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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원 Jul 09. 2021

하동 일기 木  할머니의 노란 자전거

나를 찾아가는 여행 에세이 8

동정호 일등석

 동정호 일등석에 앉아 순천역에서 사 온 광양 기정떡으로 아침을 먹으면서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난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는다.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 중략


 부스러기에 개미들이 힘을 합쳐 영차영차 모여드는 것을 보노라면 부스러기가 쓰레기가 되지 않고 자연과 연결되는 마당이라는 공간이 참으로 소중하다. 가장자리에 앉은 이마저도 혼자라는 외로움, 이런 버석거리는 낙엽 아래, 우리가 흙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10:30 동정호 양귀비 꽃길

가끔은 이런 여린 분홍이었으면 좋겠다                                            꽃 속의 황금별                            
                         배추흰나비             사이좋은 민들레 풀씨들       
평사리들판

 나비 수십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이곳은 어쩐지 마음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빵과 염소젖으로 만든 치즈, 우유를 담은 유리병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페터와 들꽃과 나비가 날아다니는 들판에서 머리 뒷짐을 지고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 그곳.

  "천국 같아.."

핑크빛 양귀비 꽃과 얼굴을 마주대고 이야기하느라 자꾸만 걸음이 느려지는 곳. 나풀거리는 나비들의 하모니 속에 나도 하나의 화음이 된 것 같다.


11:00 평사리들판 개구리

평사리들판
평사리 논을 눈앞에 두고 죽어간 개구리

  평사리 논을 눈앞에 두고 죽어간 개구리.

  논을 눈앞에 두고 끝을 모른 채 죽는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결코 닿지 않는 이상향을 향해 가다 결코 닿지 못한 채 죽는 것. 이 말라버리고 납작해진 개구리에게서 나는 숭고함마저 느꼈다. 누가 이 개구리에게 생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지막까지 이상향을 향해 최선을 다했던 개구리. 그건 우리 모두의 모습이지 않을까.


                  박경리 작가의 시 '모순'(왼쪽) 토지 서문(오른쪽)                                  


 고난의 역정을 밟고 가는 수 없는 무리. 이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라면 이상향을 꿈꾸고 지향하며 가는 것 또한 우리네 삶의 갈망이다. 그리고 진실이다.


오전 11:30 평사리공원 섬진강변

 평사리 들판 끝에서 도로와 이어지는 횡단보도로는 평사리 공원으로 갈 수 없다. 논을 가로지르는 왼쪽 하얀 길로 쭉 걸어가야 한다. 횡단보도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가 도로 시설물을 점검하는 직원분에게 가는 길을 여쭈었다. 그랬더니 태워주신단다. 그리고 혹시 돌아올 때 필요하면 연락하라며 종이 끄트머리에 서툴게 전화번호를 적어주시는 게 아닌가.

  "여기 근처에 가볼 만한 곳이 있나요?"

  "아, 여기 근처에 별로 볼 건 없는데.... "하며 긁적이며 고민하시는 모습에 숨길 수 없는 순박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평사리들판으로 돌아가 길을 보여주신 후에야 떠나신 고마운 분. 덕분에 마음이 놓인다.

평사리공원 섬진강변의 망중한

  막 걸음마를 뗀 아기들의 모래 놀이터가 되고 그림같이 앉은 밀짚모자 쓴 아저씨의 망중한의 장소이자, 어깨를 마주 댄 남녀가 말없이 앉아있다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오랜만에 손을 잡고 걷는 곳. 휘적휘적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가기엔 왠지 소매를 잡아끄는 것 같은 섬진강 줄기가 몇 번씩 뒤돌아보게 한다. 강이 휘돌아나가는 돌개물 소리를 들으며 잠시 있는다는 게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나직이 휘돌아 나가는 물살처럼 내 마음속에도 물결의 소용돌이가 있다. 섬진강변은 바람도 부드러워서 모랫가에 앉아 그저 오래도록 나긋한 물결을 바라만 보고 싶다. 강을 품어주는 나지막한 산자락, 은은하게 따스한 모래, 그리고 부드럽게 서늘한 바람.

나를 잊고 그저 이 바람이 되고 싶다.

부드러움은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다.

어머니, 어머니!


별헤는 밤 / 윤동주

...... (중략)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섬진강은 그리운 어머니의 품 안 같다.


오후 1:30 할머니의 노란 자전거

  

 모퉁이를 돌면 마음속 작은 소망에 한 발짝 가까워진다. 모퉁이를 돌면 바늘꽃이 노란색 자전거와 기다리는 곳. 이렇게 우연한 발걸음이 생각지 못한 작은 기도와 연결되는 곳이 평사리들판이다.


 "할머니, 저 자전거가 너무 타고 싶어서요..."

 "괜찮아~ 갖다만 놓으면 돼~ 여기 길이 좋아서..."

  예쁘게 노란색으로 칠하고 기름을 잘 먹여 관리하셨는지, 세상에 서울시 공용자전거 '따릉이'보다 훨씬 매끄럽게 잘 나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 김광석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리결같은 나무 아래로 

(......)

설레임과 두려움으로 불안한 행복이지만

우리가 느끼며 바라본 하늘과 사람들

(......)

햇살이 눈부신 곳 그곳으로 가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곳으로 가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논길 사이로 자전거를 타는 혜원이 된 기분이다. 양 쪽에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논을 가르면서 살랑이는 바람이 귓가를 스치며 내 마음도 활짝 열리는 것만 같다. 이대로 이 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 마냥, 미소가 꽃처럼 피어나고 마음속 뭉클함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이곳은 나의 고향, 그리운 들판, 언제나 나를 지탱해주는 나의 뿌리.

  고무장화를 신고 호스로 비료를 주시는 할아버지, 아저씨가 모판을 던져주면 한 움큼씩 쥐고 일렬로 모를 심는 아주머니들, 이 분들의 땀과 손길에 오늘도 이렇게 살아있다.


  "재미있었어~?" 할머니께서 웃으며 물으신다.

  "네!"

  한참 밭을 일구고 2시가 넘어서 할아버지가 모는 털털거리는 경운기 뒤로 노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할머니가 나무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나서야 나도 돌아가는 걸음을 옮겼다.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부부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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