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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Oct 06. 2018

첫 번째. 아보카도 덮밥, 저도 좋아하는데요

정아은 <엄마의 독서>

가사와 육아는 오랜 역사를 거쳐 여성의 일로 자리매김되면서, 마치 천연자원처럼 언제든지 제공되는 무보수 단순노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 정아은 <엄마의 독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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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보카도가 딱 한 개 남았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냉장고 속에는 아보카도 한 개 외에는 마땅한 먹거리가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아보카도 덮밥을 만들기로 했다. 잘 익은 아보카도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밥을 퍼서 그릇에 담은 뒤 썰어 놓은 아보카도를 보기 좋게 얹었다. 반찬이 궁할 때면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계란 프라이와 쫑쫑 썬 김치도 빠질 수 없었다. 며칠 전 구입한 밥도둑 청어알까지 데코레이션을 한 뒤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을 화룡점정으로 떨어뜨리고 나니 제법 근사한 일품요리가 완성되었다. 남편과 두 아이들의 아침 식사였다. 아이들과 남편은 쩝쩝 소리를 내며 맛있게 한 그릇을 비웠다.


식구들을 보낸 뒤 마른 식빵으로 아침을 대신했다. 설거지 통에서 빈그릇을 씻으며 괜히 서러웠다. ‘아보카도 덮밥은 저도 좋아하는데요’ 언젠가 모 TV 프로그램의 PD가 유행시킨 말이 말풍선처럼 떠올랐다. 딱 한 개뿐인 아보카도가 나한테까지 돌아올 여유는 없었다. 아이들이 “엄마 밥은?”이라고 물었을 때도, 남편이 “당신은 안 먹어?”라고 의례적인 멘트를 날릴 때도 “엄마는 나중에 먹을게. 어서 먹고 학원 가야지”라며 여유 있게 웃어 넘겼는데 갑자기 뒷 북치듯 올라오는 이 감정의 정체는 뭐지? 


맛있는 반찬은 의례 남편과 아이들 몫이었고 밥이 모자라면 빵이나 라면으로 때우길 자처한 사람은 나였다. 대부분의 집안 일도 당연히 내 몫이었고 희생해야 할 일이 생기면 응당 ‘엄마’ 인 내가 감당해야 했다. 지금껏 그렇게 살았지만 부당하다거나 속상하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 한 끼 밥 정도 양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편해지는 관계는 결코 바람직한 관계가 아닐터인데 그 누군가가 나일 때 가장 무심한 사람은 나였다. 24시간 대기조로 아이들, 남편의 시계의 맞추어 돌아가는 삶을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여자라면 응당 집안일과 육아를 척척 해내야 하고 조그마한 결함이라도 생기면 모두 ‘엄마’ 탓으로 돌려지는 무한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불가능하고 모순된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모성’이라는 타고난 능력을 죽을 때까지 실현해야 한다. 회사 일은 언젠가 끝이 있게 마련이고 잘 해 내면 그에 따른 성과와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집안일은 애당초 끝이란 게 없다. 삼 시 세끼를 먹어야 하는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고 달래고 얼래서 겨우 잠을 재워놓은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일어난다. 겨우 일과를 마치고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잠이 들어도 다음날이면 거실에 뽀얗게 쌓인 먼지와 빨래통에 넘쳐나는 빨래는 다시금 가사 노동의 현장 속으로 발빠르게 움직이게 한다. 


가끔씩 집안 일을 ‘도와주는’ 남편과 아이들은 마땅히 내가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눈물 나게 고마운 존재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계속 이어질 가사노동은 시지프스의 천형처럼 영원히 반복되고 있었다. “가사와 육아는 오랜 역사를 거쳐 여성의 일로 자리매김되면서, 마치 천연자원처럼 언제든지 제공되는 무보수 단순노동으로 평가절하되어 왔다” 는 정아은 작가의 말처럼. 


결혼 전에는 손에 물 한 번 묻히지 않았다. 어쩌다 된장 찌개라도 끓일 때면 멸치를 몇 마리 넣어야 하느냐고 물었던 한심한 딸이었다. 부엌 근처에 가면 큰일이 나는 줄 아는 아버지와 가사 일에 무심한 딸과의 동거 속에서도 아무 일없이 가정이 잘 굴러갔던 것은 보이지 않는 엄마의 손 덕분이었다. 친정집 세 딸들의 성장사 속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헌신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었다. 엄마의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문화 속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면 일 순위는 항상 엄마였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엄마’ 의 욕망과 감정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모성신화’로 무장한 여자는 결혼과 동시에 혹은 ‘엄마’ 가 되는 순간 가정과 자식과 관련된 것 외에는 어떠한 욕망도, 감정도 품어서는 안 되었다. 오직 남편과 자식을 위한 희생이 삶의 목적이 되는 삶을 강요당했다. 가정이 잘 굴러가기 위해 존재하는 필수 부속품 같은 존재가 ‘엄마’라는 자리였다. 


결혼 전, 집안일에서 제외되는 것을 당연시했듯 결혼과 동시에 집안일이 내 몫이 되는 것 또한 자연스러웠다. 엄마의 삶을 내면화한 나는 결혼 후 자동 인형처럼 그 삶을 되풀이했다. ‘모성이라는 성스러운 역할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날 만한 말을 했을 경우 눈치를 보고 얼른 꼬리를 내려야 하는 현실속에서 문제의식을 느낄 수 조차 없었다. ‘엄마’만이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을 내려놓는 일은 ‘엄마자격이 없는 사람’, ‘비정상 적인 사람’으로 매도 당하고 ‘엄마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긴 훈계까지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좋은 엄마’ ‘좋은 아내’ 가 되기 위해 온갖 잡일과 돌봄 노동을 짊어 지느라 허리가 휘는 줄도 모르고 사는 동안 내면 깊숙한 곳에는 고통과 절망의 싹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그만 두려고 한다. 내 딸이 결혼 후 자신의 희생을 당연지사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깟 밥 한 그릇이 대수가 아니었다. 혼자 서러워하며 식구들을 원망하는 일도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남자가 생물학적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사노동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딸이 가사노동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혼자서 짊어졌던 일상의 짐을 조금씩 나누기로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떳떳한 관계가 건강한 관계일 것이다. 희생으로 점철된 엄마의 삶은 왜곡된 보상심리로, 부모의 희생으로 기생하는 삶을 산 자녀는 죄책감으로, 접점 없는 평행선을 영원히 달려야 한다. 하루 세 끼 밥상을 차려내야 하는 ‘천형’과 세 아이의 존재를 감당해야 하는 일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지만 ‘좋은 엄마’가 되기를 이쯤에서 내려놓으려는 용기가 생겼다. 더 이상 ‘괜찮은 척’ ‘힘들지 않은 척‘ 하지 않고 ‘나’라는 수많은 정체성 중의 하나로 ‘엄마’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마트에 들러 잘 숙성된 아보카도를 고르고 갓 지은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에 얹어 근사한 밥상을 차려야겠다. 오로지 나를 위한 밥상을 말이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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