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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Feb 02. 2018

두 번째. 엄마의 겨울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나는 문득, 너무나 뒤늦게 참으로 어리버리하게도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젊었었는지 깨닫게 됐다. 아아, 이런 깨달음이란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몰래 쓰레기장에 내버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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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째 허리 때문에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드디어 수술을 받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서울로 모시고 와서 집에서 가까운 척추 전문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다. 워낙 고령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힘든 수술을 잘 견뎌내셨고 경과도 나쁘지 않았다. 수술이 끝난 후에도 당분간 한 달에 한 번은 경과를 지켜봐야 했기에 동생과 내가 번갈아 친정으로 내려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오고 다시 내려가는 일을 반복했다. 


친정에는 엄마보다 더 연로하신 아버지 밖에 안 계셔서 수술 후로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내가 몸을 씻겨 드리곤 했다. 바쁘게 살다보니 어머니와 함께 목욕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무심한 딸로 살아왔다. 내 새끼만 챙길줄 알았지 정작 내 어머니는 한번도 제대로 챙겨 드리지 못한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욕탕에 어머니를 밀어 넣고 때수건으로 묵은 때를 밀어 드렸다. 거동이 불편하셔서 혼자서 제대로 씻지 못했던 어머니 몸에서는 굵은 때가 쉼없이 밀려 나왔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피부미인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살성이 희고 좋으셨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동네 목욕탕에 가면 유난히 희고 탐스러운 어머니의 피부와 가무 잡잡한 내 피부는 모녀간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무심한 세월은 어머니도 비켜가지 못했다. 장작개비처럼 마른 다리와 힘없이 늘어진 피부는 허리 쪽의 거친 수술자국과 함께 신산스런 지난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목이 메었다. 엄마가 뭐라고 말을 붙였지만 못 들은 척 묵묵히 때만 밀어 드렸다. 


어렸을 때 우연히 엄마의 처녀 때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흑백 사진 속의 엄마는 당시 유행하던 최신식 양장에 단아한 올림머리로 한껏 멋을 냈다. 친구들과 팔짱을 끼고 밝게 웃으며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고궁에서 찍은 사진인 듯 했다. 사진속의 엄마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당장이라도 사진 속에서 튀어나와 나를 버리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갈 것만 같았다. 서둘러 앨범을 덮고 사진 속의 엄마 모습을 애써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내가 철이 들고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 엄마에게도 분명 인생의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이 있었을 것이다. 이른 봄, 살짝 고개를 내미는 여린 새싹과도 같은 유년기, 꿈을 머금은 아름다운 여고시절과 찬란한 청춘의 여름도 지나왔을 것이다. 결혼 후 자식들을 키우는 동안 조금씩 빛이 바래져 가는 나뭇잎처럼 인생의 가을도 지나왔다. 이제 춥고 고독한 겨울의 막바지를 지나고 있는 어머니. 건강마저 여의치 않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의 등에 쌓인 굵은 때를 밀며 세월의 때도 말끔히 밀어드리고 싶었다. 


고령이신 두 분 부모님이 더 이상 생활을 꾸려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로 모셔오기로 한 날이다. 친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돌을 매달은 것처럼 무거웠다. 이삿짐센터에 짐을 맡기고 부모님은 차로 따로 모셔야 해서 친정으로 내려갔다. 봄은 한창이었지만 내 마음은 차디찬 겨울의 한 자락을 지나고 있었다. 


이사를 하루 앞둔 집은 부모님의 삶처럼 어수선했고 낡은 짐들이 여기저기 함부로 부려져 있었다. 근육이 모두 빠져나간 다리는 체중을 지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운 아버지는 내 삶의 보호자로 단정하게 자리하시던 예전의 모습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허리 수술 후 더욱 수척해진 어머니는 펠리컨처럼 늘어진 목살로 나를 슬프게 했다. 이제는 내가 늙은 부모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보니 새로운 집은 금방 정리 되었고 오자마자 두 분은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리에 누우셨다. 나머지 짐을 정리한 뒤 반찬 몇 가지로 냉장고를 채웠다. 딸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부모님은 말이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무기력하게 의존할 뿐이었다. 그 눈길이 부담스러웠고 부담스러운 마음은 죄책감으로 이어졌다. 거동이 자유롭지 않게 된 이후로 부모님은 자주 ‘미안하다’고 하셨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우리 몸은 어느 순간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 자유의지로 가능하지 않은 순간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부모님의 ‘개별적인’ 인 늙음과 고통은 피붙이인 딸조차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누구나 겪는’ ‘늙음’의 단계를 지나고 있다는 일반적인 명제 속에 가두기엔 두 분이 지나온 삶의 스펙트럼은 한없이 넓었다. 고통 속에 있는 인간은 외롭고 고독하다. 부모님의 고통과 고독의 한 자락도 나눠 가질 수 없는 나는 그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평론가 김혜리의 말대로 ‘정확하고자 하는 노력이 사랑’이라면 부모님의 고독과 슬픔의 정확한 지점에 닿기 위한 노력을 ‘사랑’이라는 말로 대신하고자 한다. 


얼마 전 친정 엄마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친구가 있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어머니를 보내드린 친구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문인수 시인의 ‘하관’ 이란 시가 문득 떠올랐다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집에 도착한 나는 한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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