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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Aug 31. 2023

세계의 끝 랩소디

Nujabes "World's End Rhapsody"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나는 그 시간 그 현장으로  들어가 서있는 소년이 된다. 태국 어느 번화가의 밤거리. 그곳에 서있던 나는 16살이었고 가족과 함께 여행 중이었다. 관광 가이드가 공연 시작까지 여유로우니 밤거리를 둘러보라고 시간을 주었고 나는 카메라를 꺼내들어 눈앞의 길거리를 찍었다. 바로 그때 찍은 사진이다.


그런데 그 한 장을 제외하고 태국 여행 동안 내가 찍은 사진은 모두 지워졌다. 지워졌다기보다는 잃어버렸다가 맞는 말일까. 사진이 저장된, 당시에 쓰던 휴대폰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안에 저장된 사진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한 장의 사진이 살아남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딱 그 한 장만 찍자마자 블로그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사진이 강렬하게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사진만 보아도 나는 아직 그 거리의 소리와 열기가 들리는 것 같으니까. GOOD DAY, KEBAB, DANCE, CLUB, BEER 등이 알록달록하게 적혀있는 네온 사인, 그 아래를 걷는 관광객들의 발소리와 외국어들, 창문을 활짝 연 펍에서 밴드가 연주하는 "Desperado", 길거리 링에서 무에타이를 겨루는 선수들과 뱀을 목에 감고 쇼를 보이는 진행자, 맥주병을 들고 동전을 던지는 구경꾼들, 현란한 깃털 장식을 단 무용수들, 곳곳에서 들리는 싸이의 "강남스타일"과 태국 가요들. 다양한 소리와 음악이 거리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그 사진을 보자마자 떠오르는 음악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누자베스의 "World's End Rhapsody"를 고를 것이다. 당시 누자베스의 음악에 빠져서 태국 여행 내내 그의 앨범 <Modal Soul>을 들은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거리 어느 극장에서 본 공연 때문이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우리 가족은 어떤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팝콘 냄새가 풍기는 복도를 지나 커다란 문을 열자 마치 오페라 극장처럼 2층 구조로 되어있는 좌석이 나타났다. 우리는 2층에 앉아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웅성이며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이 오르고 무용수들이 나와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쇼는 알자카 카바레 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쇼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그저 태국 전통춤 공연인 줄 알고 보았다. 그런데 노래가 바뀔 때마다 다른 언어가 흘러나왔고 나는 내 예상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무용수들의 의상도 바뀌는 것을 단서 삼아 이 공연은 세계의 여러 노래로 이루어진 공연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때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꽹과리와 태평소 소리가 나더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나라의 민요인 "아리랑"이었다. 세계 각국 민요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아리랑은 너무나도 반가웠고 뿌듯함 마저 느끼게 했다. 무용수들은 한복과 부채를 들고나오더니 아리랑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때 객석 중 제일 앞자리에 있던 한국인 관광객 아저씨 한 분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노래에 반응했는지 무용수가 손짓을 했다.


아저씨는 망설임 없이 무대 위로 오르더니 아리랑의 선율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회색 티셔츠와 초록색 바지를 입은 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무대의 흥을 배가시켰다. 무용수들 앞에서 호흡을 맞추는가 하면 관중을 향해 호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관중들의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가 극장을 가득 매웠다. 무용수들도 활짝 웃으며 축제 분위기를 돋우었다. 흔치 않은 일인지 경호원들이 당황하는 모습도 불빛 속에서 보였다. 무용수들의 센스와 아저씨의 용기, 그리고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 환호가 어우러졌고 그건 마치 전 세계가 함께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았고 나는 인상파 화가가 된 듯 그 분위기를 머릿속에 간직했다.


뜨거운 열기가 남아있는 밤의 태국 거리를 지나 숙소로 돌아온 나는 누자베스의 음악을 들었다. "Ordinary Joe", "Reflection eternal" 같은 차분한 인스트루멘털을 들으며 침대에 누워 다리를 쭉 뻗고 여행의 피로를 풀려던 때였다. 눈에 띄는 곡이 있었다. 바로 "World's End Rhapsody"였다. 차분하거나 달콤한 트랙들 사이에 위치한 누자베스식 파티튠이었다. 재생하자 부드럽게 넘치는 비트와 중간중간 봄기운처럼 마음을 간질이는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왔다. 코러스와 드럼은 웅웅 울려대며 마치 인파를 연상케했다. 방금까지 있었던 번화가 거리의 시끌벅적함과 파티 분위기를 인상화로 옮긴 듯했다. The Quadraphonics의 노래 "Betcha if you check it out"을 샘플링한 이 트랙은 하나의 구절이 웅얼거리듯 반복된다.


Betcha if you can check it out baby
당연하지 만약 네가 확인한다면
you will know why that i love you
내가 널 사랑하는 걸 알게 될 거야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반복되는 이 구절은 World's End Rhapsody라는 새로운 제목과 맞물려 인류애를 노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대에서 내려오던 아저씨의 하트 손짓과 세계인들의 화답과도 상통했다. 사랑과 화합. 세계 곳곳의 음악과 함께하는 축제, 태국 밤거리의 열기와 불빛들, 시끌벅적함과 지칠 줄 모르는 기색. 내게 남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면 그 모든 게 떠오른다. "World's End Rhapsody"의 선율과 함께. 거리에서 춤추고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사진에서 계속 넘실댄다. 설령 세상의 끝으로 밀려나더라도 이 은 지워지지 않고 잃어버리게 되지도 않을 랩소디일 것임을 공표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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