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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9. 2019

생활은 나아졌다

소설가 김영하가 강연회에서 독자를 만났다. ‘글쓰기가 밥벌이가 되나요?’ 독자들의 물음에 작가는 웃으며 대답했다. “예, 생활이 점점 나아집니다” 책을 쓰고 인세가 들어오니 생활이 나아진다는 의미와 책을 쓰는 과정에서 성장하고 깨달으니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중의적 의미라고 이해했다. 김영하 작가의 말은 내 경우에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책을 쓰고 나면 일단 인세가 들어온다. 한동안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니 강연료도 챙길 수 있다. 운 좋게 협업을 제안하는 회사가 생기면 수입이 조금 더 늘 수도 있다. 출판시장은 365일 불황이므로 책으로 돈 버는 일은 유명 작가 몇몇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힘들다고 보는 것이 맞지만 어쨌든 수입이 느는 것은 맞다.


글을 쓰기 전의 나는 날카롭고 뾰족했다. 지난한 삶이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져 무기력에 빠졌다. 해야 할 일만 해야 하는 삶을 불행하다 여겼다. 어딘가에 가서 실컷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정신 나간 사람 취급당하기 십상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는 책 속으로 도피했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에는 무의미의 세계로부터 잠시 비켜날 수 있었다. 미지의 세계, 나와는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책 속 인물과 함께 하는 동안 감정은 고양되었고 화석처럼 굳어져 갈라졌던 마음에도 다시 물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잠시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고 더 갈급해지기만 했다.


우연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글쓰기는 어느덧 목적 없는 글로까지 확장되었다. 뭘 써야 한다는 뚜렷한 목표 없이 그저 그날의 감정과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직장에서 속상했던 일, 가족에게 상처 받은 일, 관계 속의 어려움과 소외감 등을 글 속에 풀어놓았다. 분노 게이지가 솟구치는 날에도 책상으로 향했다. 욕을 해도 무방했고 마음속으로 눈물을 쏟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어김없이 감상을 적었다.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잡아두고 싶었다. 글로 쓰는 순간 책과 영화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시간이 능동적인 글쓰기 행위가 보태지자 의미 있는 시간으로 탈바꿈한 결과였다. 허전했던 마음이 조금씩 채워졌다. 날카로웠던 마음의 모서리는 둥글어졌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날을 새웠던 나는 어느새 조금은 순한 양이 되어 있었다.   


말이 약한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기회를 좀처럼 만들지 않았다. 강연장에서는 강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제일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고 의사표현을 해야 할 상황에도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기를 자처했다. 자기소개는 최대한 짧게, 할 만만 했고 마이크가 오면 재빨리 옆 사람에게 토스했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나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한 인간은 그것이 비록 자의로 선택한 일일지라도 우울할 수밖에 없다.  

작가가 되고 나니 글을 쓸 일이 많아졌다. 말 대신 글로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글 속에서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우울하던 마음도 조금씩 편안해졌다. 소심하던 인간이 대범해져 직장 상사와 글로 맞짱 뜨는 일까지 생겼다. 글을 쓰기 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는 나의 승리(?)였고 그 날 이후 직장생활이 조금 편해졌다. 더러워서 안 건드리는 게 아니라 나를 존중해서라고 믿기로 했다.


글을 쓰고부터 타인에 대해 조금 더 예민해졌다. 학교 앞 고물상으로 아침마다 폐지가 가득 담긴 수레를 끌고 삼삼오오 모여드는 노인들, 공공건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 취급을 받으며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들, 수십 번, 수백 번의 퇴짜를 당했음에 분명한 카드사 계약직원이 내미는 신청서에 나는 더 이상 무심할 수 없게 되었다. 흔히 난쟁이라 불리는 ‘저신장 장애’를 앓고 있는 연극배우의 공연장을 찾았고 장애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의 한 줄 시에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기부라는 이름으로 푼돈을 보태는 일도 생겼다. 부지런히 읽고 쓰는 동안 내게 일어난 변화였다.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하는 일이 잦았다. 대상은 주로 편하고 만만한 가족들이었다. 상처 받은 가족 못지않게 상처 준 당사자가 감당해야 하는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내 안의 욕망과 금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어린 시절의 상처와 그 상처가 남긴 흉터, 부모에 대한 양가감정 등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내 모습을 글을 쓰면서 마주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상처에 밴드를 붙여주고 어두운 골방에 웅크린 채 울고 있던 내 안의 어린아이의 등을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내 잘못’ 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욕망과 죄책감, 불안의 실체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이해하니 사랑할 수 있게 됐다. 보잘것없고 초라한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바뀌었다. 상처의 뿌리와 문제의 근원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셀프 치료이자 위로가 되었던 글쓰기는 불안정한 내 삶의 동반자가 되어 위태로운 정서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해 주었다.


글을 쓰면서 감정을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글이라는 안전한 공간에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격한 감정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드(id)만 득실 되던 심리적 공간에 비로소 자아(ego)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초자아(super ego)까지 나서서 교통정리를 도와주었다. 감정을 다스리게 되면서 관계가 나아졌고 삶은 조금 더 풍요로워졌다.


글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글쓴이의 됨됨이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가 속한 사회경제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까지 그가 사용하는 어휘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같은 주제로 글을 쓰게 해도 각양각색의 다른 글이 나오는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는 만큼 쓴다’는 말은 그래서 나온 말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나서 정말로 생활이 나아졌다. 김영하 작가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young_geul.1016/

블로그: https://blog.naver.com/mndstar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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