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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by 도우너

감사하게도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분들이나 손님들이 종종 꽃을 사오신다. 특별히 무슨 날이 아니더라도 꽃을 선물하는 낭만적인 그녀들 덕분에 책방에서 자주 아름다운 꽃을 보는 호사를 누린다. 자주 접하지 못하던 예쁜 꽃을 선물 받은 날에는 혼자 보기 아까워서 빨리 누군가 와서 함께 봤으면 하기도 하고, 책방 쉬는 날에는 보는 이 없는 빈 책방에 꽃만 덩그러니 있는게 아까워서 꽃병을 들고 퇴근하기도 했다.


책방 앞집에 사는 손님께 하얀 작약 한 송이를 선물 받았을 때의 일이다. 특이한 점은 테이블 위에 하얀 꽃이 활짝 피어있는 동안 보는 사람들마다 예쁘다는 감탄 뒤에 이 꽃이 진짜인지 물으며 꽃잎을 손으로 한번 만져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인하고 나서야 ‘조화인 줄 알았다’고 말한다. 요즘은 조화가 모양과 질감이 워낙 섬세하게 잘 만들어서 만져보지 않고는 구분하기 힘들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꽃이 시들해지고 꽃잎이 누렇게 쪼그라들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자 진짜인지 확인하기 위해 꽃을 만지거나 묻는 사람이 없었다.


아름다울 땐 가짜인지 의심받고, 시들어가며 진짜임을 증명했던 꽃을 보며 진짜와 가짜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까. 흠 없이 아름다운 꽃을 보면 ‘조화’같다고 하고, 너무 예쁜 사람에게는 ‘인형’같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좋은 풍경을 ‘그림’같다고 한다. 기대 이상의 좋은 일이 생기면 ‘꿈’ 같다, 멋지고 깨끗한 집을 보면 사람이 살지 않는 ‘모델하우스’ 같다 하고, 다방면에서 너무 완벽한 사람을 보면 ‘인조인간’, 서로 너무 닭살스러운 부부를 보면 '쇼윈도 부부', 너무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사기’ 아닌가 의심한다. 이처럼 어떤 완벽함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도 완벽하기에 가짜가 아닌가 의심하고 관용적으로 그런 단어로 묘사한다.

어쩌면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것, 완벽한 것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아름다운 꽃도 시들한 구석이 있어야 살아있다고 느끼고 사람도 못생기고 허술한 구석이 있어야 인간미 있고 친근하게 느낀다. 집도 좀 지저분해야 사람이 산다고 느끼고 기대한 일들이 조금씩 좌절되어야 현실이라는 걸 안다. 그러한 변화들이 살아있는 것들의 증거라는 것을 안다. 동물 다큐멘터리에서 밀림의 왕 사자가 병들고 죽어가는 것 역시 그저 자연의 이치로 이해한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되었을 때는 모든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류발생. 나도 인간이고 자연의 일부이지만 늙지 않기를, 병들지 않기를, 죽지 않기를, 모든 관계가 화목하기를, 원하는 일들은 모두 성취되기를, 실패가 없기를, 모든 면에서 완벽하길 바란다.

그렇게 바라는 게 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인간의 그런 욕망 덕분에 지금의 편리함과 안전함을 누리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 욕망의 이면에는 뿌리 깊은 괴로움이 있다. 이를 일찍이 간파한 석가모니는 인생은 고(苦)라고 했다. 생로병사의 운명과 삶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음에 그 누구도 예외가 없지만 나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만은 예외이기를 바라며 결국 가짜가 되기 위해 진짜의 시간을 망각한다. 도달하지 못할 완전함을 찾아 헤매다 지금의 온전함을 놓친다.


가끔 백발에 눈빛이 살아있는 여성작가들 사진을 보면 나도 귀여운 백발의 할머니로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40년째 운영하는 그림책 서점 '하고'. 생각만해도 영화같지 않은가. 하지만 몇년 전부터 흰머리가 하나 둘씩 올라오기 시작하니 왜 이렇게 거슬리는지 바로 뽑아버렸다. 백발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해놓고선 검은 머리들 사이로 번져가는 흰머리가 서글펐나보다. 인간의 시스템 에러, 즉 생각과 행동의 부조화.


고정불변의 것과 변화무쌍한 것,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가짜와 진짜. 우리가 나누는 이분법의 대상들은 어쩌면 양변 모두 실체가 없다. 실체 없는 경계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즐기면 된다. 결국 즐기는 놈이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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