려다주겠다던 형은 며칠 전에 샀다는 차를 타고 주차장의 오르막을 올라왔다. 차종은 기억나지 않지만 검은색이었으며 차창을 연 형은 고개를 뒤로 까딱이며 말했다.


"얼른 타."


그 한마디는 형과 나를 구분 짓는 말처럼 들렸다. 중학생인 지금의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것. 여유롭게 자차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 저게 어른인 건가. 형을 처음 본 나는 쭈뼛쭈뼛하며 뒷자리에 탔다.


"마침 가는 방향이 같아서 데려다주는 거야. 그쪽에서 업체 사람을 뵈어야 하거든."


영업직인 형은 뿔테안경에 왁스로 머리를 빗어넘겼고 두꺼운 은빛 손목시계를 차고 있었다. 입고 있는 와이셔츠에서는 움직일 때마다 주름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가 입고 있던 교복과 질감이 달라 보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서류 가방에 한 손을 넣어 뒤적거렸다. 깜빡한 건 없는지 확인하는 행위였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있었다. 그런 모습과 차에서 나는 방향제 향기, 이 모든 것이 어른이라는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었다.


"현장학습 가서 놀겠네. 놀 수 있을 때 실컷 놀아둬."


형은 후면 등으로 우리를 흘깃 보며 말했다. 친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게 휴대폰 게임을 하자고 했다. 스마트폰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인기를 누렸던 앵그리 버드라는 게임이었다. 휴대전화에서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형제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둘을 번갈아보았다. 형은 멋쩍어하며 카오디오를 켰다. 처량한 피아노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장이 멈춘다
내 숨이 멎는다
니가 떠난다


FT 아일랜드의 "사랑사랑사랑"이었다. 스크린에는 앨범 커버가 띄워졌는데 하나의 은빛 자동차를 둘러싼 멤버들이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것마저 이 차라는 것이 어른의 세계임을 명확히 정의 내리는 것 같았다.


안녕 내 사랑 사랑 사랑
잘가요 내 사랑 사랑 사랑
차오르는 나의 눈물이
온 몸을 적셔도


형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내린 차창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에 기죽지 않고 노랫말이 퍼져 나갔다. 강력하게 내치면서도 반복적으로 일렁이는 기타 연주, 빗방울 같은 피아노 선율, 애절하면서도 힘을 잃지 않으려는 가사, 운전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형의 모습. 여기에 방향제 향기와 의자의 보들보들함까지 합쳐져 어른에 대한 인상이 만들어졌다.


"너희는 연애 안 하니? 어려도 연애란 건 해야 좋아. 형 나이 되면 연애가 굉장히 어렵다? 사랑만으로는 연애할 수가 없어."


형의 말은 모습과 어우러져 하나의 자격을 시사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땅한 준비를 갖춰야 어른의 연애가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건 같았다.


"형은 그 누나랑 왜 헤어졌대?"


친구가 무심코 질문을 던졌고 형은 운전대를 잡은 채 노래 속에서 말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건지. 벌써 옛날 일인데."

"옛날이라니. 저 앞 캐비닛 열면 누나가 준 뿌까 인형 아직 있던데."

"글로브박스? 언제 열어봤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숨을 잠시 고르며)

 "자격이 부족했나보지."


형은 지나간 일이라는 듯이 대화를 대강 수습하고 노래를 이어 불렀다.


말없이 술잔을 채운다
힘겹게 손에 들며 한숨을 뱉어본다
한 잔을 마셔본다
너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아왔던
눈물을 삼킨다


"사랑사랑사랑"은 그렇게 어른의 이미지와 어깨동무를 하고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낀 어른이라는 세계에 나는 의문이 있었다. 꼭 자격을 갖추어야 하나. 슬픔은 드러내지 않고 반드시 참아야만 하나. 연애는 사랑만으로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17살, 20살, 24살... 점차 나이를 먹으며 아주 가끔 "사랑사랑사랑"이 생각나 듣곤 했고 그때마다 노래의 첫인상이었던 어른과 사랑의 이미지가 차올랐다. 그 이미지에 조금씩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사랑 하나만으로는 이룰 수 없던 관계들, 계산할 것이 많아지는 삶 속에서 놓아버린 연들이 있었고 그 앞에서 번번이 무너진 낭만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 차를 샀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청첩장을 보내왔고, 정장 입은 사진을 프로필로 했다. 자격을 하나씩 갖추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심장이 철렁이곤 했다. "사랑사랑사랑"의 시작과 함께 철렁이는 건반 연주처럼 말이다. 다들 어른이 되었구나. 나는 뭐 하고 있지?


이십 대 중반인 어느날 나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난 후 버스를 타고 야경을 보면서 문득 이 노래가 생각나 들었다.


안녕 내 사랑 사랑 사랑
잘가요 내 사랑 사랑 사랑


꽉 쥔 주먹 틈으로 빠져나간 사랑들이 떠올랐다. 안녕 내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세 번이나 부르다니. 한 번으로는 성이 안 차 메아리를 세 번이나 불러보는 아이 같은 모습을 발견했다. 여러 자격을 갖춰도 말소되지 않는 그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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