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 "루팡"
나는 배정받은 방에서 형들에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1학년 7반의 선도부원입니다!" 중학교 각 학급의 반장, 부반장, 선도부원만이 참여한 4월의 간부수련회. 입학한 지 갓 두어 달 된 내게는 한두 살 차이라도 형이면 다 커 보였다. 그들은 나처럼 햇병아리 같은 느낌이 없었고 남학교라는 곳의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는 존재들이었다. 새로 보는 형들, 암묵적인 권력관계의 압박감, 거친 언어와 활동력, 같은 중학교로 왔지만 뿔뿔이 흩어진 초등학교 때 친구들, 처음 보는 또래들. 나는 낯선 상황에 긴장한 채 인생 첫 수련회를 맞이했다.
장소는 부곡 하와이. 경남 창녕에 위치해 하와이에 모티프를 딴 이 레저 리조트는 내게 새로운 무대가 시작되었음을 인테리어로 알려주고 있었다. 곳곳에 걸린 해외 국기, 물이 가득 찬 수영장 시설과 미끄럼틀,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며 초등학교 이후의 시간들은 이처럼 이국적일 것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곳에서 섬을 헤매는 모험가가 된 셈이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고, 아침 일찍 기상해 국민 체조를 하고, 머리가 부스스한 채로 조식을 먹고, 단합력 프로그램을 받고, 수영 강습도 받으며 촘촘히 짜인 일정을 소화했다. 몰려오는 피로감과 집에서 떨어져 있다는 고립감이 수학여행의 것과는 달랐다. 아, 확실히 초등학생 때랑은 다르구나 느끼며 들어선 둘째 날 오후. 막간의 쉬는 시간을 누리며 벽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앉아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을 열어 복도에 대고 소리쳤다.
"시작한다! 다들 TV 켜!"
그러자 형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TV를 켰다. 채널을 맞추자 음악 방송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MC가 곧 나올 가수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각 방에서 열광하는 외침이 쏟아졌다. 누군가 복도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너는 누구 편이야?"라고 묻는 형도 있었다. 2010년의 어느 초여름. 가요계는 두 아이돌 팀 신곡의 경쟁이 한창이었고 팬덤이 아닌 나조차 그 상황을 이미 대략적으로 알고 있을 정도로 파급력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그 이상의 반응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지친 몸으로 뒹굴뒹굴하던 형들이 갑자기 TV 앞에 바짝 달라붙었고, 어떤 형들은 무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다른 방에서 넘어오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두 아이돌 팀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할 수 있었다. 2월에 각각 "너 때문에 미쳐"와 "루팡"을 발표하며 흥행몰이에 나선 티아라와 카라. 그들은 음원 성적과 무대 순위를 엎치락뒤치락하며 경쟁하고 있었다. 나는 제3자의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누구를 더 응원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어떤 형 한 명이 1학년들에게도 누구 팬이 될지 결정해서 수를 셀 거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같이 있던 반장은 무조건 티아라라고 말했다. 벨 소리마저 "너 때문에 미쳐"였기에 나는 그를 통해 익히 듣곤 했다. 루팡이란 노래는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 반장의 의견을 따를까 생각하던 찰나 카라의 루팡이 먼저 시작되었고 웅장한 도입부는 내 마음을 이쪽이라며 휙 잡아끌었다.
높은 건물 계단을 차차 밟아올라가는 듯한 비트, 달빛 같은 목소리, 서서히 고조되는 뮤지컬 느낌에 나는 순간 넋이 나갔다. 검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멤버들은 이 도시를 날아다니는 루팡 같았다. 어릴 적 보았던 책 표지에 그려진 검은 망토를 둘러싼 루팡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며 시각적으로도, 청각적으로도 루팡은 내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높이 올라가, 세상을 다 가져봐
Never Back it up back it up
갑자기 변주되어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후렴. 멤버들의 손이 화면을 뚫고 뻗어오는 듯했다. 형들 사이에서 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카라의 멜로디를 따라갔다. 높이 올라가라는 부분은 나를 끌고 올라가는 듯했고 Never back it up 이란 부분은 공중에 뜬 발에서 별가루가 반짝이듯 들렸다.
돌아보지 않고 높이 올라가서 세상을 가져보아라는 가사, 한눈팔면 기회는 떠난다는 가사까지. 모든 게 내게 직접적으로 전해지는 말 같았다. 중학생, 간부수련회, 부곡하와이라는 시설. 더 이상 뒤돌아볼 수 없어. 높이 올라가. 계속 올라가야 해. 다음날 방을 나서 복도로 나가는 나는 그 멜로디를 되뇌고 있었다. 덕분에 조금은 겁을 덜어내고 형들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새로운 환경을 품기로 다짐하며 점차 수련회를 마쳐갈 수 있었다.
이제 차근차근 걸어나가 봐
세상 하나하나 전부 가득 담아 봐
특별하길 원하니 네 것이길 바라니
시작해
높이 올라가 세상을 다 가져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