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5. 2019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서

- 무용(無用) 한 소설의 유용(有用) 함에 대하여 -

오래전 지인이 물었다. “허구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읽는 거야?”라고.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 만큼 숨찬 삶을 살아가야 하는 판국에 실제 이야기도 아닌 가상의 이야기에 빠져 있는 이유가 궁금해서 한 질문일 것이다. 그 시간에 차라리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말까지 포함되어 있음도 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희성 역을 맡은 배우 변요한의 대사로 대신하고 싶다. “난 원체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웃음, 농담, 그런 것들...” 말 줄임표 뒤에 ‘소설’을 넣어도 무방할 터이다. 소설은 무용하고 무책임하다. 그러나 아름답다. 


인간은 수많은 제약 속에서 순간순간 한계를 느끼며 살고 있다.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젠더 이분법에 갇힐 때도 있고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공간과 21세라는 시간적인 제한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소설은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시공간을 초월하고 인종과 종교, 국적을 초월해서 다양한 사람들의 삶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조용한 서재에서, 아무도 없는 빈 사무실에서 책과 도킹하는 순간, 내 안에서는 무수한 생각과 감정의 파노라마가 장엄한 교향곡처럼 펼쳐진다. 


돈 버는 방법을 알려주는 실용적인 책도 아니고 달콤한 말로 잠시나마 각박한 삶을 위로해 주는 따뜻함도 없다. 그렇다고 지식이 쌓이는 것도 아니다. 경쟁에서 밀려날 경우 낙오자가 되기 십상인 세상에서 문학이, 특히 소설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한가하게 허구의 세계를 다룬 소설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무용하고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생각은 그래서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 ‘초등학교 4학년에 인생이 결정’ 되는 살벌한 세상에서 ‘이기는 방법’ 과 ‘부자 되는 방법’ 정도는 알려줘야 유용한 책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소설을 찾아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은 가벼운 에세이나 돈과 직결되는 부동산 관련 서적, 그리고 실용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고,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아도 되는 책들이다. 


하지만 현재의 삶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개인의 노력 부족과 무능력으로 몰아가거나, 더 이상 쪼갤 수 없을 정도로 나눠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 관리법’ 이란 이름으로 삶을 초 단위로 나눠 쓰라고 설득하는 책은 정말 괜찮은 걸까? 현대인에게는 필요한 것은 시간을 쪼개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낭비’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한 권의 소설책을 읽으며 미지의 시공간 속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느닷없이 날아온 인생의 너클볼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누군가의 인생 속으로 들어가 보는 ‘낭비’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게 아닐까.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얘기할 때는 많지만 정작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은 별로 없다. 소설은 그동안 멀리했던 낯선 나와 조우하게 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내 삶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 속에 자꾸만 내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상처받고 소외받는 개인이다. 그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우리와 닮아있다. 그래서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인물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위로받게 된다. 


소설은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무수한 개인의 삶을 수백 페이지를 할당해서 변호하고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에 닿을 수 있게 하고 그들의 상처를 기억하게 한다. '역사'가 폐기처분한 기억을 '문학'이 기록하고 되새겨 준다. 인천 호프집 화재 사고로 친구를 잃고, 마음을 잃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은 기사 한 줄로 정리된 화재 사고 이면의 무수한 진실을 마주하게 해 주었다. 개인이 받은 상처와 그로 인해 폐기된 마음, 마음과 마음이 만나 위로받는 모습까지 섬세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간신히 그날의 진실 한 조각을 찾아낼 수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은 ‘이념’이라는 거대담론에 가려져 희생된 민초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소설이 아니었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역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해준다. 나아가 그들의 아픔을 개인의 고통으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보듬어야 할 상처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예와 아니오’ 둘 중에서 선택을 강요당했던 학창 시절의 시험문제처럼 하나의 답이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인생은 ‘답 없음’이 ‘답’인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누군가에게는 정답이 내겐 치명적인 오답이 될 수도 있다. 무수한 선택지만 우리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소설은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길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주고 한계를 깨닫게 해 준다.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우리 안의 그림자를 대면하게 한다. 금기에 도전하는 악인들은 특정한 사람의 특별한 욕망과 행위가 아니라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자아의 다름 아님을 깨닫게 해 준다. 소설은 결국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밑줄 그은 문장들은 빗물이 땅에 스며들듯 내면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왔고 스며든 문장은 위태로운 내 삶을 지탱해 주었다. 펼쳐놓은 소설을 좀처럼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책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은 ‘이런 삶을 살아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저런 삶도 괜찮을 수 있구나’로 생각의 경계를 확장시켜 주었다.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던 내 삶의 이면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닿고 싶은 삶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로버트 웬 페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 에서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작고 깨진 거울로 바라본 세상은 왜곡된 피사체처럼 보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 덤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까지 알게 된 덕분에 세상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모든 게 소설 덕분이다. 


죽음에 대한 관심은 삶에 대한 관심의 다름 아니다. 더 잘 살기 위해 죽음을 들여다보고 성찰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조금은 덜 후회하고 덜 억울해하고,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소설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현실의 삶’에 대한 관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나는 소설을 읽는다, 그리고 소설을 읽으면 글을 조금 더 잘 쓰게 된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이전 17화 결국 사과를 받아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