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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3. 2019

함부로 해도 되는 감정은 없다고 생각해서

‘진짜 감정’을 느낄 때 ‘진짜 글’을 쓸 수 있다

첫사랑의 풋풋한 감정을 낱낱이 고백하고 기록한 연애편지,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 후 눈물, 콧물을 흘리며 썼던 일기, 누군가를 잃은 상실감에 몸부림쳤던 기억 등 분노하고 화났던 상황과 슬픔을 불러일으킨 일을 떠올리며 글을 썼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당시에 느꼈던 고통과 비애, 상실감과 분노는 틀림없이 ‘진짜 감정’이었고 생생한 나만의 감정이기에 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분노를 삭이고 고통과 상처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솔직한 감정이 담긴 글은 독자들에게도 생생하게 전달되어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 


역사에 도착하고 나서 여자는 느긋한 마음으로 스마트폰을 열고 타고 갈 열차표를 검색했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열차표가 보이지 않았다. 표를 예매할 당시의 생생한 터치감은 그대로인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텅 빈 화면만이 무심하게 껌벅였다.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예전 구매 상황을 점검했다. 어이없게도 내려오는 날짜와 올라가는 날짜가 동일한 열차표 두 장이 구매 목록에 담겨 있었다. 상황인즉슨 오늘 타고 가야 할 열차표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얘기였다. 참혹한 결과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던 여자는 간신히 표를 구해 열차에 올랐다. 팔자에도 없는 특실이었다. 

 

이 글에서 ‘여자’는 바로 나다. 지난여름, 실수로 열차표를 잘못 예약해서 벌어졌던 해프닝에 관한 에세이다. 어이없는 상황을 자초한 나를 향한 분노와 당황스러운 감정은 날 것 그대로의 ‘진짜 감정’ 이었기에 한 꼭지를 쓰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날의 상황을 복기하는 와중에 감정에 주목하게 되었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받아들이고 정리할 수 있었다. ‘글’이라는 ‘안전지대’ 속에서 감정을 거르지 않고 마음껏 표출한 덕분이었다. 


예민한 안테나를 키고 감정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는 주인공 라일라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행복은 곧 ‘기쁨’이라고 믿으며 슬픔이에게 선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고 당부한다. 슬픔은 숨겨야 할 불편한 감정이라 여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슬픔이 역시 기억 본부의 엄연한 핵심 멤버다. 슬픔을 회피의 대상으로 여기고 벗어나야 할 감정으로만 바라본다면 성숙한 인격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외면한 슬픔이 거대한 산이 되어 내 앞을 가로막을지 모른다. 눌러버린 감정은 꼭꼭 숨어 있다가 임계점에 다다르면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튀어나온다. 영화 속에서 라일라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하려고 할 때 그녀의 마음을 돌린 것은 ’기쁨이’가 아니라 ‘슬픔이’였다. 인간이 느끼는 무기력과 공감, 이해와 사랑은 모두 ‘슬픔’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슬픔’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올지라도 기꺼이 환영하고 따뜻한 관심을 보여주자. 함부로 대해도 되는 감정이란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하지만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면 불편하다고 느껴 서둘러 폐기처분할 것을 강요한다. 감정을 있는 그래도 인정해 주어야 표현하고 절제할 수 있다. 뭉크는 평생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잇따라 경험한 가족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불안과 공포의 감정을 폐기처분하지 않았고 예술로 승화시켰다. 부정적인 감정이 창조적인 에너지의 불쏘시개로 활용되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행복과 불행 모두가 축복’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도 행복할 때보다는 마음이 아플 때, 외롭고 쓸쓸할 때 글이 더 잘 써진다. 아프고 슬프고 분한 마음이 글쓰기의 동력이 되어 준다. 


직장 상사에게 억울하게 당한 아버지의 분노는 아들에게로 향하고 아버지의 분노 앞에서 감정을 억압해야 하는 아들은 애꿎은 강아지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자기보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며 감정을 표출한다. 돌고 도는 분노의 메커니즘은 ‘분노의 윤회’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이다. 잘못된 방법이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나름 분노를 해소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해소되지 못한 분노이다. 억압된 분노는 자기를 공격하거나 극단적인 경우 마치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게 한다. 며느리는 안중에도 없는 권위적인 시부모 앞에 선 창백한 안색의 며느리, 갓 입대한 이등병의 경직된 표정,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감당해야 하는 석고상처럼 굳은 직장인은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렵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매 순간 감정이 생기고 그 감정을 표출할 수 있다는 말의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당한 일을 당하면 분노해야 하고 슬플 때는 울어야 한다. 감정에 솔직해지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때라야만 삶을 긍정할 수 있다. 


감정을 느끼지 못해서 타인과의 교감에 실패하고 비정하고 냉정하다는 낙인이 찍힌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감정을 억압한 경우에도 그 사람 나름의 이유가 있다. 수치심과 불안감, 외로움과 상실감 등의 감정에 압도당해 삶이 위태로워질 때 우리는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한다.  자아가 함몰될 것 같은 위기의식과 불안 대신 차라리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쓰다 생긴 무의식적인 보호막인 셈이다. 


정신분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억압된 것은 회귀한다“ 가 되지 않을까. 억압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음 한구석 어두운 공간에 숨어 있다가 언젠가는 되돌아온다. 그냥, 얌전하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파도를 동반해서 온다. 감정의 억압은 몸이 기억한다. 슬플 때 슬퍼하지 못하면 분노가 쌓이고 우울이 깊어지게 된다. 숨겨진 감정을 찾아내고 치유의 길을 떠나야 한다. 여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시간을 겪어야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맨 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무엇이고, 어떤 감정인지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정을 관리하고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삶이 무기력해진다. 매 순간 관계의 어려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영원히 심리적 유아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지고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때 책과 그림, 영화와 음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메마른 감정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다. 고흐의 그림을 보며 예술가의 고뇌에 공감하고 카뮈를 읽으며 부조리한 사회 속의 개인이 느끼는 답답함을 체험한다. 슈베르트를 들으며 삶의 비애를 느끼고 영화 <기생충>을 보고 분노한다. 


오늘 하루 즐거움과 환희,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을 얼마나 느끼고 표출했는지 생각해 보자. 느낀 만큼 살고, 표현한 만큼 자유롭다. 오늘 하루라도 욕망과 감정에 솔직해 보자. 

 ‘진짜 감정’을 느낄 때 ‘진짜 글’을 쓸 수 있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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